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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32화 (332/741)
  • 331화

    하루에 담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소화하고 있는 도진은, 그러나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순항 중이었기에 즐겁게 하루하루를 채워 나갈 수 있었다.

    전생엔 제 발로 걸어가야만 하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데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받는 것만 같았던 학교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 역시 특별한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매일 충실한 나날을 보내왔다.

    수련 또한 도(道)를 추구하여 걷는 길은 앎의 기쁨이, 매일 한 걸음씩 한계를 더 확장한다는 체감은 고통보다 큰 쾌감이 되었다.

    거기에 추가된 솜이와의 '산책'은 힐링이었고.

    클로에 또한 도진을 믿고 따라주는 모습이 기특하고 또 기꺼워 스승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기에 가족과 지인들이 보러 올 세계 장인 박람회의 무대 준비 또한 순조롭다.

    파앗-!

    스포트라이트가 어둠에서 쏘아지는 백설을 비춘다.

    어둠에 녹아 있던 도진이 어느 순간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타나 백설을 쥐었다.

    캉-!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조명과 함께 날아든 칼을 형체없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려 도진은 받아냈다.

    빠르고 강렬했지만 충돌의 순간은 눈에 새겨질 만큼 선명했고 셔터를 누른 순간처럼 짧지만 확실한 여유가 있었다.

    캉! 캉! 캉!

    그런 습격이 눈에 띄는 무기들에 의해 세 번이 이어지고 도진은 몸을 솟구쳤다.

    꽈아앙-!

    그리고 돌연 터지는 폭음.

    폭음을 만들어낸, 쏘아진 섬광은 쿠사나기 공방의 명장이 만들어낸 도(刀)를 발도술로 쏘아낸 쿠사나기 이치로의 것이었다.

    도진은 충격에 저항하지 않고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더 높이, 큰 곡선을 그리며 날아 어둠 속에 녹아들고 이치로는 섬광을 그렸던 도를 납도했다.

    꽝-!

    이어 다시 쏘아진 섬광을, 이번엔 천장에서 선녀처럼 떨어져 내린 상미가 서리를 흩날리며 받아냈다.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푸른 서리로 만든 보석들에 감싸인 상미는 도진처럼 충격에 저항하는 대신 그 흐름을 타고 몸을 회전시켰고.

    꽈앙-!

    이어 클로에의 주먹을 다시 한 번 서리를 흩날리며 받아냈다.

    사아아아아…….

    그리하여 아직 사라지지 않고 떠도는 이전의 서리와 조명이 합쳐진 광경은 마치 허공에 거대한 서리꽃이 핀 듯 신비로웠다.

    타앗-!

    그렇게 만개한 서리꽃의 중심에서 이번엔 우서진이 나타나 명장 우벽진의 걸작인 상청을 내리꽂았다.

    꽈아아아앙-!

    둔중한 내공의 여력이 퍼져 나가고 그것을 받아낸 몇 자루의 명품이 빛난다.

    캉! 캉! 캉!

    관객들을 위해 빠르고 현란하지만 격돌의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남기는 기법으로 몇 명의 후기지수와 격돌한 우서진이 그들을 떨치며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누군가와 부딪치니.

    꿍-!

    어둠 속에서 돌연 사냥감을 덮치듯 등장하는 빌리 플로이드다.

    존 스미스의 신작 건틀렛과 상청이 부딪치며 깊은 인상을 남기고 빌리 플로이드 역시 카메라를 옮기듯 몸을 날려 약속된 동선을 따라간다.

    그것을 지켜보는 세계 장인 박람회 운영위원회의 관계자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걱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세계 장인 박람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명장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후기지수들로 무대가, 그것도 메인 무대가 꾸며지게 되었으니 어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한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생각 이상으로 결과물이 좋았다.

    말도 안 되는 '이레귤러'인 김도진을 제외하면 후기지수들이 무기에 휘둘린다는,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우벽진 명장이 주인으로 낙점한 무기를 쥔 한국의 윤상미와 우서진 정도가 이질적이지 않은 정도.

