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한국을 방문했던 장인들과 후기지수들이 떠나고 세계 장인 박람회는 막을 내렸지만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세계 장인 박람회는 단순히 전시에서 그치지 않고 경매와 거래 또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계약이 남아 있었다.
우서연이 앞서 설명했던 대로 '명품'은 바닐라 상태로 구매할 수도 있지만 구매자의 의사에 따라 커스텀이 이루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다른 공방과 마찬가지로 명성공방 또한 그런 작업을 해야만 했고 이번 박람회에서 특히 주목 받았고 그 주목 이상의 성과를 거둔 '설란 시리즈'의 작업 때문에 우벽진은 오히려 박람회 뒤가 더욱 바빴다.
그리고 그런 우벽진의 제자로서 우서진 또한 작업에 참여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공만이 아니라 명장의 도제(徒弟)로 대장장이 기술 또한 물려받아야 했으니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시간.
여기에 기말고사까지 겹쳐 우서진은 그 하얀 얼굴에 진한 다크 서클이 내려 앉을 정도로 빡빡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고생이 많네."
"어우, 이게 사회의 쓴맛인가 봐요."
"하하하. 그런가?"
우는 소리를 하는 건 도진에게 하는 어리광이다.
도진은 그런 우서진의 어리광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은근슬쩍 다가오는 금발 소녀가 있었으니 도진의 제자 1호가 된 클로에 덴젤이다.
"스승님. 저도 힘들어요."
"어, 그러니……?"
"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도진에게서 불사마공을 전수 받으면서 동시에 덴젤 공방의 후계자로서 우서진과 마찬가지로 커스텀 작업을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딸에게 다정했으니 여러모로 배려를 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작업 자체를 허투루 할 수는 없는 노릇.
클로에 또한 금으로 뽑아낸 비단실 같았던 머리카락이 조금은 윤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그런 둘이 무언가를 바라는 눈으로 도진을 빤히 응시한다.
"아이고. 동생아, 제자야. 그래, 엎드려 봐. 안마해 줄 테니까."
"얏호!"
"감사합니다, 스승님!"
결국 도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둘을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안마를 해 주었다.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는 추궁과혈(推宮過穴), 넓은 범위에서는 타혈법(打穴法) 같은 걸 도진은 '제대로' 할 줄 알게 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위지혁과 장호에게 배운 것이다.
꾸준히, 그러나 조급하지 않은 도진은 두 스승에게 초식만이 아닌 이런 유용한 기술 또한 배웠다.
힘을 안 주고 안마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여기저기 주무르고 부드럽게 두드려 주는데 이게 그렇게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클로에의 부담을 줄여 줄 겸 해 준 것이었는데 이게 어쩌다 보니 혈맹의 후계자 관계인 우서진에게 클로에가 자랑하듯 말한 게 퍼져 버렸다.
'…나도 받고 싶어, 도진아.'
그것은 심지어 소담마저 도진에게 사슴 같은 눈망울로 그런 시선을 보내는 상황까지 번졌고 도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공공재로 여기저기 봉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도진에게 한유아는 말했다.
"안 그런 거 같지만 사실은 너도 꽤 빡빡할 텐데 괜찮은 거야?"
외부에서 보기에 도진은 불합리의 화신이다.
먹고 싶은 거, '혈관 살살 녹는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들을 심지어 새벽에도 거침없이 우걱우걱 먹어대고 평소엔 유유자적 그 자체인데 말도 안 되는 실력에 전교 1등의 성적마저 놓치지 않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유아는 안다.
겉으로 보이는 대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도진이 사실은 몇 배나 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한유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도진이 말했다.
"안마 받으시면서 그런 말 하시면……."
"후배가 해준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잖앙……."
정말로 편하게 쭉 늘어져서는 목소리마저 늘어지는 한유아다.
아주 잠깐의 쉬는 시간.
한유아는 이미 '김도진 카르텔' 사이에서 유명해진 도진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한유아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걸 도진 또한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말대로 자발적으로 해 주는 서비스였다.
숭무고 3학년으로서 이미 절반 이상 무림에 걸쳐 있는 한유아는 민간 무력 기업의 대표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집행부의 중요한 업무 또한 여전히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하는 게 마음이 놓이는 타입이거든, 나는."
이미 인수인계도 거의 다 끝났고 후배들이 실제로 혼자서 척척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다.
허나 한유아는 그렇게 된 뒤로 더더욱 자신이 업무를 도맡아하고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후배들이 시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선배에게 도진이 해 주는 서비스였다.
덤으로 소소하지만 유용한 기술의 숙련도도 올리고.
이건 부모님에게 특히나 좋은 기술이니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도 여기저기 아낌없이 서비스하고 있는 도진이었다.
"뭐, 저야 언제나 그렇듯 쉬엄쉬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도진 또한 여전히 빡빡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수면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늘었지만 원래부터 하루를 가득 채웠던 수련과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클로에의 수련을 봐주는 일이 더해졌다.
여기에 한유아와 마찬가지로 집행부의 업무를 도맡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포함한 것이 도진에게는 일상의 범주에 있었다.
그러니까 한유아에게 하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뭐 어려운 건 없고?"
"네. 요즘 학교 평화롭잖아요."
"응……. 그것도 다 네 덕이지……."
한유아가 서류 업무를 도맡았다면 도진은 주로 외부의 선도 활동을 도맡고 있다.
