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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27화 (327/741)

326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초월적인 고수의 경지를 뜻하는 단어는 '경계(境界)'였다.

그렇기에 절대고수는 경계를 넘은 고수이며, 이 경계는 현실의 벽을 뜻한다.

인간이 동물보다 빠르게 달리고 곰보다 강한 힘을 내는 건 분명히 '판타지스런'일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현실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내공이 현실이 되고 그 내공과 무공에 의해 발전하고 있는 인류는 과거와 달리 그것을 현실의 영역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때문에 현실의 영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정말로 '비현실적인' 것이 필요했고 그 비현실적인 것이 가능한 사람이 바로 경계를 넘은 무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은 무인을 상징하는 것이.

파아아앗-!

바로 유형화된 기, 안토니오가 대검에 발현한 '검기(劍氣)'였다.

"거, 검기……!"

인류의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자 현실에 존재하는 '무림'의 상징.

선택받은 천재 중에서도 경계를 넘어선 무인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절대 경지의 상징.

안토니오는, 그 상징을 검에 깃들인 채 도진의 앞에 섰다.

'미친! 진심이잖아…….'

지켜보던 존 스미스는 그저 경악했다.

비록 명장 중에서는 명함을 내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경지가 낮다 하나 그 역시 수준급의 무공을 익힌 천재였다.

때문에 타고난 눈으로 클로에 덴젤에 관한 체질을 알아챘을 때 김도진과 안토니오의 갈등을 유발할 계획을 번뜩 떠올리고 구체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곤 역시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명성공방에서 튀어나온 저 말도 안 되는 후기지수에겐 엿을 먹이고, 경쟁 회사인 덴젤 공방을 한 번 크게 흔드는 정도가 그가 생각한 범위였다.

알고 보니 유럽에서 이름높은 '잔 다르크'가 저주와도 같은 체질을 타고 났는데 그런 체질을 타고난 수양딸을 안토니오가 강제로 무공을 익히게 했더라. 이건 아동 학대이자 크나큰 범죄 아닌가?

그런 루머가 도는 것만으로도 안토니오에겐 씻을 수 없는 타격이 되는 것이다.

덴젤 공방은 거대한 만큼 웬만한 흔들림으로는 무너지지 않지만 그 벽에 숨길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흠결을 남길 수 있다.

…이 정도까지 생각한 그였음에도, 지금의 상황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다고 할 만큼 상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침묵하거나 어느 정도 반발하더라도 의혹은 지울 수 없고 결국 퍼져 나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논란은 되겠지만 논란에서 그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과 명성이 덴젤에게는 있었다는 말이다.

한데 이렇게 나와 버리면.

내가 옳다고 검기까지 뽑아내며 날뛰어 버리면.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지 않는가…….'

본성이 썩었다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 스미스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일을, 폭주를 안토니오는 해 버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다.

이쯤 되면 나서야 할 우벽진마저 침묵하고 있다.

아니, 침묵하는 게 아니다.

분명히 불안이 담겨 있는, 그러나 그 이상의 이해할 수 없는 기대가 담긴 눈으로 그저 한국의 후기지수를, 김도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언가, 이게?'

우벽진은 명장들 중에서는 수위에 꼽히는 무공 수위를 자랑하지만 경계를 넘지는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해 경계에 가장 가까운 무인이기도 했다.

하물며 명성공방의 대표로서 이런 상황에서 나서야만 했음에도 오히려 명성공방의 대표가 김도진이라는 듯 지켜보고만 있으니 존 스미스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우벽진과 달리 후계자인 우서진이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과.

또 다른 후기지수인 상미가 그저 당연히 도진이 이 일을 해결할 것이라고, 그것이 태양이 뜨고 지는 것 이상으로 당연한 진리라는 얼굴인 것까지 더해 불안한 눈동자의 우서연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인 것 같은, 마치 상식이 일그러진 세계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우우웅-

무대를 뒤덮은 기세와 그 기세가 집약된 찬란하게 빛나는 검기가 깃든 대검.

그것들을 두르고 쥔 안토니오가 도진을 마주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을 물릴 기회를 주겠다."

더는 없음을 선고하는 말에 도진은 웃으며 즉답했다.

"물릴 말이었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도진은 느끼고 있었다.

우서연의 불안과 걱정을.

우벽진의 불안과 기대를.

우서진의 무한한 신뢰를.

그리고 상미의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믿음을.

그렇기에 경계를 넘어선 무인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압박에도 웃었다.

-할 수 있겠느냐, 제자야.

위지혁이 물었다.

이 세상에서의 상식 중 하나는, 경계를 넘어선 무인을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무인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이 없음에도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경계는 그 이름처럼 절대적인 의미가 있었다.

심지어 위지혁의 시대에서도 비슷했다.

경계란 굳이 무협지에서의 단어를 가져오자면 '화경(化境)'에 비견된다.

대표적인 차이는 유형화된 기. 검을 쓴다면 검기로 검기가 깃든 것은 설령 그것이 갈대라 해도 명검을 가볍게 갈라 버리는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한다.

