345화
"DS는 나쁜 곳이잖아요. 안 갈래요."
유진이가 담담하게 내뱉은 그 말은, 당연하게도 소리없이 오디션장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핵폭탄급 발언이었다.
아마 방송이었다면 방송 사고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싸해졌으며 DS 소속의 심사위원은 완전히 썩어 버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초토화돼 버린 상황에서 오디션 진행자가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으며 입술을 뗐다.
"그…… 무슨 뜻인가요, 김유진 양."
겨우 짜낸 말.
그 말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당사자인 유진이는 아무렇지 않을 얼굴로 설명했다.
"우리 오빠가 그랬어요. 근묵자흑이라고."
근묵자흑(近墨者黑).
검은 것을 가까이 한 자는 검은색이 된다.
그러니까 나쁜 것을 가까이 하면 나쁜 것에 물든다는 말이다.
"DS는 마약을 한 사람도 있고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곳에 가면 저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안 가려구요."
"……아, 그, 예, 음……."
진행자는 아예 멘탈이 나가 버렸다.
DS의 심사위원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게 나았으니 여기에 발끈해서 버럭했다면 최악으로 치달았을 테니 그렇다.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유진이는 그렇게 여럿 멘탈을 갈아 버리고서는 태연하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무대에서 내려가 버렸다.
"와, 미친."
"대박."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중에도 유진이는 어깨를 움츠리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서태주는 그 모습을 보며 과연 도진이 동생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갈까?"
"아뇨. 다른 분들 오디션 보시는 거 구경할래요."
"어…… 그래."
한 번 더 도진의 동생이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아니,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태연히 구경을 한다고?
항상 생각 그 이상을 보여 주던 도진의 면모가 여기서 드러난 것이었다.
유진이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고 서태주 또한 그 옆에 앉아 오디션을 구경하게 됐다.
서태주는 그래도 이래도 되나 싶은 표정이 엿보이는데 유진이는 완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차, 참가 번호 69번 나와 주세요."
진행자가 바스라진 멘탈을 억지로 기우고 오디션을 계속해 나갔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 뒤로 71번 참가자가 나름 끼를 발산하고 난 뒤에야 조금 누그러들었다.
다들 대형 사고를 덮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오디션이 중요했기에 암묵적으로 그것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유일한 한 사람, DS의 심사위원만큼은 결국 마지막까지도 멘탈을 회복하지 못했다.
"저, 저 잘 할 수 있어요! 한 번 뽑아 주시면 안 되나요?"
그는 179번 참가자, 서태주가 보았던 '양아치 그룹' 중 한 명이었던 여학생의 간절한 어필에도 전혀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3대 기획사의 심사위원들이 한 명도 버튼을 누르지 않자 그렇게 자신을 어필한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지 중소 기획사 중 하나가 픽을 해 줌으로써 구사일생했다.
그 해프닝을 방송사의 카메라가 담았으니 그녀가 방송용 예선에서도 그림을 만들어 준다면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하고 돌아가는 길에 서태주는 생각했다.
"어땠어?"
"좋은 경험이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유진이는 서태주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사실은 조금 자신이 있었는데, 심사위원님들 말씀대로 오래 준비한 분들은 내공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구나."
꽤 어른스런 대답이다.
열세 살의, 아직은 예쁘다는 말보다 귀엽다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인데 말이다.
그래도 탈락해서 실망했을지 모르니 힘내라는 의미로 맛있는 거라도 사줄까, 하고 서태주가 말하려던 차였다.
"야."
한 무리의 학생들이 서태주와 유진이의 앞을 막아섰다.
중소 기획사의 '픽'을 받았던 여학생을 포함한 여섯 명의 학생들은 오디션장에서 서태주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던 양아치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으로 보이는 여학생, 중소 기획사의 픽으로 구사일생한 여학생이 유진이를 노려보았다.
"왜 그러세요?"
유진이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여학생은 그 당돌한 모습에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씨발, 그딴 소리가 나와?"
그들이 그렇게 당차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좁은 골목길이기 때문이다.
오디션 때문에 주차장은 물론이요 웬만한 곳들에 죄다 차가 들어찼던 탓에 서태주는 이런 곳 근처까지 와서야 차를 댈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도진의 표현으로 '보급형 벽태웅'이라 할 정도로 피지컬적으로 돋보이는 서태주가 곁에 있었음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이 모두 무림고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서태주가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서 말했다.
