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점심 식사는 제법 분위기가 풀린 가운데 진행되었다.
처음에야 데면데면했다지만 무공을 익힌 주목받는 후기지수들이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유지할 만큼 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우연히 마주앉게 된 후기지수들끼리 인사를 나누었고 나름의 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동떨어진 후기지수들의 팀도 있었으니 명성공방과 존앤집스 공방이었다.
도진과 상미, 그리고 우서진이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존앤집스 공방의 후기지수들이 앉았다.
셋뿐인 그들을 무려 열 명이 넘는 미국의 후기지수들이 둘러싼 꼴이다.
그러고서는 무거운 분위기를 덮으니 다른 후기지수들이 다가오지도 못할 만큼 착 가라앉은 테이블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보통은 이러면 안절부절못하거나 최소한 불편한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빌리 플로이드를 필두로 한 미국의 후기지수들이 오히려 얼굴을 일그러뜨릴 만큼 명성공방의 후기지수들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도진은 이게 후기지수의 식단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몸에 안 좋은', 그래서 더욱 맛있는 것들로 배를 채우고 있었고 상미는 그런 도진이 먹기 편하도록 음식들을 한 입 크기로 정성스레 썰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다시는 없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한 얼굴인 상미의 반대편 우서진 또한 신나는 얼굴이니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을 지경이다.
"자, 너도 먹어."
"네!"
도진이 한 젓가락 내미는 걸 상미가 0.000001% 확률로 뽑기에서 나오는 아이템이라도 뽑은 것처럼 기쁜 얼굴로 받고 우서진은 '형, 나도 줘요!' 이러고 있다.
'뻑! 이건 고도의 기만 전술인가?'
빌리 플로이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풍경에 유기농 풀을 씹으며 불편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화가 이후 진행된 비무에 앞서 강도 높은 도발을 하게 만들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마련된 드넓은 무대 겸 비무장 아래서 후기지수들이 비무 전 몸을 푸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도 도진은 시선을 끌었으니 어린이 체육대회 전 하는 국민체조 같은 어이없는 '몸풀기'를 한 것이다.
사실은 그게 연신극기공이 가미된, 그들은 상상조차 못할 강도 높은 몸풀기라는 걸 알 리가 없었으니 도발로 받아들이는 걸 마냥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도진을 향해, 빌리 플로이드가 계산된 각도로 몸을 움직였다.
"훅, 훅훅."
호흡법에 따라 호흡을 조절하며 몸을 달군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몸풀기.
그러나 그 몸풀기 후 자리에 앉아 눈을 마사지하는 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꾸욱. 꾸욱.
눈두덩을 누르던 손이 이윽고 눈꼬리로 향한다.
그리고 눈꼬리 주위를 돌리던 손길이 자연스럽게, 눈을 주욱 찢었다.
동양인을 비하하는, 너무나 유명하고 명백한 행위였다.
"……."
그 태도는 빌리 플로이드의 계산대로 도진의 정면에서 이루어져 두 눈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후기지수 정도 되면 그 짧은 순간은 결코 짧지 않으니 이것은 대놓고 하는 강도 높은 도발이었다.
그러면서도 항의하기엔 애매하도록 눈 마사지의 형식을 취했으니 그 방식 또한 역겹다. 그래서.
피식-
도진은 웃었다.
웃고서,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비무, 제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스타트를 끊겠다는 도진의 발언에 진행을 담당하기로 한 직원들 중 선임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 상대가 되어 주실 분?"
스윽, 무대 위에서 아래를 훑는다.
그 시선을 4강이 아닌 후기지수들이 외면했다.
빌리 플로이드를 악수로 압도했던 후기지수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지만 그들은 그것을 안 대봐도 알 수 있는 무림인이었으니까.
굳이 가장 먼저 나서서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도진의 시선은 빌리 플로이드에 멈췄고.
"……."
거기서 떠나지 않은 채 지그시 머물렀다.