    하지만 이건 오히려 세계 장인 박람회에는 '정답'이 된다.

    이 자리는 무인이 아닌 무구가 돋보여야만 하니까.

    여기에 경쟁을 통해 배역을 낙점한다는 시스템은 기존에 세계 장인 박람회에 눈길을 주지 않던 사람들의 관심까지 폭발적으로 끌어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솔직한 말로 '그들만의 리그'였던 세계 장인 박람회가 대중에 스며들 수 있는 터닝 포인트로 받아들여질 만큼의 큰 변화였다.

    운영위원회 사이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시스템으로 가자는 논의는 이미 다 되었고 다음 박람회부터 이 시스템을 채용하는 게 거의 확정된 분위기다.

    그렇게 그들이 만족스럽게 결과물을 지켜보고 있던 중이었다.

    쿵-!

    "윽."

    그들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지게 만드는, 완벽하던 화음을 깨는 흐름이 있었으니 빌리 플로이드와 존앤집스 공방의 후기지수 사이에서 발생한 불협화음이었다.

    "이런, 빌."

    "…미안하다."

    빌리 플로이드가 동선에 따라 마주한 존앤집스 공방의 후기지수와 합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어긋남이 있었다.

    "조심해 줘, 빌. 너는 에이스잖아."

    "…주의하겠습니다."

    누군가 뭐라하기 전에 존앤집스의 후기지수들과 관계자들이 먼저 나서 빌리 플로이드에게 주의를 준다.

    그림만 보면 남들이 혼내기 전에 선수를 쳐 빌리 플로이드를 감싸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

    잘못을 한 건 오히려 빌리 플로이드와 합을 맞춰야 했던 다른 후기지수 쪽이었다.

    심지어 실수도 아니고 고의로 강한 힘을 주었다.

    합을 맞춰야 하는 자리에서 마치 기습을 하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앤집스의 사람들은 오히려 에이스이자 간판이었던 빌리 플로이드를 약속이라도 한 듯 원인제공자로 지목하는 것이다.

    악질적이었다.

    "……."

    그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느낄 수 있었기에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존앤집스가 저러는 건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일전의 충돌,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를 남긴 도진과 안토니오의 '한 수 대결'로 인해 명성공방과 덴젤 공방이 손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손을 잡았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합친 수준의 혈맹을 맺게 되었다고 하는 쪽이 정확할 정도로 두 공방의 관계는 끈끈해졌다.

    김도진은 명성공방이 금이야 옥이야 대놓고 아끼는 후기지수였는데 바로 그 김도진의 제자로 덴젤 공방의 '공주님'인 클로에 덴젤이 들어간 것이다.

    그 또한 어디 그냥 제자인가.

    농담으로 '인생을 저당잡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통이 아닌 관계가 되었다.

    "수고하셨어요, 스승님!"

    한 차례 연습이 끝나자 클로에가 달려와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려 한다.

    "괜찮아. 땀 안 났으니까."

    "땀 흘리셔도 되는데……."

    "아하하. 안 나는 땀을 흘릴 수는 없지."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는 도진이 겨우 이 정도로 땀을 흘리지는 않기에 클로에의 지극정성은 마음만 받게 되었다.

    "오빠. 여기 물이요."

    "아, 응. 고마워."

    그리고 반대편에서 나타난 상미가 건네는 물을 받아 마셨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성공방과 덴젤 공방의 관계가 이러하니 이건 큰 의미에서 4강으로 묶여 있던 공방 사이의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무너진 게 아니라 명성공방과 덴젤 공방이 존앤집스를 완전히 적대하는 그림이다.

    "…부러워. 죽을 것처럼 부러워."

    "제길. 한국의 후기지수 대표는 하렘왕이라도 되는 건가."

