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도진의 제안은 놀랍게도 덴젤 공방에 대번에 받아들여졌으며 그를 위한 절차마저 일사천리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 첫 번째 절차는 클로에 덴젤이 잠룡문의 문도이자 도진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약식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구배지례를 치르며 클로에 덴젤은 도진의 제자가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어색하지만 분명한 의지로 클로에는 도진을 스승이라 부르며 활짝 미소지었다.
…사족으로 안토니오는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딸을 잃은 표정을 도진에게 읽히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절차가 한국에서 머물기 위해 본래 다니던 프랑스의 명문 무림학교에서 숭무고로 편입 절차를 밟는 것이었다.
드물지만 사례가 없지는 않았기에 기존의 매뉴얼에 따라 숭무고에서 절차를 진행하고 승인을 받음으로써 클로에는 숭무고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시기가 기말고사만 남은 애매한 시기여서 수업 등록은 여름방학 이후의 2학기부터로 잡았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한국에서 머물게 될 집을 구매했다.
숭무동에는 매물이 없었기에 숭무동 근처의, 무인을 위한 고급 단독 주택 한 채를 구매하게 되었다.
지하 2층 지상 2층의 상대적으로 '아담한' 집은 평소 혼자 머물되 바로 근처의 집에 살며 자주 찾아올 덴젤 공방의 사람들과 안토니오를 포함한 지인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아담하다는 거지 정원과 지하의 연무장을 포함한 최첨단 시설까지 있을 건 다 있는 비싼 집으로 프랑스의 공주님이라 할 수 있는 클로에를 위해 덴젤 공방의 사람들이 매물을 이잡듯 뒤지고 개중 선별한 것이다.
앞으로 클로에는 이 집에 살면서 도진에게 집중적으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수련을 받게 된다.
동시에 덴젤 공방의 후계자로서의 수업도 주기적으로 받게 될 예정이다.
안토니오가 찾아오거나 클로에가 찾아가는 등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꽤 불편한 부분이 있겠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진이 예상하기로 대략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이렇게 수련에 중점을 두고 희귀 체질을 극복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안토니오의 자리를 물려받을 공부에 집중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어디선가 소문이 흘러나가 프랑스의 잔 다르크이자 엘프로 한국에서 관심을 샀던 클로에 덴젤이 숭무고에 편입함과 동시에 잠룡문의 문도가 되었다는 소식으로 온갖 커뮤니티가 뒤집힌 그 시기에.
후르륵.
클로에 덴젤은 박스조차 풀지 않은 이삿짐을 거실에 두고 도진과 함께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급박한 스케줄이었음에도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아예 전용기로 한국까지 가져왔다.
도진은 방과후 따로 짬을 내어 클로에를 도와 그 짐을 날라준 것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짐을 다 집 안에 들인 뒤 함께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중이다.
한국의 문화도 알려줄 겸 중국집 메뉴로 말이다.
다만 저녁에는 환영 행사 겸 집들이 모임이 있어 어디까지나 간단히 때울 겸 간소하게 시켰다.
"젓가락질 잘하네."
지켜보고 있자니 작은 입술로 오물오물 잘도 먹는데 젓가락질도 정석 그 자체다.
무림인이니 한 번만 보고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거긴 한데 프랑스인인 클로에가 첫날부터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잘 하니 그런 말이 나온 도진이었다.
클로에는 물리적으로 묻을 수밖에 없는 입술의 짜장 소스를 톡톡, 공주처럼 우아하게 닦아내고서 말했다.
"스승님을 알게 되고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아하하. 그렇구나. 어쩐지 고맙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간단히 짜장면과 탕수육(다행히 클로에도 부먹과 찍먹을 가리지 않았다)을 먹고 둘이서 짐을 풀어 배치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도진이 굳이 묻지 않았던, 클로에와 안토니오 사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아버지는……."
안토니오와 클로에의 첫 관계는 '계약 부녀'였다.
그러니까 가족으로서의 관계가 아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였다는 말이다.
안토니오는 경계를 넘은 고수의 눈으로 클로에의 자질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자질을 가진 소녀를, 위태로웠던 회사를 안정시키기 위한 돌파구로 삼으려 했다.
"그때 회사엔 나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토니오 덴젤은 명장이자 경계를 넘은 고수였다.
축복받은 천재.
그러나 명장이자 경계를 넘은 고수가 되기 위해선 그 천재로서의 가능성을 모두 활용해야만 했고 그래서 '경영'에는 서툴렀던 것이다.
급격히 커지는 회사는 처음엔 안토니오 덴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뿐이던 회사에 다른 마음을 먹은 사람들의 비중을 늘리게 만들었고 그것이 불화의 씨앗으로 자랐다.
"아버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위기를 느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그 천재적인 재능을 급격히 회사의 경영에 투자했으나 역전을 위해선 무언가 다른 계기가 필요했고 그것이 클로에를 수양딸로 들이는 것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후계자를, 아버지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것이 운명처럼 만난 클로에 덴젤이었다.
