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무림학교 고등반 2학년의 여름 방학은 지극히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보편적으로 이 시기가 바로 학생이란 고치를 뚫고 무림인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탈태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날붙이에 익숙해지고 사람을 벨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무림의 일에 '실습'이란 이름으로 나서는 것이 바로 이 2학년 여름 방학이기 때문이다.
원칙상으로는 1학년 2학기부터도 육식계 실습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 시기에 무리해서 육식계 실습에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등반 1학년 동안 확실하게 무림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지고, 2학년 때 실습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여름 방학부터 본격적으로 무림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춰 나가는 것이 보편적인 한국에서의 단계다.
물론, 숭무고 정도 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것이 재력이든 재능이든.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조건만 갖춰져 있다면 심지어 중학생 때부터 실습을 나가기도 하니 대표적으로 정의검가의 유지은이 있다.
명문 무림가의 학생들은 중학생 때부터 특례로 가문의 어른들 보호 아래, 그리고 지도 아래 무림을 배워 나간다.
재벌가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특례에 포함되지 않아 중학생 때부터는 안 되지만, 고등반 1학년 2학기부터는 연줄을 통해 실습을 보내 또래보다 앞서 나가게 만든다.
도진의 주변에 있는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우서진이 그러했으니 당장 1학년부터 우벽진의 모든 것을 이을 후계자이자 명성공방의 차기 대표로서 경영, 무공, 대장장이로서의 기술까지 모두 익히기 위해 기말고사 준비 기간부터 열심이었으며 방학이 시작된 뒤로는 오히려 더욱 빡빡한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우서진만이 아니다.
클로에는 물론이요 나지윤 또한 답청문의 대표로 이미 무림인으로서의 태를 갖추고 행동하고 있었다.
열여덟의 나이로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죽도록 노력하고 또 공부하고 있다는 걸 도진은 알고 있었다.
주정아 역시 할아버지인 호군자 주대운의 무공에도 소홀하지 않으면서 가업을 잇기 위해 방학을 온전히 투자할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대로 매진하는 중이다.
오대용도 이제 금화의 3세로서 자신의 방향을 정한 듯 보였고.
이런 상황이니 도진 또한 새삼스레 자신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처음 회귀했을 땐 사실 막연했던 부분이 있었다.
천마가 되어야 한다.
명확하지만 너무나 컸기에 거대한 행성을 바로 앞에서 마주한 듯 전체를 보거나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 어렴풋이 윤곽이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윤곽이 천마신교의 개파(開派)다.
숭무고에 입학하고 충실한 삶을 살며 도진은 좋은 인연을 많이 맺었다.
그 인연들은 도진을 중심으로 하여 연결되어 있으나 기실, '묶여 있다'고 할 만큼은 못 되었다.
'김도진? 어, 인맥 개쩔지. 근데 그 인맥이 그…… 뭔가 구체적으로 이렇다 할 건 없지 않나?'
막상 생각해 보면 그런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대단한 인맥이고 실제로 영향력도 발휘하고 있지만 '결과'로서 명확한 어떤 결론이 나오진 않는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도진을 중심으로 하여 연결된 인연들을 하나로 묶어야만 했다.
그 역할은 당연하게도 도진이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인연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명확하고 가시적인 울타리로서 작용해 줄 것이 바로 천마신교다.
상미에게, 클로에에게, 서태주에게.
"너희가 배운 무공의 근원이 바로 천마신교야."
무공의 근원이 어디인지, 소속된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해 준다.
"나는, 소천마(小天魔) 김도진입니다."
부모님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전체에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선포한다.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 천마심공의 5성에 이르는 것.
이런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에 도진은 쉼없이 달리는 선배와 친구들, 그리고 동생들의 모습에도 조급하지 않았다.
도진 또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형! 무림열전 언팩 행사 일정 확정됐어요!"
오랜만에 찾아온 우서진의 방문에 여유롭게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달릴 때가 됐네?"
* * * *
무림열전.
대한민국의 중소 기업을 세계적인 게임 회사로 만들어 준 AAA급 대작이자 대한민국 톱스타 중 한 명인 이은지의 단짝 너튜버 유애라 또한 '대기업'이 되는 계기가 되어 준 게임이기도 하다.
전생에서 우서진과 함께 했던, 이번엔 상미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한 무림열전의 새 시리즈가 출시되었으니 바로 그 시기가 온 것이었다.
무림열전의 세 번째 시리즈.
불후의 명작이라 평가받는 AAA급 게임으로 세계적인 대작이 되는 작품이다.
다만 2까지는 좋은 평가를 받긴 했으나 아직 그 정도 급은 아니어서 이번 신작 발표회, 그러니까 언팩 행사에 참가하는 건 경쟁할 필요 없이 그저 신청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서진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여유로운 얼굴의 도진을 마주하며 들뜬 얼굴로 물었다.
"형, 이미 신청한 거예요?"
"당연하지. 저번엔 같이 못했으니까 이번엔 같이 해야지."
꽤 빡빡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텐데도 곱디고운 피부에 솜털마저 보송보송한 우서진은 기대가 가득 담긴 얼굴로 활짝 웃었다.
