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중요한 일정과 취재까지 끝나고 티켓을 구매하여 입장한 사람들까지 포함된 파티가 열렸다.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도진은 가장 먼저 부모님과 동생들을 찾아갔다.
"도진아."
"괜찮았어요, 어머니?"
"그럼! 최고였지."
"아버지는요?"
"멋있더구나."
"하하. 다행이네요."
평소 청산유수인 도진이었으나 부모님 앞에서는 이렇게 단조로워진다.
허나 가족 사이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었다.
"형아!"
"그래, 호진아."
도진은 초롱초롱한 눈의 호진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안았다.
어느새 11살, 5학년.
연호신공을 익히면서 부쩍 자라 또래보다 작았던 키도 제법 컸다.
추위에 약했던 모습도 앞으로 열심히 익히다 보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진에겐 귀여운 막냇동생이다.
"오빠."
"잘 어울리네, 유진아."
눈을 반짝이지만 조용히 다가오는 유진이는 요즘 사춘기라도 찾아왔는지 꽤 달라진 모습이다.
호진이와 마찬가지로 부쩍 큰 키와 함께 시선을 모으는 분위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가족들 옆에는 서태주와 서태주의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도진의 초대장을 받고 참석해 준 것이다.
"안 그래도 관심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고맙지."
괴롭힘을 받으며 어깨를 움츠리던 과거의 서태주는 없었다.
지금 도진의 앞에서 웃는 서태주는 커진 덩치와 근육만큼이나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태주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성장만큼이나 눈부시게 순항하고 있는 사업에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런 서태주의 어머니와 도진의 어머니가 사이 좋게 나란히 서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어?"
"네!"
동생들과 함께 있던 릴리, 그리고 윌리엄과도 인사를 나눴다.
이사 후 낯선 환경에 있게 된 동생들과 잘 지내 주고 여러가지를 함께 경험하게 해 주는 웨일스 남매는 도진에게도 꽤 고마운 아이들이다.
"아, 후작님."
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인파들 사이에서 웨일스 후작 부부가 다가왔다.
"무대 잘 보았어, 도진 군."
처음엔 존댓말을 썼으나 이제 제법 친분을 쌓으면서 겨우 말을 놓게 된 웨일스 후작이다.
도진은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답했다.
"도진 군 덕분에 나도 꽤 어깨가 넓어졌어."
웨일스 후작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세계 장인 박람회와 관련된 비즈니스 또한 상당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래 이쪽 업계에 관심이 있었으며 명성공방과도 친한 사이이니 당연한 일.
한데 이번에 세계 장인 박람회가 대성공을 거두고 대중적으로도 크게 확장된 덕분에 큰 이득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자주 뵐 수 있을 테니 잘 됐네요."
"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저도요."
정말로 기분이 좋았던지 평소 부드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호탕하게 웃는 웨일스 후작이었다.
그런 웨일스 후작과 근래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던 오성아가 씨익 웃으며 도진에게 말했다.
"정말로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있어 줘, 문주님."
완전히 잠룡문의 사람이 된 오성아는 암산서가의 투자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손을 쓰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웨일스 후작이 착수한 사업에 한 소소한 투자였는데, 이번에 대박이 터짐으로써 오성아 또한 상당히 텐션이 업 되어 있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완전 무장'을 하여 오성의 여신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미모와 위엄이 깃들어 있음에도 그 또래의 활기가 느껴질 정도다.
마찬가지로 제법 커리어 우먼의 태를 갖춰가는 소여은은 그 옆에서 열심히 따라다니며 배우는 중이고.
"부모님 모시고 와 줘서 고마워, 소담아."
"으응, 내가 해야 할 일인 걸!"
그리고 시선이 머문 소담에게 도진이 웃으며 인사하니 소담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들면 아주 대담하고도 무시무시한 의미가 되는 말이었으나 소담은 자각하지 못한 얼굴이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놀리는 대신 그저 웃어 주었다.