그러나.
"…저는 저도 몰랐던 희귀 체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재하지만 너무나 희소하여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
무공을 전혀 접하지 못했기에 알 수 없었던 체질.
내공을 거부하는 저주와도 같은 체질을, 클로에는 타고났던 것이다.
허나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클로에는 다시 거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안토니오 덴젤 또한 비정한 마음으로 양심을 저버리기로 독하게 판단함으로써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계속된 계약 속에서, 또 하나 변수가 생겨 버리고 만 것이다.
"저는,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서 사랑하게 되었고 아버지 또한, 저를 진짜 딸로 여기게 되고 만 것입니다."
계약이 아닌 가족으로서의 부녀(父女)로 두 사람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저를 낫게 해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되찾은, 공고해진 대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클로에를 치료하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아직 현대의 의학은 너무나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런 선택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방법이 없다면.
안토니오 덴젤은 클로에에게서 '덴젤'이란 의무를 놓게 해주려 했다.
그 방법으로 그날의 '폭주'를 택한 것이다.
클로에는 덴젤이란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을 테니까.
버릴 수밖에 없도록, 딸이 된 소녀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명예보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더 커져 버렸기에.
겉으로 보기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클로에의 의무를 버리게 만들려 했다.
심지어 그날 소리쳤던 직원마저 부녀의 편이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아버지를,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저 기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는 구원이었다.
그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도진에게, 클로에는 이보다 밝을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며.
"감사합니다, 스승님."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 * *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짐 정리가 거의 다 끝났을 즈음.
집들이를 위해 사람들이 속속 찾아오기 시작했다.
"형!"
우서진과 우벽진을 시작으로 하는 명성공방의 사람들.
"반갑습니다, 잠룡문주."
그리고 자신들의 공주님을 낚아채 간(?) 도진을 잠룡문주라고 한껏 예의를 차리며 호의로 대하는, 이번 일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안토니오를 위해 움직여 준 덴젤 공방의 아군들.
여기에 소담과 오성아를 필두로 한 잠룡문과 암산서가의 사람들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마당에서 반쯤 파티의 분위기가 되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안토니오!"
"…그러지."
술이 들어가 평소 이상으로 호쾌해진 우벽진의 말에 안토니오는 언제나처럼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호위 스케줄이 비어 사회 공부 겸 소담과 오성아를 따라 온 암산서가의 사람들은 조금은 어색함이 줄어든, 그러니까 사회의 물이 든 얼굴로 여기저기에 시선을 준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하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회에 발을 내디딘 문도들을 지켜보는 문주의 입장으로서 생소한, 그러나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런데, 클로에 양의 체질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선언해도 괜찮았던 건가요?"
다가와 묻는 건 암산서가의 '엄마' 포지션을 맡고 있던, 이제 서른 하나가 되었음에도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동안의 소여은이다.
오성아에게서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 제법 총무 티가 나는 그녀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클로에가 특정한 조건이어서 가능하다고 거기서 이미 말을 해 두었으니 괜찮아요."
내공 거부 체질은 무림인과 일반인을 떠나 무공이 필수가 된 이 시대에 너무나 혹독한 저주였다.
무림인의 분류에 들지 않더라도, 일반인이라도 최소한의 내공과 무공은 익혀야만 경쟁이 되는 시대.
그런 시대에 내공 거부 체질은 잔혹하게 말해 장애를 타고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데 도진은 그런 장애를 고칠 수 있다 선언했으니 그 파장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도진이 고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공 거부 체질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뿐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라거나 비술을 공개하지 않기 위한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기에 문제가 커질 일은 없었다.
실제로 도진은 말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그에 관한 세부적인 조건을 공개할 것이었고 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었다.
만약 그 조건에 해당한다면 문도가 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비술을 풀 생각도 있었고.
"성아 누나에게 배우는 건 어때요?"
화제를 바꿔 이번엔 도진이 물었다.
소여은은 곱게 빗어내린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어요. 그동안은 중구난방으로, 되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이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착착 무언가를 하는 느낌이랄까요. 아버지가, 문주님이 돌아오시면…… 암산서가를 위해서 배운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요."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암산서가. 명성공방. 이번에 새로이 도진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덴젤 공방.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많은 인연들까지.
각자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울타리가 도진으로 연결되어 교류하고 있었다.
개중에서 상미, 우벽진과 우서진, 그리고 이제 클로에 덴젤까지 도진이 아직 밝히지 못한 '천마신교'와 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오며 도진은 넓어지는 울타리 안에 많은 것들을 품게 되었지만, 정작 그 울타리가 무엇인지 아직 이들에게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직 이것으로 충분하지만, 머지 않은 때에 중심을 분명하게 잡을 수 있도록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는 지금 도진의 당장의 목표인 천마심공의 5성에 도달해야만 한다.
아직 실마리를 붙잡고 나아가는 단계지만 도진은 그때가 머지 않았을 거라 확신하며, 지금은 집들이를 통하여 깊어지는 인연을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