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26화 (326/741)

325화

동양과 서양의 무림은 당연하게도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동양이 무협지가 현대와 공존한 듯한 느낌이라면 서양은 '중세와 미래에 무협지가 섞인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현대적인 걸 넘어 좀 더 미래적인 느낌의 시대에 중세와 무협지를 섞은 듯한 게 서양에서의 무림이다.

그것은 클로에 덴젤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무공을 쓰면서 무기는 첨단 기술이 가미된 건틀렛과 철을 덧댄 부츠를 쓰며 무복 안에 역시나 최첨단의 '이너 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중세의 무기인 건틀렛이지만 그것은 온갖 최첨단의 이론을 집약하여 과학과 명장의 기술로 실현한 어마어마한 것이다.

얼핏 잠수복처럼 보이는, 정통 무복 안에 입은 몸에 딱 붙는 이너 슈트 또한 마찬가지다.

방탄 효과는 물론이요 충격 흡수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는 그것은 서양 무림에서는 기본 장비로 통했으며 동양에서도 '일'을 하는 무림인은 기본으로 착용하곤 했다.

총기의 위협이 드물고 그 환경도 온건한 편인 한국에서야 학생들은 잘 입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후기지수들 또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대부분 착용하는 편이니 클로에 덴젤이 무복 안에 그것을 입고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게 뭐야……."

무복과 함께 찢긴 이너 슈트 안에 드러난 피부가 갈라져 토해낸 피로 검붉게 절여져 있는 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안토니오. 자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날카롭게, 그러나 그 이상으로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분위기 속에서 존 스미스가 대답을 요구한다.

"……."

안토니오 덴젤은 무거운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침묵을 고수했지만 그것은 그리 효과적인 대처가 되지 못했다.

"…내공 거부 체질."

섭음술도 잊고 누군가 중얼거린 말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내공을 평균 이상으로 잘 받아들이는, 내공과 잘 맞는 체질이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반대 또한 있으니 내공과 잘 맞지 않는 체질 또한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잘 맞지 않는 걸 넘어 아예 '거부 반응'을 보이는 희귀 체질이 있다는 것이다.

내공이 생성되면 그것을 '적'이라 간주해 인체 내에서 공격을 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체질을 타고난 사람은 내공을 가지지 못한다.

정확히는, 가질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몸이 고장이 나 버리니 익히지 않는 것이다.

300만 명 중 한 명의 확률로 타고난다는 이 희귀한 체질은 한국에도 몇 건 보고되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희소하지만 분명하게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체질이기에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체질이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무림인도 아니고 엘리트가 모인 이 자리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클로에 덴젤의 '체질'을 몰라보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존 스미스는.

"속이거나 변명할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 또한 알지 않는가. 내가 눈이 좋다는 걸."

우벽진의 명장으로서의 특징은 대상의 반려를 만들어준다고 할 정도로 궁합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존 스미스의 특징은, 낯간지러운 말로 '대장장이 신의 눈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좋은 눈이다.

독보적으로 좋은 눈을 가진 그는 재료의 수준은 물론이요 제작 과정에서 작품의 상태를 기계 이상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를 명장으로까지 만들어 준 이 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익힌 무공을 바탕으로 하여 관련한 것들 또한 꿰뚫어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니 도진의 뒤를 이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클로에 덴젤의 체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거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선으로 쏘아보는 존 스미스에게, 안토니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딸은, 내공 거부 체질이야."

웅성웅성-!

"…그런데도, 무공을 익히게 했단 말인가?"

"그래. 그랬지."

쿠궁……!

거대한 어떤 것이 무대를 짓누른다.

그렇게 느낄 만큼 안토니오의 긍정은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내공을 거부하는 체질이라 해도 무공을 익힐 수는 있다.

내공만 가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한데, 그것을 어기고 내공을 쌓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몸이 고장난다.

단순히 고장나는 게 아니라 삶에 직접적인 지장이 생기며 심지어 상상도 못할 고통이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처럼 찾아온다.

클로에 덴젤이 이너 슈트로 감추고 있던, 내부에서 터져 갈라진 듯한 상처들이 그렇다.

어제 생긴 듯한 상처는 의료용 실로 기워 놓았으나 이번의 비무로 생긴 듯한 상처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것을 클로에 덴젤이 익숙한 듯 손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익숙한 듯 보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광경이다.

내공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렇게 망가진다.

한데 그런 내공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질 만큼 쌓고 무공을 구사해 왔다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두려운 일에 후기지수들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자신의 의지'인가에 대한 의문에 이 자리의 시선이 모두 안토니오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자네…… 수양딸을 학대한 것인가?"

쾅!!

다시 한 번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찍는 발언이 존 스미스의 입을 통해 안토니오에게로 향했다.

안토니오는 이번에도 그런 분위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듯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클로에가 원해서 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뭐라? 자네 딸이 원해서 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안토니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클로에는 나의 딸이 되기를 원했고 덴젤 공방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천형(天刑)처럼 가지고 있던 체질마저 극복하며 노력했고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분위기에 무게를 더하며 내려앉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의 색깔은 안토니오의 발언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적이었다.

복잡하게 늘어놓을 것도 없었다.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가장 이득을 본 건 덴젤 공방이었으며 그 덴젤 공방의 대표가 바로 안토니오 덴젤이다.