이 자리서 놀리면 소담의 얼굴이 펑, 하고 오버 히트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어서 나지윤은 물론이요 오대용, 주정아에 안면이 있는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쭉쭉 흘렀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한산해졌을 때 민지서와 함께 하는 한유아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정말 바쁘시네요, 선배."
정장 무복을 입었으나 그 마력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흘러 넘치는 한유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와인을 마셨다.
"여긴 말하자면 노다지란 말이야."
"구수한 표현이시네요."
"이런 자리에서 인맥을 잘 만들어 두면 나중에 언제고 도움이 되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인사해야지."
이론이 나올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의문이 남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금화의 영애'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이 자리에서,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탑 티어'의 신분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금화의 영애'로서의 신분 대신 '소소한 민간 무력 기업의 대표'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왜 굳이 그러는 걸까.
그녀 스스로 만들고 운영하는 회사에 애착이 강해서?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한유아는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드레스가 아닌 정장 무복을 택했고 먼저 입장한 금화의 사람들과 따로 입장한 것만이 아니라 행동마저 따로하고 있었다.
-니가, 나 대신 유아 누나를 도와줘.
-유아 누나는, 너한테 맡길게.
1학년 때, 오대용이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어서 도진이 알고 있는 '한유아의 미래' 또한.
'반 년 남았나…….'
단순히 그녀의 졸업 시기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관계가 크게 바뀔, 결정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맥이 좁은 후배는 걱정이 없지만 말이야."
한유아는 언제나처럼 장난스레 말한다.
-아..ㅋㅋ 김도진은 인맥이 좁구나..
-금화, 오성, 정의검가, 웨일스 후작가, 명성공방.. 또 어디 있냐?
-세기 힘들긴 한데 암튼 좁음..ㅋㅋㅋ
-한 열군데도 안되는 거 같은데 이정도면 연락처 30개 넘는 내 승리 아니냐?
-원래 피라미드도 아래가 넓고 위가 좁자너.. 그래도 넓이는 너의 승리다...
-앗..아아..
어떤 기자의 장난이 가미된 낚시성 기사는 과연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와 흔히 말하는 '망언'으로 장작이 되었는데 한유아는 그걸 말한 것이었다.
"선배랑은 연결돼 있으니 선배 통해서 득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머, 나한테 빨대를 꽂다니. 과감하네."
언제나처럼 싱거운 농담을 나누고 그녀는 떠나갔다.
그리고 VVIP 중 한 명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김도진 학생."
"예, 안녕하세요."
다름 아닌 세계 장인 박람회를 찾은 산자부의 장관이었다.
그러니까 산업통상자원부의 장관으로, 생각 이상으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 고위 공무원이다.
그는 도진 덕본에 한국의 위상이 올랐다는 등의 칭찬을 웃는 얼굴로 하며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했다.
"네, 좋습니다."
도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섰다.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카메라를 들었고 셔터를 눌렀다.
장관은 도진의 등을 다독이며 자신이 우위에 있는 그림을 만들었으나.
"……."
막상 나온 사진은 그가 굽신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어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진의 키가 더 크긴 하다.
그러나 어른으로써 등을 다독이는 그림을 만들려 했고 그것은 그에게 상당히 익숙한 일이었기에 실수를 했을 리가 없는데 이런 구도가 나온 것이었다.
장관이 수행원을 은근히 노려봤고 수행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껄껄. 어림도 없는 일이지.
위지혁은 도진의 눈을 통해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사진은 모든 것을 담지 못한다.
그러나 담기는 일부만으로도 '느낌적인 느낌'으로 장관의 우위에 서는 구도를 만드는 건 도진이 배운 '이치'를 조금만 응용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게 투표라는 말처럼, 정치판의 인간들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장관은 능숙하게 감추었으나 당연히 도진의 신안마저 속이진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진이 장관을 들이박으려 한 건 아니다.