"말을 곱게 하는 게 어때? 어린애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남자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서태주의 무서운 표정에도 그들은 쫄지 않았다.
"아니 씨팔. 애가 무슨 벼슬이야? 좆같은 소리 하네."
그들은 서태주를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그 몸만 봐도 무림인인 게 뻔함에도 그토록 여유를 보이는 건 예의 무리의 중심에 있는 여학생의 '감'이 제법 좋기 때문이다.
-야, 저 새끼 팔뚝 봐라. 건드려도 되겠냐?
-아이 씨팔. 좆 달고 있는 새끼가 왜 이렇게 쫄고 지랄이야. 딱 봐. 저 새끼는 포스가 없잖아.
그녀는 따로 학원에서 선생을 맡고 있는 무림인에게 배웠다.
'고수'는 척 봐도 아우라, 혹은 포스라는 게 느껴진다고.
언뜻 들으면 사이비 같은데 그게 아니었음을 그녀는 실제로 경험했다.
진짜로 고수는 어떻게 설명하기 오묘한 포스라는 게 정말로 느껴졌다.
사실 그것은 현대의 무림인들이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내공이 기세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제법 괜찮은 감을 타고났던 것이다.
무림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무림이 급격히 발달하는 시대였으나 여전히 몇몇 부분은 낡고 어설펐는데 그녀의 감과 그녀가 다니는 학원의 선생이 말하는 포스 같은 데서 그런 부분을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그리고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쪽수에 힘입어 그들은 그토록 기세등등한 것이었다.
여학생의 바로 곁에 있던 남학생이 나섰다.
"걔 하나 때문에 오디션 분위기 개씹창 났잖아. 덕분에 여림이가 안 봐도 될 큰 손해를 보고 개쪽을 팔았는데 왜 그러세요? 존나 낯짝 두껍네?"
서태주의 시선이 유진이에게로 향했다.
유진이는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맞"
쿵-!
"아가리 다물어."
서태주가 발을 구르며 양아치들의 말을 짓뭉갰다.
진각과 싸늘한 말이 가져다주는 위기감에 양아치들의 입이 다물렸다.
"불만이 있으면 덤벼. 너희한테 아가리를 놀릴 자격은 없으니까."
"……."
눈치를 본다.
얘기했던 거랑 다르잖아?
그런 항의가 언뜻 오고갔으나 그들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덤벼들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가오'가 상하니까.
그런 이유였다.
그런 이유뿐인 양아치들이었기에.
빠악-!
"켁!"
뻑!
"우웨에엑!"
한심하게 나뒹굴고 먹었던 것을 토해내는 몰골을 보이는 결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양아치들을 부수지 못할 정도로 서태주가 단련한 육체와 심지는 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서태주는 어설프게 달려드는 그들을 상대로 대충 주먹을 놀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압도적인 실력차로 모든 공격을 무위로 만들고 강렬한 주먹을 때려박았다.
양아치를 상대로 서태주의 주먹이 자비로울 이유가 없었으니까.
남학생 넷이 그렇게 벌레처럼 바닥을 꿈틀거리니 여학생 둘은 파랗게 질려선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태주가 그런 그녀들을, 무리의 중심이었던 여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린애한테 책임전가하는 한심한 년이야, 너는."
주먹 대신 말로 그녀를 후려치고 서태주는 유진이와 함께 양아치 무리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멀쩡히 서 있던 두 여학생은 그런 서태주와 어깨를 부딪치고 휘청였으나 주먹을 쥐어 보이지조차 못했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나와 차에 탄 뒤에야 서태주가 말했다.
"…욕해서 미안."
"왜 오빠가 사과해요?"
"네 앞에서 욕했으니까. 미안해."
유진이는 조금 색다른 시선으로 서태주를 응시했다.
"오빠, 꽤 괜찮은 사람이네요?"
서태주가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지금까지는 괜찮은 사람 아니었어?"
"응…… 우리 오빠보다는요? 그래도 알고 보면 오빠도 화화공룡 자질이 좀 있는 사람 같아요."
"아니, 화화공룡이라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 그러자."
요즘 애들은 화제 전환이 빠르구나.
아니, 여자애라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서태주가 핸들을 돌렸다.