그리고 도진의 말처럼 학교는 역대급으로 평화로운 시기였기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으니 이 또한 도진의 존재가 그 이유였다.
나쁜짓 하면 잠룡이 잡으러 온다.
웃음이 나오긴 하는데 그게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도진은 해왔던 것이다.
거기에 지금 도진의 위치와 명성이다.
처음 신입생 때의 도진은 실력은 좀 있지만 그저 그것뿐인, 폄하한다면 '쥐뿔도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누구도 도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고 그렇게 대할 수 없었다.
쳐다도 못 볼 만큼의 격차를 벌려 버린 후기지수의 급마저 넘어선 무인.
그리고 그런 실력보다 어떤 면에선 더욱 대단한 인맥과 명성을 쌓은 잠룡이 되었기에.
그 이름만으로도 도진은 숭무고의 평화를 유지하는 학생이 된 것이다.
숭무고의 일진 클럽이었던 숭무회는 공중분해 되었고 숭무회를 더욱 극악의 집단으로 만들 뻔 했던, 다른 의미로 '역대급 기수'였던 신입생들의 모임이었던 'S4' 또한 도진에 의해 사라졌다.
그 속까지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일진 행세를 하는 학생은 완전히 없는 학교가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집행부가 할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 학생들의 '민원'에 대한 대처가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근래에 해결한 것이 조중림이 소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택배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사실 택배 수령에 관해서는 조중림만이 아니라 이미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무조건 본인 입회 하에 검수 후 수령을 해야 하고 그게 귀찮아 대리인 임명을 하려 해도 정당한 사유서를 내고 승인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도진은 이 부분을 약속대로 개선해 주었다.
기실 이 조항은 꽤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조항으로 지극히 보안에 보수적이던 시절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것을 도진은 홍채 인식 등의 강력한 인증 시스템을 도입하여 본인은 물론 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인증과 검수까지 마칠 수 있도록 했다.
조중림은 설마 이걸 정말로, 그것도 이렇게 빨리 해결해 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으며 이후로도 도진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했다.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건의를 들어주는 모습까지 보였기에, 도진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생각 이상으로 호의적이었다.
"그런 게 나는 꽤 부러워, 후배."
조금, 평소엔 없던 진심을 섞어 한유아는 말했다.
김도진이란 인간은 한유아가 바라던, 톱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유아는 김도진처럼은 할 수가 없었다.
한유아는 한유아이지 김도진이 아니었고 그녀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압도적'이지 못했으니까.
기껏 압도적인, 자신 있는 것들은 차라리 톱이 아닌 구성원으로서 더욱 이점이 되는 것들이었다.
당장 숭무고에서의 평가도 그렇다.
그녀는 집행부의 부장으로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이 학교의 '톱'인가라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대부분은 고개를 쉽게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본능이 바로 '그건 차라리 김도진 아닌가?'라고 떠올리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것이, 한유아로서는 씁쓸했다.
그 씁쓸함마저 읽어낸 도진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선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평소처럼 그럴싸한 말을 길게 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도진이 한유아의 머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유아는 흐흥, 웃고선 답했다.
"응, 알아. 나 대단한 사람인 거……."
* * * *
시간은 흘러 기말고사가 학생들을 덮쳤다.
학생들은 허리케인처럼 몰아친 기말고사 일정을 나름의 힘을 다해 준비했던 것으로 헤쳐 나왔고 그 결과를 받아들어야 했다.
-어일잠(어차피 일등은 잠룡이라는 뜻ㅎ)
-어이, 뉴비. 잠룡은 원래 등수에서 제외하고 세야 한다.
도진은 이번에도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실기는 너무나 당연하게 압도적인 1등이었고 여기에 이론마저 역대급 불시험이었다는 평가에도 겨우 2개를 틀림으로써 어나더 클래스를 입증했다.
참고로 이론을 전부 다 맞은 괴물도 있었으니 저번 시험에서도 이론으로는 도진을 이겼던 나지윤이었다.
-아니, 나지윤 얘도 진짜 은근히 어나더 레벨임;
-은근히가 아니라 걍 대놓고 어나더 레벨임 ㅋㅋㅋ
-ㄹㅇㅋㅋ 나지윤 회사 특성상 티를 안내려고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으면 사실 미룡이란 이름은 나지윤한테 먼저 갔을걸.
도진은 에타에서 본 댓글에 공감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평가대로였다.
나지윤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인이자 천재였다.
다만 정보 단체의 수장으로서 그것마저 무기로 사용하고 필요 이상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기 위해 조율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지윤과 반대되는 느낌의, 무자비한 폭력이라고까지 불러야 할 재능을 아낌없이 뽐내는 중인 3학년의 유지은은 당연히 이론과 실기까지 다 만점이었지만 3학년인 데다 명성이 명성이어서 당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 사람이 너무 잘하면 잘한다는 소리가 잘 안 나오는 법이죠."
도진이 슬쩍 그렇게 놀렸지만 유지은은 개의치 않는 얼굴이다.
"나한테는 이게 당연해서 칭찬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
"…더러운 세상 같으니."
"…네가 그런 말하는 게 더 더러운 세상이야."
도진의 한탄에 전교 30등 안에 든 오대용이 태클을 걸었다.
"뭐라는 거야, 커플놈이."
"…너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기만자놈아."
그런 느낌으로, 부모님에게 전교 1등 성적표를 코팅해서 가져다 드리는 것으로 도진의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는 2학년의 첫 방학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