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그래봬도 서태주 또한 '천재'다.
천재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배경'으로 숭무영재고에 입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진이 연락한 이유를 직접 듣지 않고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나 대신 유진이의 보호자로 오디션에 가 달라.
그런 부탁을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정답이었고, 그렇게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서태주가 물음표를 표정에 띄운 건 도진이 웬 이상한 성대모사를 했기 때문이다.
'하와이도 아니고.'
도진은 서태주의 짜게 식은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고선 말했다.
"이런 부탁을 할 게 너뿐이어서 말이지."
"뭐, 그렇겠지."
유진이가 도진에게 오빠는 따라오면 안 된다고 한 건 시선이 도진에게만 집중되고 본질에서 벗어난 관심만이, 그것도 과도하게 따라붙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이라면 소위 말하는 '김도진 패밀리' 중 유진이를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소담이나 나지윤, 상미, 우서진 등 명성이 아닌 외모만으로도 난리가 날 인물도 많고 말이다.
그렇게 거르고 또 거르니 유일하게 남은 게 서태주였다.
서태주 또한 분명한 김도진 패밀리였으나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고 외부에 명성을 떨친 적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실력자이면서 도진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서태주는 그런 도진의 의도까지 읽었기에 내심 뿌듯한 마음이었다.
도진이 동생들을 그렇게 아끼는데, 바로 그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자신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믿는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인정받은 듯해 뿌듯하다.
"좋아! 내가 함께 가 볼게."
"고맙다."
서태주 또한 여러가지 일로 바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진의 부탁에 그 정도 시간은 낼 여유가 있었다.
다만.
"그런데 말야."
"응?"
"네 동생 이미 유명하지 않아?"
잠룡의 동생이라면 도진의 너튜브는 물론이요 바른 엔터의 웹예능에도 얼굴을 비춘 적이 있다.
서태주의 지적에 도진은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마 지금은 알아볼 사람이 없을걸?"
그렇게 말하며 보여주는 휴대폰의 사진을 확인한 서태주가 꽤 놀란 얼굴이 되었다.
"와……. 벌써 이만큼 큰 거야?"
"예뻐졌지?"
"그렇네."
"탐내진 말고."
"뭐 임마?"
"낄낄."
성장기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 사이에 쑥쑥 크는 아이는 얼마든지 있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유진이는 정말로 많이 바뀌었으니 가무잡잡하던, 그리고 트러블이 있던 피부가 새하얘졌으며 키도 많이 컸다.
그냥 아이에서 여자 아이가 되었다고 할 만큼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으니 도진의 말대로 단번에 '걔'라고 알아볼 사람은 없을 듯했다.
성장기 버프에 연호신공의 버프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지역 예선은 정말 간단한 프로필만 제출하고 참가하는 거니까 인적 사항이 노출될 일도 없으니까."
'지역 예선'은 그러니까 촬영은 하되 몇몇 장면만 방송에서 쓰는 비방용 예선이다.
이를테면 주목할 만한, 시선을 끌 만한 참가자의 몇몇 씬만 쓴다.
이런 예선에서까지 모든 인적 사항을 제출받고 검토하는 건 낭비일 수밖에 없다.
그건 본선에 진출할 100명 이하로 참가자가 추려진 뒤에나 하는 것이니 지역 예선에서 유진이는 원하는 대로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럼 일정 정해지면 알려 줘. 아니다. 그냥 유진이랑 번호를 교환하는 게 빠르겠네."
"우리집 가서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 그러면서 정식으로 인사하면 되지."
"응, 그러자."
서태주는 유진이와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었다.
이 기회에 안면을 트기로 했다.
"너는 그럼 집에서 방송으로 보겠네?"
대충 이야기와 약속이 정리될 즈음 서태주가 물었다.
그 물음에 도진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지. 나도 따라가야지."
"……?"
"비방 예선이니까 방송에 안 나올 거 아냐. 몰래 따라가서 지켜봐야지."
"이런 시스콘쉑."
* * * *
'너한테서도 숨을 테니까 심심하면 숨은도진찾기라도 해 봐.'