삼음지체의 저주로 방에 갇혀 있던 시절.
우서진은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여러가지에 심취했었고 그중엔 게임도 있었다.
저주가 축복이 된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있기에 이토록 무림열전의 새 시리즈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도 동경하는 형, 그리고 좋은 경쟁 관계의 상미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더욱.
"저도 신청했어요! 너도 했지?"
우서진의 시선이 도진과 함께 있던 상미에게로 향한다.
상미는 방학 동안 도진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으니 위지혁을 통하여 한천검공의 수련을 봐주고 있었다.
몽련의 술을 통하여, 그리고 유지은을 제외하면 비할 데 없는 재능으로 무서운 기세로 성취를 얻고 있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또 그 이상으로 성취가 늘 수 있는 법.
완벽하게 도진의 사람인 상미의 수련을 봐 주는 데에도 도진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으로 도진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상미는 아쉬움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형, 들었죠? 이번 3는 보니까 어로스에서 아주 제대로 칼을 간 거 같더라구요. 언팩 이름부터가 풀다이브잖아요!"
"응, 제대로 큰 걸 내놓으려는 거 같아."
우서진의 말에 미래를 알고 있는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로스.
무림열전의 제작사로 그들은 무림열전의 세 번째 작품 주제를 '풀다이브(Full dive)'라 했다.
그 이름처럼 무림열전3는 VR이되 여러가지 장치를 더함으로써 가상현실에 가까운 플레이 환경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소설 수준의 가상현실 게임을 만든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실에 가까운 VR에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VR에 실시간으로 적용, 구현함으로써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괜히 어로스가 게임 하나로 세계적인 회사가 된 게 아니다.
규모만 작았지 기술력과 자본, 그리고 인재들이 갖춰져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터진 게 무림열전3다.
그 명작을.
'…전생에선 한 번도 못해 봤지만.'
이번 생에선 다르다.
바랐음에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소소한 버킷리스트로 도진은 동생들과 함께 모니터가 아닌 VR 기기로 불후의 명작 무림열전3를 제대로 즐겨볼 생각이다.
그 첫걸음으로 신작 발표회, 언팩 행사에 참가 신청을 넣었다.
지옥 그 자체였던 경쟁률을 자랑했던 4와 달리 3는 신청하면 무조건 당첨될 정도로 자리가 널널했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김도진 님. 저는 어로스의 홍보팀 팀장을 맡고 있는 명도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발표회를 기다리던 도진에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아, 예. 안녕하세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어로스의 직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다른 게 아니라 제안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갑작스러워서 죄송스럽지만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만나서 말씀을 나눌 수 없을까요?
정말로 갑작스럽다.
하지만 예의를 다하여 조심스럽게 제안하니 나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도진은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네. 괜찮아요. 언제 만날까요?"
-그, 가능하면 함께 신청하신 우서진 님과 윤상미 님도 함께 만날 수 있으면 좋은 일인데 두분까지 괜찮으신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 주시면 저희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서진이랑 상미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가 싶었지만 나쁜 일은 아닐 게 확실했기에 도진은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자는 생각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런 전화를 받았는데."
"아, 저한테도 전화 왔었어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이니 상미와 우서진에게도 연락이 갔었다.
어차피 무림열전3를 하기 위해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 토요일 오후 숭무고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잡혔다.
"뭣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 걸까요? 그것도 우리 셋이 같이."
"글쎄. 뭔가 발표회 관련으로 특별히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긴 한데."
스스로 말하기엔 뭣하지만 잠룡에 미룡, 그리고 빙봉이다.
게임 또한 무림의 이야기를 그리는 무림열전이니 그와 관련한 부탁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직접 만나 제안이 무언지 들을 수 있었으니 도진은 깊이 고민하는 대신 옅은 기대를 가지고 토요일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동생들과 함께 들어섰다.
그리고 어로스의 홍보팀 팀장이란 40대의 훤칠한 남성과 함께 자리하고 있던 작은 체구의 미녀를 볼 수 있었으니.
"안녕하세요."
이미 안면이 있던 너튜버, 유애라였다.
"안녕하세요."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도진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동생들과 함께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로스 홍보팀의 팀장 명도환이 끊었다.
"갑작스런 연락에도 이렇게 흔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무림열전3 발표회와 관련하여 제안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명도환은 훤칠한 키에 깔끔한 세미 정장 차림, 그리고 호감이 가는 선한 인상으로 좋은 첫인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랬군요. 그러고 보면 숭무고 부스의 홍보에도 유애라 님이 수고해 주셨죠."
명도환은 안면이 있는 듯 보이는 도진과 유애라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이야기를 잇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도진이 보기에 명도환과 유애라 사이의 분위기 또한 제법 자연스러웠는데, 생각해 보면 무림열전의 첫 작품부터 어로스와 유애라가 인연을 맺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3 또한 유애라가 시리즈 전통에 따라 플레이어를 도와주는 동료 NPC로써 함께 한다.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이야기를 통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명도환은, 때가 되었다 싶었는지 본론을 꺼냈다.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김도진 님을 포함하여 네 분이 스쿼드를 이뤄 무림열전3를 시연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온 제안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