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20화 (320/741)

319화

토요일 오전.

도진은 우서연과 우서진이 포함된 명성공방의 사람들, 그리고 상미와 함께 세계 장인 박람회가 열릴 명성 크리에이티브 타운에 들어섰다.

명성 크리에이티브 타운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 명성공방의 외적 확장을 위해 새롭게 건설된 복합공간으로 이번에 세계 장인 박람회를 치를 공간으로 낙점되며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되었다.

박람회를 위한 최종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을 지나 미팅을 위해 준비된 강당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도착해 얼마 기다리지 않아 속속 각국의 관계자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관계자들이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는 반면 그들과 함께 온 후기지수들은 조금 데면데면한 분위기였다.

그들 중 다수는 공방의 후계자이거나 최소한 나름의 지식이 있는 편이어서인지 도진이나 우서진보다 백설이나 상청에 먼저 시선을 주곤 했다(일부는 상미에게 시선이 향했다).

냉정히 말해 이번 박람회는 4강과 '그 외'로 분류가 되었다.

명장 클래스의 장인이 참석하는 공방이 넷이었기에 명장의 작품이 포함되지 않은 곳들은 프리미엄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 취급을 받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명장의 이름과 작품의 수준은 격이 달랐으니 잘 모르는 외국의 후기지수보다는 무기에 먼저 시선이 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우벽진의 무구에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또 한 팀, 4강 중 한 팀인 일본의 '쿠사나기 공방' 사람들이 도착했다.

'쿠사나기 공방.'

도진은 미리 우서연에게 들었던 정보를 되새겼다.

"쿠사나기 공방은 전통의 강호예요. 역사도 깊고 퀄리티 또한 동방의 장인 정신이란 단어를 알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나죠."

쿠사나기 공방의 작품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명품으로 통한다.

특히 명장의 작품쯤 되면 '대기업 회장님의 검'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쿠사나기 공방의 후기지수는 비쩍 말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에 날카로운 눈동자가 특징인 남학생이었다.

"쿠사나기 이치로. 쿠사나기 공방의 후계자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에요."

쿠사나기 공방은 카자카미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막강한 세력이었으며 그 세력의 후계자인 쿠사나기 이치로의 명성은 카자카미라고 해도 방계였던 히로토보다 위에 있었다.

-히로토는 방계의 낙오자였지. 감히 쿠나사기 이치로한테 댈 수준은 아니었어.

-카자카미를 존중하느라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번에 제대로 일본의 저력을 보여줘라, 이치로!

여기에 저번의 일로 카자카미 가문 때문에 한국에 큰 망신을 당했다 생각하는 일본의 네티즌들은 더욱 카자카미 히로토를 깎아내렸으며 쿠사나기 이치로가 당시의 망신을 만회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받는 쿠사나기 이치로가 도진과 눈이 마주치자 성큼성큼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쿠사나기 이치로입니다.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유창한 한국어였다.

발음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발음을 유창하게 하는 것이 외국어를 잘하는 것으로 직결시키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발음이 좀 좋지 않더라도 '올해 세계 정세에 관하여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보자면'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연히 더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쿠사나기 이치로는 분명히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임을 그 태도와 자신감에서 읽을 수 있었다.

도진은 내민 이치로의 손을 잡아 악수하며 답했다.

"예, 반갑습니다."

"……!"

이번엔 이치로가 살짝 놀란 기색이었으니 도진이 '유창한 일본어'로 답했기 때문이다.

숭무고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도진이다.

이론에서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나지윤에게 1등을 내어 주었지만 근소한 차이였을 만큼 한국을 통틀어서도 탑클래스란 뜻이다.

그 정도로 머리가 트인 도진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택해 공부했고 전생에서 '오타쿠'로서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일본어를 제대로 익힘으로써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잘 부탁합니다."

후기지수의 대표끼리 일본인은 한국어로 인사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로 인사하는 진풍경과 함께 명성공방과 쿠사나기 공방이 인사를 나누었다.

"특유의 마인드 때문인지 쿠사나기 공방은 할아버지를 시기하기보단 자신들이 더욱 연마해 할아버지를 꺾겠다는 경향이 강해요. 그러니까 아군……이라 할 순 없어도 적은 아닐 거예요."

짧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그 기세를 읽은 도진은 앞서 해 준 우서연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꽤 까칠하고 삭막해 보이며 경쟁심을 보이지만 적대적이라고 할 만한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4강 중 한 팀, 한국에서 특히 화제가 되었던 프랑스의 덴젤 공방이 도착했다.

"오……."

후기지수들이 술렁이며 그 시선을 덴젤 공방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이자 명장 안토니오의 수제자인 클로에 덴젤에게로 향했다.

도진 또한 소문이 무성한 그녀를 살폈다.

금발벽안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이국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신비로운 느낌이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커다란 기세가 돋보인다.

특히 그녀가 양팔에 착용한 수투, 아니 건틀렛이 눈에 띄었다.

보통 수투(手套)라고 하면 쉽게 말해 동양식 건틀렛이다.

아예 장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 무림에서 말하는 수투란 무공을 보조하기 위한 무기의 일종이니 동양식 건틀렛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데 그녀가 착용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분명한 서양식 건틀렛이었다.