단순히 검기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전반적인 모든 범위에서 그만큼의 격차가 발생하니 절대라는 것이 없음에도 그에 비견되는 격차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명성공방의 셋을 제외한 누구도 도진의 승리를 점치지 않는 이유였다.

그런 상황임에도 도진은 웃었고 스승인 위지혁과 장호는 평안한 얼굴로 제자에게 묻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고.

이길 수 있겠느냐고.

도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예, 하고 답했다.

-이깁니다.

이기겠습니다가 아니라 이깁니다.

처음 실전에서 답했던 것처럼.

이길 것이다, 이겨야만 한다가 아니라 결과를 확정하는 그 말만이 도진이 내놓는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 위지혁과 장호는 한 점의 걱정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존(至尊)이란 그래야만 했다.

울타리 안의 뒤따르는 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뒤로 빼거나 일을 미루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지존이라면, 뒤따르는 자들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개척하고 장해물을 베는 자여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항시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뒤로 빼거나 숨어서는 안 되니, 위지혁과 장호는 그저 제자의 확언을 믿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무인이란, 그것도 천마와 사신을 계승하는 도진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뛰어넘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 의무를 진 도진의 물러서지 않는 모습에, 안토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

그리고 대검을 든 채 말했다.

"단 한 수의 교환으로 결정하겠다. 내 한 수를 네가 받아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네 승리다."

승부라기엔 너무 관대한 조건.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관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한을 몇으로 나누든 그것은 무한인 것처럼.

후기지수들 중에서야 압도적이라지만 경계를 넘지 못한, 그것도 학생의 신분인 도진이 평생을 고련하여 경계를 넘은 안토니오의 한 수를 받아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유리한 조건이네요. 무르기 없깁니다?"

"…물론."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쿠웅-!

안토니오가 또 한 번 기세를 일으켰고.

꾸우우웅…….

너무나 거대해 아득하게 느껴지는 진각을 밟았다.

다음 순간 도진을 덮친 건 쓰나미였다.

대검이라 하나 분명히 '선(線)'밖에 그리지 못할 그것이 흩뿌려지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쓰나미가 도진을 덮치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자연재해와 같은 기운이, 도진 단 한 사람을 덮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막을 수 없고 피할 수조차 없다. 인간의 몸으로는.

하지만 도진은 거기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천마기를 일으켰다.

두웅-!

"헉!"

경악의 소리가 들린다.

지금 도진의 한계치까지 일깨운 천마기는 안토니오의 기세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중에도 분명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 지켜보던 이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계치까지 일으킨 천마기를 두른 도진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한계까지 다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만 비로소, 이 쓰나미를 뚫을 수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안 된다고?

아니. 그건 무공이 깃들지 않은 인간의 이야기다.

하물며 도진의 안에 깃든 건 단순한 무공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기 위한, 그리고 그것마저 넘어 그 너머에 이르기 위한 무공이다.

쓰나미를 뚫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쓰나미를 뚫은 궤적은 그 너머,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꿰뚫는다.

……!!

충돌음은 없었다.

그저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파동만이 일대에 퍼져 나가며 지켜보던 이들을 휩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학-!

도진이 쏟아낸 피가 바닥과 안토니오를 물들였다.

"……."

투둑. 투두둑.

"…올곧군."

검을 든, 상처 하나 없는 안토니오는 그렇게 말하며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도진을 응시했다.

분명히 열세였음에도, 물러나거나 하다못해 몸을 굽히기만 했어도 이만한 충격은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도진은 그러나 일말의 물러섬이나 굽힘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어리석다 해도 될 만한 일이었다.

허나 안토니오는 그것을 어리석다 말할 수 없었다.

도진이 천마와 사신의 이름을 이어야 하기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걸 몰랐음에도.

도진의 백설이, 그 검의 끝 검첨(劍尖)이 바스타드 소드를 '뚫고' 자신의 목을 시리게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올곧음이 되었다.

"……."

"……."

순수하게 경악으로 채워진 침묵이 무대를 질식할 것처럼 가득 채운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짜내듯 말했다.

"봐, 봐준…… 건가……?"

그것은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것을 그저 무의식중에 흘려낸 것만 같은 말이었다.

"아니. 봐주지 않았다."

그 소리를 안토니오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둔 건, 오히려 김도진이었다."

"……?!"

"네가 보여준 초식, 이름을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겠나?"

안토니오의 물음에 도진은 핏기가 어린 입술로 곡선을 그리며 답했다.

"초살(初煞).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두 분 중 한 분의 절기입니다."

"초살. 멋진 이름이로군."

안토니오의 한 수는 전력은 아니었으나 진심이었다.

그 진심의 한 수를 인지조차 하지 못할 만큼 찰나에, 그러나 강렬하게 꿰뚫는 일격이 있었다.

검기에 감싸인, 자신이 만든 명작을 뚫고 쇄도한 그 섬광은 분명히 목마저 꿰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 검은 분명히 멈추었으니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안토니오는 목이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도진이 내상을 입고 피를 흘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승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패배다."

안토니오의 선언이 무대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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