"……."
빌리 플로이드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외면하는 건 자존심상, 체면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무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퍼킹.'
어차피 붙기는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도발을 했던 것이고.
그러나 이렇게 처음부터, 정보도 없이 붙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가 된 그다.
당연한 말이지만 멍청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분명한 천재 중 천재였다.
그렇기에 말도 안 되는 악력을 보여 준 도진을 폄하하거나 지능 저하, 혹은 인지부조화라도 온 것처럼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빌. 어땠어?"
"…인정하기 싫지만 한 수가 있는 놈인 건 확실해."
잠시 그들만 모여 있던 자리에서 빌리는 자신의 실태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 실태의 원인이 된 도진의 '한 수' 또한 경계해야 한다는 것까지 인정했다.
때문에 비무에서 우선 다른 후기지수들과 도진이 맞붙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대비를 한 뒤 붙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겼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마음 먹고, 중요한 무대에 섰다 생각하고 정말로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시작!"
당연히 그 생각은 정답이 아니었다.
훅-!
"……!?"
빌리 플로이드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처럼 도진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디!'
훅-!
정신은 경악했으나 다행히 축복받은 육체의 감각이 작동했다.
본래는 없었던 기척과 공기의 흐름으로 우측으로 파고든 도진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었고 그의 무기인, 건틀렛에 달린 짧은 칼날을 휘둘러 쳐낼 수 있었다.
챙!
목덜미를 파고드는 서늘한 예기(銳氣)를 겨우 쳐냈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채채채채채채챙!!
숨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분명히 쇠로 만든 검임에도 독사처럼 말도 안 되는 곡선을 그리며 검격이 이어진다.
챙!
그러면서도 그 검격 하나하나가 망치를 전력으로 휘두른 듯 무거우니 빌리 플로이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의 장점은 힘과 스피드, 그리고 유연성이다.
타고난 긴 팔다리를 이용한 사정거리를 기계처럼 정확하게 활용하는데 단순히 리치만 긴 것이 아니라 축복받은 탄력과 유연성이 상대를 농락하는 궤도를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에 상대를 압도하는 힘마저 더해지니 미국의 손꼽히는 후기지수 '블랙 레오파드'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채채챙!
그런 자신이 눈앞의, 아니 보이지 않는 한국의 자그마한 후기지수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가 그동안 압도하던 상대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내가…… 피지컬에서 압도당한다고?!'
채채채채챙!
보이는 건 오로지 검의 시린 궤적뿐이다.
그 검을 휘두르는 한국의 후기지수를 눈에 담을 여유조차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뻐킹!'
채채채채챙!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또래를 상대하며 다시 느끼는 날이 올까 싶었던 근육의 피로를 느끼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패배한다.
그렇게 확정된 패배를 당하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그래서 그는 도박을 하기로 했고, 그 도박의 판돈을 마련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하기로 했다.
꾸욱-
'포효하는 발톱.'
근육이 폭발하기 위해 압축된다.
그 압축된 근육에 내공이 스며들고 그가 자신하는 초식이 터지려 했다.
근접전에서 그의 육체적 우위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난무(亂舞).
상대의 압박을 걷어내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빗장마저 열어젖히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절초였다.
언뜻 무차별로 휘둘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준 높은 이치가 담긴 절초는 빌리 플로이드의 축복받은 육체적 우위를 통해 200%의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그 또한 한계에 가깝게 육체를 활용해야 했으나 이대로 소모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 절초가 막 폭발하려던 순간이었다.
툭.
'……?'
갑자기 이마를 건드리는 손이 있었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상상도 못한 일이어서 빌리 플로이드는 한 박자 반응이 늦었다.
붕붕.
준비했던 초식이 터져 나오고 그의 긴 팔이 휘적거렸다.