덧댄 가죽은 물론이요 심지어 쇠로 된 부분까지 거친 사용감이 묻어나 전쟁에서 생환한 베테랑의 물건처럼 보인다.

명장 안토니오가 수양딸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준 물건이라는데 그녀의 분위기까지 더해져 과연 범상치 않다.

허나 그런 도진과 달리 일부 후기지수들은 섭음술로 그녀의 외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와, 진짜 예쁘네."

"그녀를 신붓감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걸 수 있어."

"신이 빚은 인형이라고 하더니 과장이 아니었어."

피식-

그 말을 들은 도진의 입술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웃음이 아니라 얼토당토않다는 감정이 묻어나는 웃음이다.

'인형이라…….'

그래, 그런 수식어가 틀리지 않다고 도진 또한 생각했다.

하지만 도진이 생각하는 건 그들과는 궤가 달랐으니 도진이 가진 신안(神眼)과 그동안 스승들에게 배운 지식으로 그녀의 '내부'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허허…….

-저 아이도 보통은 아니로군요.

도진의 눈에는, 그녀의 '봉제선'이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인형이 아닌 사람인 그녀의 봉제선이 말이다.

그렇게 술렁임이 지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마지막으로 미국의 존앤집스 공방 사람들이 도착했다.

미국을 상징하는 그 압도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옮긴 듯 규모면에서 존앤집스는 비할 데가 없었다.

여기에 퀄리티에서도 기존의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장들에 뒤지지 않았으니 비록 이견이 없진 않으나 그들은 스스로를 1등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업의 측면에서 매출은 1등이었고 말이다.

한데 그런 그들이 저번 경매에서 무명의, 그것도 선진국이라곤 하나 이쪽 업계에선 인지도조차 없다시피했던 한국의 명장에게 패배했으니 명성공방 소속의 우벽진이었다.

그때의 원한 때문인지 칼을 갈고 나온 존앤집스는 4강은 물론이요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비교할 곳이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로 이번 박람회에 참석했다.

부스가 가장 컸으며 내놓은 물품도 최상급인데다 수량도 가장 많았다.

여기에 존앤집스 수석 명장 둘이 비장의 작품을 내놓을 거라는 오피셜에 가까운 소문도 있다.

그런 준비의 연장인지 안에 들어선, 후기지수들의 무대에 관한 협의를 하기 위한 팀마저 인원수와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주인공인양 앞으로 나서는 눈에 띄는 후기지수가 있었으니 블랙 레오파드라 불리는 빌리 플로이드였다.

단연코 눈에 띄는 키와 덩치의 그는 풀숲에 숨어 당장이라도 사냥감을 덮칠 듯 강렬하고도 날렵한 근육을 자랑해 시선을 끌었다.

-호오, 타고난 몸이로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것은 타고난 육체 또한 포함되니 빌리 플로이드는 그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난 축복을 받은 무림인이었다.

'체급'이라는 게 괜히 나뉘는 게 아니듯 무림인 또한 체급은 중요하다.

체급을 극복하는 게 내공이지만 그 내공이 동등하다면 다시 체급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빌리 플로이드는 무제한급이라 할 만한 몸을 타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탄력과 민첩성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무공에 대한 재능까지 타고났으니 그가 미국에서 주목받는 후기지수가 되는 건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맹수의 느긋한 걸음을 닮은 보폭으로 도진의 앞에 섰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된 도진 또한 180에 달하는 키와 완벽에 가까운 근육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앞에 서니 작아 보인다.

단순히 키가 2미터에 달하는 게 아니라 그 큰 키에도 균형이 완벽하게 잡힌 몸이라 외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빌리 플로이드가 도진을 내려다 보고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반가워! 너에 대한 이야기는 꽤 들었어. 마에스트로 우의 작품을 받은 럭키 가이라지?"

그러면서 먼저 손을 내민다.

언뜻 보면 반가움을 표시하는 인사지만 그를 마주하는 도진의 입꼬리는 슬쩍, 날카롭게 올라갔다.

우서진과 상미의 표정 또한 차갑게 굳었으니 거기에 도진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에는 '뉘앙스'라는 게 있다.

심지어 여기에 '너는 운이 좋아 우벽진의 작품을 받은 놈이다'라는 뜻까지 얕은 수작으로 덮었으니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존앤집스는…… 개새끼예요."

어제 들은 우서연의 적나라한 말이 떠오른다.

"그 새끼들 아닌 척하면서 인종차별하거든요. 그날 경매장에서도 진짜 강냉이 털어 버리고 싶은 양키 새끼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도진이 알기로 미국이라고 하면 인종차별에 관해 아주 민감한 나라라고 보았다.

우서연은 그런 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민감하죠. 근데 그러니까 이 새끼들은 더 은근하게 사람을 건든단 말예요. 그래서 더 쥐어 패고 싶었어요."

만약 우벽진이 경매에서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홧병이 났을 거라고 우서연은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도진은 빌리 플로이드를 마주하며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경쟁심이 아니다.

도진을, 명성공방을 업신여기는 마인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화를 내면 오히려 화를 낸 쪽이 이상하게 되도록 그림을 만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도진은, 슬쩍 올라간 입꼬리에 넘실거리는 괴물을 감추며 빌리 플로이드의 내민 손을 잡았다.

꽈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블랙 레오파드가 상체를 신나게 비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