대표 자리가 위태로웠던 시절 안토니오 덴젤의 기반을 다시 공고히 해 준 것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클로에 덴젤이었다.

안토니오의 호주머니를 노리다 붙잡힌 거지 소녀는 과연 자의로 그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걸까, 아니면 동앗줄을 붙잡기 위해 '양아버지'의 말을 따른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스스로 원해서 한 일입니다."

어렵사리, 그러나 진솔하게 호소하는 클로에였으나 그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필사적인 만큼 안토니오의 태도가 담담했기에.

차라리 뻔뻔하게 밀고 나가겠다는 듯한 그 태도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적의를 사기에 충분함을 넘어 과할 지경이었다.

그런 안토니오를 존 스미스가 몰아붙였다.

"나는 어제 보았어. 자네의 딸이 저기 한국의 후기지수에게 팬이라며 사인해달라 요청하던 모습을. 그토록 순수한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지옥 같은 고통을 참고 무공을 익혔다고? 아니, 나는 믿기 힘들군."

존 스미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번엔 도진에게로 몰렸다.

"……."

도진은 당연하게도 존 스미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무언가를 꾸미는 듯 보였던 존 스미스의 속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싸움을 붙이겠다는 건가.'

신안으로 본 것을 존 스미스 또한 읽었다는 걸 캐치하는 건, 신안에 더해 장호에게 많은 것을 배운 도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일을 벌일지에 관해선 확신이 없었는데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도진을 안토니오가 직시하며 말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

가벼운 물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분기'였다.

도진의 대답에 따라 앞으로의 일이, 사건의 방향이 결정될 만큼 중요한 분기.

그러니까 도진에서 그치지 않고 명성공방이 덴젤 공방의 편을 드느냐 존앤집스의 편을 드느냐의 기로다.

그런 구도가 되도록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는 당연히 존앤집스의 편을 들어야 한다.

앞서의 갈등이나 존 스미스 자체에 대한 비호감으로 덴젤 공방의 편을 드는 건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

존 스미스는 그런 여러가지까지 다 생각해 둔 얼굴로 몰래 비죽 웃었다.

그리고 도진이 말했다.

"네."

망설임없이.

네, 라고 말했다.

존 스미스가 웃고 안토니오는 여전히 담담한, 그러나 스멀거리는 기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는 자신의 의지로 무공을 익히고 또 나의 기술을 배워 후계자가 되기로 마음 먹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나는 그런 클로에의 마음을 존중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 그런 나와 딸의 삶을, 너는 부정하겠다는 건가?"

"…뭐야. 한국의 후기지수를 압박하는 건가?"

"존 스미스는 쉽지 않으니 쉬운 쪽을 공략하겠다는 의도인가. 역겹군."

섭음술로 수군거리는 후기지수들의 목소리가 도진에게 들려왔다.

"왜 마에스트로 우는 나서지 않는 거지? 이런 때에는 명성공방도 대표가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저쪽은 명장들이 나서는데 명성공방에서는 실력이 압도적이라고 하나 그래봐야 후기지수인 도진을 대신하여 우벽진이 나서지 않는 걸 의심하는 목소리도 많다.

도진은 그런 소리들마저 모두 흘리고 다시 말했다.

"삶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당신의 방식은 '최선'이 아니니까요. 타인의, 남의 가정사이기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물으셨고 관련이 되었으니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토니오 명장. 당신의 방식은 당신의 가족이 행복해질 수는 없는 방식입니다."

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웅-!

안토니오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헉!"

"흐읍!"

주변에 있던 일반인은 물론이요 후기지수들마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그렇게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며 안토니오가 말했다.

"나를 부정하는 너를, 나 또한 용납할 수 없다. 피차 무림인인 이상, 답을 내야만 하겠군."

"헉……!"

"미, 미친 건가?"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안토니오의 기세 때문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에 핼쓱해졌다.

존 스미스 또한 예상했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상황에 좋아하는 것도 잊고 당황할 지경이었다.

'저, 정말 미친 건가?'

치부를 들켰는데 해결할 방법이 보이니 차라리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서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에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가.

존 스미스마저 답을 내지 못하는 가운데 상황은 계속해서 급격하게 치달았다.

"나는 수석 명장으로서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겠다."

그것은, 만약 패배하다면 걸었던 모든 것을 놓겠다는 선언이었다.

너무나 극단적이었으며 무거운, 그렇기에 후기지수인 도진이 굳이 받을 이유가 없는 대결 신청.

허나 도진은 오히려 한 걸음 나서며.

스릉-

"……!!"

백설을 뽑아들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제 인생의 5년을 걸도록 하죠."

"이런 미친!"

결국 누군가 섭음술도 잊고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비무가 성사되고 말았다.

스르릉-

안토니오가 웬만한 사람에 비견될 만큼 커다란 대검을 덴젤 공방 측 사람에게 넘겨받아 뽑아들었다.

그리하여 두 손으로 대검을 쥔 안토니오는 그 순간 명장에서 무림인으로 그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안토니오 덴젤.

이름높은 명장 중 한 명인 그의 특징은 고수(高手).

그는, 경계를 넘은 절대고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