    …여기에 남은 하나인 일본의 쿠나사기 공방은 경쟁심이 강하고 무뚝뚝한 면이 있지만 어느쪽을 딱히 적대하거나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는 '독고다이' 스타일이니 존앤집스는 참으로 곤란하게 된 것이다.

    섭음술로 그런 '씹덕 성분 넘치는' 이야기를 장난스레 하지만 속으로는 경쟁심을 불태운다.

    그러나 거기에 악의는 없고 존앤집스가 남은 우리끼리 손을 잡자는 말을 들어줄 성격도 아니다.

    그래서 곤란해진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려는 듯, 그리고 결속을 다지려는 목적으로.

    "빌.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고."

    "……예."

    존앤집스는 에이스였던 빌리 플로이드를 내부의 적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순간순간,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한 감이 남는 가운데 박람회의 준비는 계속 되었다.

    주변을 의식해서 말이 나오기엔 애매할 정도로, 거기에 준비 자체는 진도가 나가도록 협조하기에 누군가가 지적하지 않은 채 세계 장인 박람회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박람회가 개최될 공간의 준비는 이미 다 되었고 웬만한 작품들의 전시 또한 완료되어 삼엄한 경비 체계도 갖추어졌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고심하여 만들어 내고 후기지수들이 열심히 익히고 손발을 맞추어, 수정을 거듭해 퀄리티를 높인 무대 또한 완성되어 세세한 디테일을 깎듯 연습을 계속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독 눈에 띄는 후기지수가 둘 있었으니 첫 번째로 클로에 덴젤이다.

    내공 거부 체질이 알려짐으로써 자칫 안 좋은 방향으로 큰 이슈가 될 뻔 했던 당사자였던 클로에 덴젤은 그러나 오히려 진일보한 실력을 보여 주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안 그래도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한 차원 높은 실력을 자랑하던 클로에가, 소위 말하는 '깨달음을 얻은 듯' 더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유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도진이었다.

    본래 무공이란 심공(心功)을 포함하는 단어다.

    빠져나가지 못할 늪에서 제아무리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려봐야 언제가 될지 모를 익사를 미루는 게 한계였던 처지였기에, 그것이 마음의 족쇄가 되어 클로에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클로에를 도진이 건져주고, 또 달리는 만큼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기에.

    족쇄를 벗어 던지고 육체와 마음이 해방된 클로에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클로에는 불사마공을 익히면서도 무대의 연습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편입하고 수업을 등록하지 않았기에 그 시간에 최대한 회복을 하고 연습 때엔 경지를 높인 실력으로 어느 정도는 여유를 두면서도 합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클로에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도진과 엮여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목받은 또 다른 후기지수는.

    쿵-!

    "윽!"

    …빌리 플로이드였다.

    순항중인 후기지수들로 이루어질 메인 무대의 준비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한 분위기를 만드는 존앤집스의 에이스.

    "이런! 빌리!"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빌."

    "…죄송합니다."

    그 자신이 아닌, 본래는 자신의 편이어야 할 소속 집단의 악의적인 단체 행동에 의해 주목을 받고 마는 몰락한 에이스.

    그것을 4강 외의 집단은 그저 불편하게 여기고 침묵했다.

    괜히 나서기엔 애매하고 나서봐야 발뺌하는 모습을 볼 뿐인, 얼룩이 소중한 자신의 하루에 묻게 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디든 그렇지만 공방 업계도 좁은데 4강 정도가 아니고서야 업계 최대 규모의 회사인 존앤집스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어쨌든 존앤집스 또한 본 무대를 이런 식으로 망칠 생각은 없을 테니 박람회가 끝날 때까지만 침묵하자 싶은 분위기가 유지되던 것이다.

    존앤집스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완급 조절을 잘 하고 있었다.

    그것이, 도진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

    그래서 나섰다.

    "저기요."

    모두의 시선이 존앤집스에게로 향하는 도진의 목소리에 집중된다.

    그 관심의 한가운데서 도진이 말했다.

    "그 보기 추한 짓 이제 좀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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