낄낄거리며 도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며칠 지나지 않아 서태주가 도진의 집에 놀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미 안면이 있는 서정원은 당연히 반갑게 맞아 주었고 동생들 또한 장남의 친구라는 말에 처음부터 높은 호감도를 보여 주었다.
다만 한 가지.
"형아가 남자 친구도 데려오는구나……."
요즘 들어 요상한 소리를 하는 호진이가 또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게 특기할 만한 부분이었다.
그런 몇 가지 이벤트가 있을 동안 방학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도진은 소담과 상미, 그리고 우서진과 무림열전3의 정식 엔딩을 보았다.
그 과정을 도진의 너튜브를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도 했는데, 무림열전3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
안 그래도 높던 조회수가 제곱 버프를 받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에 한국인만이 아닌 외국인들의 댓글 비중도 높아진 게 큰 의미가 있었다.
"저 예선 통과했어요!"
그 사이 이은지는 당연하게도 예선을 통과했다.
"축하해요."
"헤헤, 감사합니다."
"축하드려요, 언니!"
"응. 고마워, 유진아. 유진이도 화이팅!"
"네!"
레드슈는 무림인답게 기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데뷔한 걸그룹이었다.
그 멤버였던 이은지 또한 당연히 기본 이상의 실력을 자랑했으며 어쨌든 데뷔하여 활동한 경험도 있었으니 지역 예선에서 떨어질 리가 만무하다.
'좋은 시청률 견인 역할도 해 줄 테니 말이지.'
여기에 '바로 그 레드슈의 전 멤버'라는 타이틀까지 있으니 설령 다른 문제가 있더라도 제작진들이 무조건 안고 가야 할 참가자이기까지 하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이은지를 통해 언플을 꽤 했다고 꺼라 위키에서 몇 줄을 할애하여 제작진들을 까는 내용이 있었고 이번에도 벌써부터 이은지를 내세운 언플용 기사들이 여럿 올라왔다.
다만 그 기사를 통해 반응을 볼 수는 없었으니 이 시기부터 연예 기사의 댓글 기능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진은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서 반응들을 확인하는 수고를 들여야만 했다.
"그럼 다녀올게, 오빠."
"그래. 잘하고 와야 된다?"
"응!"
이은지가 합격하고 이틀 뒤.
시간차를 두고 신청했던 유진이의 예선 응시날이 되었다.
"잘 부탁해."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드는 도진의 모습에 유진이를 데리러 온 서태주는 '어차피 따라올 놈이'라는 감정을 눈동자 뒤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서태주와 함께 떠났고 도진은 그 뒤를 은밀히 따라갔다.
서태주와 유진이는 차로 가는데 그걸 무흔잠영을 통해 은신하여 이동하면서도 정확히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사신의 후계자'다운 모습이었다.
-껄껄. 녀석 성취가 제법이로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천마 위지혁과 사신 장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배운 것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으니 조금은 오묘한 감정과 함께 뿌듯한 느낌이었다.
웅성웅성-
아이돌 코리아의 오디션장은 서울 지역의 예선이라는 걸 감안해도 상당한 규모였는데, 쇠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지상파가 제작하는 예능이었기 때문이다.
"참가증입니다. 이걸 잃어버리면 출입과 예선 참가가 불가능하니 주의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내에 따라 신분증을 내고 목에 거는 참가증을 받았다.
이게 오디션장 내에서의 신분증이 된다.
서태주는 보호자 자격의 참가증을 받았는데, 보호자가 동행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기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유진이보다 어린 애도 많구나…….'
연예인, 그것도 아이돌 등의 경우 점점 준비하는 연령이 낮아진다던데 이곳에 와 보니 그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유진이도 정말 어린 나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유치원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마저 간간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찾아왔다.
그 외에도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디션장을 채우고 있었다.
오십이 넘어 보이는 화려한 양복 차림의 남자에 한껏 줄여 몸에 딱 붙는 교복을 입은 '양아치'들도 보인다.
'…저런 애들이 오히려 아이돌에 유리하다고 했지.'
