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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24화 (324/741)
  • 323화

    사전 비무는 도진과 클로에의 비무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존앤집스를 포함한 몇몇 공방에서 이대로 비무를 진행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우니 분위기를 환기할 겸 명장을 포함한 장인들이 찾아온 목적을 먼저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 이유였다.

    "무대에서 쓸 무구를 미리 지급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박람회의 무대에서 선보일 장인들의 무구를 미리 후기지수들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급하는 것이 퀄리티 높은 무대를 완성하기 위한 적응과 연습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후기지수들은 각자의 공방 사람들과 지급된 무구를 확인하고 적응하는 시간을 먼저 갖기로 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음, 어떻게 됐든 남의 손을 탄 건데 구매 희망자들이 싫어하지는 않을까요?"

    돌아가는 길에 상미가 그렇게 물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 물음에 함께 걷던 우서연이 답했다.

    "물론 그런 분들이 적지는 않지만 또 많은 분들은 무구만이 아닌 그 무구에 포함된 이름값과 '이야기'를 함께 구매하는 걸 선호하시니까요."

    "이야기요?"

    "네. 이 검은 한국에서 열린 세계 장인 박람회의 무대에서 누구누구가 선보였던 검이지, 같은 식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데 쓸 수 있는 이야기요."

    "아……."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대에서 선보이는 건 '바닐라 타입'이예요."

    "바닐라요?"

    갑자기 나온 단어에 상미가 이번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서연이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아무런 커스텀이 되지 않은 완성되었을 때 그대로의 기본 상태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이제 구매자가 확정되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희망하는 방향으로 조정을 해야 진짜 완성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무대에서 후기지수들이 잠시 사용하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렇구나아."

    상미가 이제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궁금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벽진 일가와 도진, 그리고 상미는 박람회가 열릴 명성 크리에이티브 타운을 견학하듯 돌며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실 이 시간은 장인들의 무구를 후기지수들에게 전달하고, 후기지수들이 그렇게 전달받은 무구에 적응하기 위해 부여된 시간이었으나 명성공방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생긴 여유였다.

    도진을 상징하는 검인 백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상미의 난상과 우서진의 상청 또한 팔기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한 무구, 그것도 쥐는 순간 이미 평생을 함께 해 온 듯한 감각을 느끼도록 해 준다는 우벽진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열릴 비무에 대비하여 '평소대로' 수련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잠시의 수련 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친목도모 겸 각 공방의 관계자와 후기지수들까지 다 모인 파티 겸 식사 자리였는데, 거기에 클로에 덴젤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어디 간 거야?"

    "그렇게 격렬히 싸웠으니 몸 상태가 나빠진 건가?"

    섭음술로 수군거리는 후기지수들.

    그러나 덴젤 공방은 그저 간단히 컨디션 조절을 위해 식사를 걸렀다는 말만을 했다.

    도진은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존 스미스는 비죽, 은밀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짐작에 확신을 더해주는 일에 기분이 좋아보이는 존 스미스와 달리 존앤집스 공방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식사 때는 물론이요 숙소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오늘의 패배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1등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 자부심에 저번 경매로 인한 스크래치가 살짝 나긴 했으나 이번 박람회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까.

    한데 이게 뭔가.

    그들의 대표로 나섰던 후기지수인 블랙 레오파드가 뭐 어떻게 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대패해 버렸다.

    이래서야 또 한 번 명성공방에 한 수 뒤쳐진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그런 무대에 올라야 할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후기지수들은 더더욱 의기소침한 모습이었으며, 그 감정을 떠넘기기 위해 빌리 플로이드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차라리 자연재해라고 해야 할 말도 안 되는 실력의 또래가 한국에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무대에 섰다면 빌리 플로이드 이상으로 무력하게 졌을 거라는 것까지도.

    허나 이성적으로는 그리 생각해도 감정적으로까지 그렇게 받아들일 순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빌리 플로이드는 그들의 대표이자 '에이스'의 역할을 맡지 않았던가.

    에이스란 평소에 대우받는 만큼 이런 일이 있을 때 비난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뻐킹.'

    그래서 빌리 플로이드는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웃돈까지 받고 온 자리였다.

    한데 그는 돈값을 하지 못했다.

    이 사회에서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불길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존 스미스.

    존앤집스의 두 수석 명장 중 한 명인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거기엔 동양인만이 아닌, 흑인에 대한 차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기에 빌리 플로이드를 밀어 주었지만 이제는 어찌될지 모를 일이다.