* * * *
토를 하고 바닥을 굴렀던 양아치들은 서태주와 유진이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도 거기에 있었다.
개쪽을 팔고 화는 나는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무리의 중심인 여학생, 여림이가 개지랄을 할 거 같아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깔린 장소를 흔드는 목소리가 돌연 튀어나왔다.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지."
"뭐야 또 씨발!"
버럭 소리를 지른 여림은 갑자기 나타난 남학생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썼으나 직감적으로 또래임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평범한 피지컬'과 '평범한 분위기' 또한 대번에 읽어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쏟아내지 못했던 지랄을 쏟아냈다.
"넌 어디서 기어 나온 새끼야 이 씨발아!"
"니들 쳐맞는 병신 같은 모습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미친 새끼가!"
여림이 바로 달려들었다.
이름이 그리 높지 않다고는 하나 무림고에 다니는 여학생이며 일진 노릇을 하고 있다.
남녀의 태생적인 차이를 커버할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짝!
"뀁!"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그녀는 남학생의 가벼운 손짓에, 그러나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커다란 타격음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급소인 얼굴, 그중에서도 입술에 싸대기를 맞고 나뒹군 것이었다.
"이건 또 뭐야!"
화들짝 놀란 무리가 일어나 덤벼들었다.
아, 진짜 좀 멍청한 애들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남학생은 그들 또한 차례차례 입술 싸대기를 날려 주었다.
"퀙!"
"쿠헙!"
"씨발새꺽!"
한 방 먹여 주었는데도 다시 일어나 덤비는 것들에겐 배에 주먹을 먹여 주었다.
이치도, 심지어 초식마저도 필요없을 만큼 압도적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몸에 새겨준 것이었다.
"우웨에엑!"
"꺼어억."
토를 하기에 거기에 얼굴까지 처박아 주었다.
여림도, 또 다른 여학생도 예외가 아니어서 직접 토사물에 면상을 문대 주는 무자비한 모습에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듯 그들은 얌전해졌다.
버둥대는 여림의 얼굴을 직접 붙잡고 토사물에 문대는 모습을 보고도 발작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남학생은 토사물 범벅이 되고서야 얌전해진 그들을 무릎 꿇리고서 말했다.
"니들 빡대가리야?"
"……."
"빡대가리냐고."
"아, 아뇨……."
토사물이 덕지덕지 묻은 남학생 하나가 겨우 대답했다.
"근데 왜 덤벼?"
"……."
"아니, 감각에도 안 걸리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일단 경계하는 게 정상 아닌가? 니들 무림인이잖아."
"……."
"최소한 한 대 맞았을 때라도 '어라, 뭔가 이상한데?'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내 기준이 너무 높았나?"
"……."
양아치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림은 북받쳐 올랐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으나 남학생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뭘 잘했다고 쳐울어. 너 내가 흑도였으면 벌써 장기 털리러 어디 무서운 곳 갔을지도 몰라."
"히, 히극!"
양아치들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겨우 이런 한 마디에 반응하는 게 평소라면 웃겼을 텐데, 남학생은 이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웃지 않았다.
다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니들 같은 떡잎이 노란 새끼들에게 말 해 줘서 뭐하겠냐만, 그래도 적선하는 셈치고 말하는 건데. 마음 곱게 써라. 특히 너. 오디션 합격한 너."
"저, 저요?"
풀메이크업을, 그것도 오디션에 대비해 짧은 평생 가장 공을 들여 제법 예쁜 모습이었으나 입술이 퉁퉁 붓고 심지어 토사물까지 더해져 이제는 최악이 된 얼굴의 여림이 움찔했다.
"그래, 너."
"너 임마. 니가 아이돌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아이돌이 될 거면 처신 잘하라고. 만약 니가 아이돌이 돼서 TV 나왔는데 니가 괴롭힌 애가 그걸 보고 인터넷에 행실 폭로해 봐. 너 그냥 나가리 되는 거야. 이해가 되냐? 빡대가리라 잘 안 되나?"
"……."
"아이돌 되고 싶은 맘이 진심이면 잘 생각해 봐. 그리고 그 붕어 주둥이. 하루 얌전히 자고 일어나면 나으니까 괜히 빨빨거리면서 다니지 말고 집에 가서 얼굴 닦고 자라."
남학생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양아치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남겨진 양아치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