찰나의 순간 초식을 쏟아내야 할 상대가 없다는 걸 깨닫고 멈추긴 했는데 이미 몇 번이고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린 뒤였고, 다음 순간 도진이 한 걸음 밖에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개새끼가아아아아아……!!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은 빌리 플로이드는, 한국어로 바꾼다면 그런 욕을 머릿속으로 포효하듯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 역시 젊은 후기지수.
이런 꼴을 당하자 눈앞이 시뻘개지는 분노에 잠식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꼴이 된 상대를 처리하는 건, 도진에게 있어 1의 경험치밖에 되지 못할 만큼 쉬운 일이었다.
슥-
자세를 잡는다.
백설을 검집으로 되돌리고 땅을 단단히 밟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호쾌한 돌려차기다.
뻐엉-!
빌리 플로이드가 온몸에 둘렀던 내공과 도진이 돌려차기에 담은 내공이 부딪치며 폭발음이 일어나고 그 소리만큼이나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빌리 플로이드가 허공을 날아 비무대 밖을 나뒹굴었다.
쿠당탕!
"……."
"……."
침묵이 내려앉는 실내.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받으며, 도진은 이번엔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실전이었으면 죽었겠네요."
"……."
"무림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저렇게 흥분해서 앞뒤 안 재고 덤벼들어선 안 되죠. 그렇죠?"
"…그래도 이건 좀 심한 처사가."
"힘조절은 했어요."
존앤집스의 직원 중 한 명, 빌리 플로이드에게 제리라 불렸던 사람의 말을 도진은 단번에 끊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소리만 요란했지 별로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정도는 쉽게 조절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도진이 존앤집스로 향했던 시선을 떼고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군가는 시선을 피하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보며 도진이 말했다.
"미리 말하도록 하죠. 내가 톱의 포지션을 맡을 겁니다."
"……!!"
"……!!"
주인공의 자리는 필요없다거나, 굳이 중심을 차지해서 뭐할 거냐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힘이, 도진에게는 있었으니까.
가족들이 보러 올 자리다.
그 힘을 행사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되지 않고 스포트라이트를 제대로 차지하기로 했다.
조금 건방지게. 그리고 싸가지 없게.
"이견이 있어요? 그러면 올라오세요."
또 철저하게.
도진은 그 누구의 도전이든 받아주겠다는 태도로 당당하게 비무대 위에 섰고, 그런 도진의 모습에 누군가가 박수를 쳤으니.
짝짝짝짝!
"크으, 역시 내가 백설을 맡길 만한 친구야!"
바로 식사 후 후기지수들의 비무를 보기 위해 찾아온 우벽진이었다.
박수를 치는 우벽진과 함께 온 명장들을 포함한 장인들을 본 후기지수들이 웅성거렸다.
만약 섭음술이 일상이 된 후기지수들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소란스러웠을 만큼 큰 반응들이었으니 이들의 방문은 예정되어 있던 스케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큰 관심 속에서 우벽진은 도진에 관해 존 스미스에게 자랑했고.
"어떤가. 내 검을 맡아 준 친구가."
'…이거였구먼.'
존 스미스는 쓰린 속을 애써 감추며 생각했다.
그 또한 명장이자 천재였기에 빌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을 멍청하게 왜곡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후기지수는, 우벽진이 선택한 후기지수는 그야말로 사기라고 외쳐야 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저 수준으로 후기지수판에 끼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떻게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이제서야 조금만 건드려도 격렬하게 반응하던 우벽진이 여유롭기 짝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더더욱 속이 쓰려졌다.
무얼 하든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어찌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 결국 패배가 확정되어 버린 것이다.
우벽진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미 이겼다는 마인드다.
남은 건 그 승리가 현실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존 스미스가 뭘 하든 패배한 놈의 뒤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존 스미스의 복장이 뒤집어지려 할 때였다.
스윽-
모두의 관심이 소홀해졌던 무대 위에 누군가가 올라섰다.
도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선 상대에게로 향했고, 눈을 마주한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덴젤 공방의 클로에 덴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