그는 부패하긴 했으나 이 자리에서 선을 넘어 도진을 어쩌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신의 홍보를 위해 도진이 아랫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찍으려 했고 도진은 그것을 역이용하는 정도로 그친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아, 예. 예.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여러 장을 이미 찍었는데 다시 찍자는 말을 하기엔 애매한 상황에서 도진이 먼저 선수를 쳤고 장관은 어쩔 수 없이 인사를 나누고 떠나갔다.
그가 떠나자 도진이 웃으며 오성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괜찮았죠?"
"응. 나중에 홍보 기사로 내도 괜찮겠어."
사진은 장관의 수행원만 찍은 게 아니다.
잠룡문에서도 무려 오성아가 직접 찍었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에 오성아는 싱글벙글이었다.
오성아 정도 되면 이런 사진을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자, 그럼 문주님? 같이 다니면서 우리도 인맥 좀 만들어 보자!"
"아하하. 네."
오성아를 에스코트하며 도진은 파티장을 거닐었다.
* * * *
성대했던 파티는 이틀간 이어졌으며 그 파티만큼이나 세계 장인 박람회 또한 성대하게 끝을 맺었다.
거기서 도진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자신의 인상을 남겼다.
세계를 떨치는 명성을 가졌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니 크나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와 별개로 그날 안토니오와의 승부를 목격한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인상을 남기긴 했고.
그렇게 모든 일정이 끝난 일요일.
후기지수들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마지막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뒤풀이는 새벽 늦게까지 함께 했기에 점심 식사는 인연을 맺은 사람들끼리의 조용한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빌리 플로이드는 혼자였다.
당연하게 된 혼자 앉아 점심을 먹는 빌리 플로이드의 모습.
거기에 돌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있었으니 이번 세계 장인 박람회의 주인공이 되었던 도진이 마주 앉은 것이었다.
"……."
"……."
소리없는 웅성거림과 함께 시선이 집중된다.
빌리 플로이드 또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도진을 마주했다.
도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순살 치킨을 샐러드와 함께 먹으며 말했다.
"잘못된 조직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이라는 건 사실, 제법 무책임한 말이지."
담담히 말하는 영어는 섭음술이었기에 주변으로 흘러 나가지 않았다.
의도를 모르겠다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진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인간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저 남에게 하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라 조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에게 그렇게 하라는 건가?"
"맞아. 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의도를 모르겠군."
"별 거 아냐. 그냥 소소한 빚을 갚는 거니까."
"빚이라고?"
여전히 모르겠다는 빌리 플로이드에게 도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클로에랑 대련을 했던 날. 아마 너는 존 스미스에게 단순히 클로에의 이너 슈트를 찢는 게 아니라 큰 타격을 입히라는 말을 들었을 거야. 맞지?"
"……."
침묵은 긍정이다.
실제로 빌리 플로이드는 존 스미스에게 그런 지령을 받았다.
그 상처가 더 큰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소소한 빚이었고 스승으로서 제자의 빚을 대신 갚는 거야."
당황한 척 마지막 한 수로 상처를 내는 대신 뒤로 물러난 건 '그림'으로서는 제법 괜찮았지만 존 스미스의 지령을 어긴 것이다.
그 행동의 이유는 복합적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한 마디로는 다 서술할 수 없는 그 복합적인 이유가 도진이 나서는 이유까지 되었다.
이놈은 지금 '빌런'이다.
흑인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있기에 흑인에 대한 차별에 민감하게 행동하면서 눈을 찢는 행동을 한 것부터가 빌런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도진으로선 굳이 조언이라고 몇 마디 말을 해 줄 필요도 없었을 빌런.
그러나 소소한 빚이 있었기에, 그리고 소소하나마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굳이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 조언의 결과에 관해서는 굳이 신경쓰지 않을 것이었다.
이걸 화두로 삼아 빌리 플로이드가 변하면 좋은 일이고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그럼 잘 가라고. 빌리 플로이드."
도진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