서태주는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분위기와 외모의 또래들을 보며 생각했다.
딴에는 그런 기색을 감추고 있었지만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서태주는 그렇게 감춘 모습을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럴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도진의 부탁으로 유진이의 보호자 역할을 맡아 온 자리이니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서태주가 유진이의 곁에서 사람들을 살피는 사이 하나둘 참가자들의 오디션이 지나가고 드디어 유진이의 차례가 왔다.
"잘 하고 와."
"네, 오빠!"
유진이가 긴장을 다 숨기지 못한 얼굴로 불끈 주먹을 쥐어보인 뒤 무대로 나아갔다.
지역 예선이라 소위 말하는 3대 기획사의 대표들이 오지는 않았다.
그건 중소 기획사 또한 마찬가지여서, 지역 예선에는 이번 방송에 참여한 기획사들의 실무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유진입니다."
"풋풋한 참가자분이 오셨네요. 무얼 준비하셨나요?"
중앙에 앉은 남성의 부드러운 물음에 유진이가 당차게 '레드슈의 레벨업입니다'하고 답했다.
"오, 레벨업이요? 그거 난이도가 제법 있는데 대단한 걸 준비하셨네요?"
"네!"
레벨업은 전원 무림인으로 구성된 레드슈의 곡답게 정말로 쉽지 않은 곡이었다.
레드슈의 곡들 중에선 그래도 비교적 쉽다는 평이지만, 그 쉽다는 게 레드슈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호흡과 안무를 초 단위로 쪼개 나누어야 하는 수준이었으니 이제 겨우 열셋인 유진이가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시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곡이 흐르고 유진이가 열심히 준비한 안무와 노래를 선보였다.
열셋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안무를 훌륭히 소화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호흡이 고른 편이었다.
"호오……."
심사위원들은 제법 흥미롭다는 얼굴이었고 서태주 또한 연습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이 정도면 통과하겠구나.
서태주는 당연히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
메인인 3대 기획사의 심사위원들 중 누구도 합격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것은 심지어 중소 기획사들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서태주는 '왜?'하고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진의 동생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유진이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의문에 답하듯 동요를 감추지 못한 유진이를 향해 심사위원들이 말했다.
"잘 들었습니다. 유진 양은…… 춤과 노래를 오래 배운 것 같지는 않네요. 맞나요?"
"……네."
대번에 꿰뚫어 보는 심사위원의 말에 유진이가 조금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위원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짧은 기간 배운 것치고는 좋은 실력이었습니다만, 본선에 나가기에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서 저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아……."
그들은 프로다.
프로의 시선에서는 유진이가 제법 잘하긴 했어도 본선에서 무언가 보여줄 정도로 준비가 갖추어지진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 심사위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심사위원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중소 기획사의 심사위원들 또한 예선에서 쓸 수 있는 '픽'을 하지 않았으니 유진이는 이대로 탈락.
…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음, 실력적으로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저희는 그 재능에 한 번 걸어볼까 싶습니다."
갑자기 세 번째 심사위원이 그렇게 말하며 금색의 카드를 들어 보였다.
골드 티켓.
예선에서 쓸 수 있는 픽, 그러니까 대형 기획사가 두 장, 중소 기획사가 한 장을 쓸 수 있는 특별 티켓이었다.
이 티켓으로 본래 탈락이어야 할 참가자를 방송 예선에 보낼 수 있다.
그만큼 귀한 것이며, 대신 참가자는 추후 방송에서 티켓을 쓴 소속사 그룹에 속해야 하지만 그것이 '3대 기획사'라면 오히려 빌어서라도 가야 할 곳이었으니 여기서 디메리트라곤 하나도 없다.
지켜보던 이들이 탄성을 내뱉으며, 혹은 질투하며 당연히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 티켓, 안 받을래요."
"……?"
티켓을 들었던 심사위원은 무슨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한 가운데 유진이가 그 이유를 말했다.
"DS는 나쁜 곳이잖아요. 안 갈래요."
"……."
세 번째 심사위원.
DS 소속 심사위원의 표정이 썩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