    그는 기대를 충족해주지 못하는 것에 관해선 가차가 없었으니까.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빌리 플로이드는, 이내 숙소에 들어선 존 스미스의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 불길한 상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

    효용이 다해가는 고철을 보는 눈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눈앞에 시뻘건 불이 튀는 듯 치솟는 감정을 빌리 플로이드는 억지로 눌러야 했다.

    빌리 플로이드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을 정도로 쉽게 세상을 살지는 않았으니까.

    블랙 레오파드의 명성의 근간이 되는 것이, 그리고 화려한 삶의 근간이 되는 것조차 존앤집스 공방과의 계약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빌리 플로이드를, 존 스미스가 불렀다.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지."

    무슨 이야기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고용된 입장에서 빌리 플로이드는 조용히 그와 독대를 했고.

    "내일 비무에서 자네가 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

    은밀한 지령 하나를 받게 되었다.

    * * * *

    저녁 식사가 끝나고 연신극기공의 수련 겸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도진은 저녁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클로에 덴젤을 보게 되었다.

    덴젤 공방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인형의 집'에 갇힌 것만 같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이었으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갇혀 있는 인형 같았던 그녀는, 돌연 도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생기가 깃들었다.

    그리고 총총총 걸어 도진의 앞에 선 그녀는.

    "안녕, 하세요. 당신의 팬입니다."

    '어.'

    -호오호오.

    -잘난 제자이지 않습니까, 형님.

    심상세계에서의 지방 방송과 함께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팬?'

    내가 아는 그 단어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말 정도로 갑작스런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한 클로에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비무,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아. 네. 별말씀을."

    조금은 어색하지만 단시간에 열심히 배운 티가 역력한 인삿말에 도진은 조금 당황스러운 감정 속에서도 내민 손을 맞잡으며 답해야 했다.

    도진으로선 조금 생소한 경험이었다.

    인터넷에서 도진을 '칭송하는' 댓글이야 넘치고 주변에도 도진을 열렬히 좋아하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리, 이런 식으로 팬이라 말하며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외국의 소녀를 보는 건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조금 부끄럽고 기쁜 감정이 담긴 생소함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팬이라 말하며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을 앞에 둔다는 건 그런 감정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서 사는, 접점 자체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녀는 과연 어떤 계기로 나를 알게 되었고 나를 팬이라 자처할 정도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래서 생소하면서도 의외의 기쁨이다.

    다만 곧 공감을 할 수 있었으니 도진 또한 그런 식으로 '멀리 있는 사람'이었던 소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전생을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미소를 보여주는 도진의 앞에 선 작은 팬이 수첩과 펜을 내밀었다.

    "실례지만, 싸인을 부탁해도, 될까요?"

    "아, 네. 기꺼이."

    도진은 그녀에게 싸인까지 해 주었고 싸인을 보며 클로에는 만족스레 웃었다.

    "고맙습니다."

    "아하하. 별말씀을."

    쑥쓰럽지만 기분 좋은 대화였다.

    * * * *

    다음날.

    어제에 이어 중단되었던 비무가 이어졌다.

    어제와 달리 4강에 해당되지 않는 후기지수들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고, 그 비무는 상당히 거칠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무림 교육 환경을 '온실 속 화초'라고 했던가.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비무가 계속되었다.

    피가 튀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뼈가 보일 만큼 큰 상처를 입는 후기지수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평이했으니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에겐 그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사고방식부터가 다른 그들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정말로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수준까지만 가지 않았을 뿐 거의 실전처럼 비무를 치렀고 분위기가 꽤 과열되었다.

    여기에는 어제 장인들에게 무대에서 사용될 명품을 받음으로써, 주최측이 의도한 대로 후기지수들의 사기가 올라간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이랑 외국이 그렇게 다르다더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네요."

    우서진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무대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일상이라는 게 느껴진다.

    한국도 '무림'에 나가면 그렇다지만 이들은 학생 때부터 이런 환경에서 지냈으니 처음 명성공방을 한 수 아래로 보던 시선이 마냥 얕잡아 본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케이! 그래도 우리를 물로 보면 안 되니까 저도 한 수 보여주고 올게요!"

    "그래."

    우서진이 씩씩하게 나섰고 도진은 피식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당당하게 무대 위로 우서진이 올랐고 현장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어제.

    명성공방은 대표라 할 수 있는 도진이 나서 모두에게 상상도 못할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런 도진과 함께 하는 후기지수 둘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에 관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고 이제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에이스들의 비무가 시작되려는 때에.

    "훅, 훅."

    몸을 푸는 조지 플로이드의 뒤에서, 참관중인 존 스미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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