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상미가 모델로 서기로 한 우벽진의 신제품 런칭 스프링 파티는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국제 행사였으니 명성공방 단독 행사가 아니라 1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정기 행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무림인이 있는 곳에는 무기가 따른다.
그에 따라 당연히 관련 업계가 성행했고 여기에 무림인의 특성상 더 좋은 물건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니 그들의 니즈를 충족하는 프리미엄 브랜드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1년에 한 번 모여 국제적인 전시회를 여니 이것이 바로 '세계 장인 박람회'다.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물론이요 '명장'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을 보고 구매할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전시회로 이름이 높았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아쉽게도, 이 전시회에서 한국은 그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공산품'이라는 카테고리 내에서는 그나마 쓸만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것도 가성비 측면에서였고 '명품'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데 거기서 돌연 '세계 1위'를 먹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명장 우벽진이었다.
그 명장 우벽진이 미국의 경매장에서 사상 최고가를 경신한 눈 시리즈를 뛰어넘었음을 자부하며 새로운 시리즈를 런칭하겠다 예고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온갖 기사가 도배될 만한 일이 터졌으니 세계 장인 박람회의 한국 개최가 확정된 것이다.
본래 우벽진은 신제품 런칭 행사를 단독으로 진행하려 했으며 그 장소로 한국을 택했다.
굳이 멀리까지 안 나가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무려 세계 장인 박람회의 개최지까지 한국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시기가 겹치는 것도 있고 전 세계에서 '슈퍼 루키'인 명장 우벽진의 다음 시리즈에 대한 기대가 크니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동안 개최된 적이 없던 한국에서 한 번 해보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난리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당연히 기사가 쏟아지며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허미 ㄷㄷㄷㄷ WAC 한국 개최 실화냐?ㅋㅋㅋㅋㅋ
-우 명장이 그냥 한국에서 자기 제품 런칭하려니까 위원회가 호다닥 탑승해 버렸다고 함ㄷㄷㄷㄷㄷ
-우 명장 파급력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ㄷㄷㄷ
-이제부터 우 명장님을 우느님으로 부르는 걸 허용하겠습니다.
우벽진은 명장이란 이름을 얻었으나 그 타이틀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명장의 이름을 얻은 사람은 몇 있어도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으니 대중의 관심도가 낮기도 했고 불행한 일로 두문불출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명성공방에 합류하며 눈 시리즈로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주인공과 주인공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대립하던 빌런이 퓨전하여 무쌍을 찍듯 무서운 '떡상'을 하며 대번에 그 명성이 치솟았다.
여기에 우벽진에 의해 세계 장인 박람회까지 한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더해지며 또 한 번 그 이름이 회자된 것이다.
그 명성은 명성공방의 후계자이자 우벽진의 후계자이기도 한 우서진의 배경이 무려 숭무고에서도 탑급의 배경으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동시에 그런 명성공방, 우벽진, 그리고 우서진과 친밀한 도진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우느님이랑 우서진이 김도진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인맥 초떡상이네;
-우서진은 특히 잠룡 빠돌이로 유명함ㅋㅋㅋ
-빠돌이라니 어감이 좀 그렇다;;; 도진교 광신도로 정정하자.
-아니 근데 김도진이 가진 게 눈 시리즈의 원전 같은 거라며. 이거도 나중에 미친듯이 떡상하는 거 아니냐?
-ㅇㅇ 이미 떡상 확정이지 ㅋㅋㅋ 눈 시리즈 원전인 것만 해도 미친듯한 가치인데 우벽진 명장의 복귀작이란 것까지 상징성 자체가 장난이 아님.
-거기다 잠룡이 이대로 잘 크기만 하면 잠룡이 썼던 검이라는 상징성까지 추가됨ㅋㅋㅋㅋ
-ㅋㅋㅋ 와 미쳤네 ㅋㅋㅋ 나중에 가면 레알 빌딩값 아니냐? 그것도 서울, 아니 뉴욕 빌딩값일듯ㅋㅋㅋㅋ
-다른 건 모르겠고 잠룡이 나중에 잘 커서 휘두르면 데미지가 레알루다 빌딩에 쳐맞는 수준은 될 듯 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
-외국인들 반응 가져옴ㅋㅋㅋ
집중되는 화제는 자연스레 중국이나 일본을 넘어 서양의 자극적인 반응까지 가져올 정도였고 이런 뜨거운 관심을 도진과 상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미가 우벽진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의에 그토록 부담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그 모델 일과 관련하여 우서연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참가하는 많은 공방에서 신제품 모델로 후기지수들을 내세웠습니다."
"음, 드문 일이네요?"
일반적으로 세계 장인 박람회에서 활동하는 모델들은 무림인이었다.
모델이 필요치 않은 라인에서는 그저 제품 설명과 소개를 위한 일반인의 비중이 높았으나 명품 라인 정도 되면 전문 모델로 일하는 무림인이 모델로서 그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로 이 모델들은 전문적으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니 도진의 말대로 후기지수를 내세우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행사가 아닌 세계 장인 박람회의 무대에 말이다.
도진의 말에 우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드문 일입니다. 그리고 이 드문 일이 일어난 건 그들 공방에서 우리 공방을, 할아버지를 그만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냉정히 말해 한국은 명장들의 세계에서 결코 주류에 들 수 없을 만큼 그 수준이 부족한 나라였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이름 있는 공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명장을 육성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 또한 갖추어지지 않았다.
네티즌들이 가져온 중국이나 일본의 반응 중 '한국에 뒤쳐지다니 일본 끝난 거 아닌?www' 같은 게 단순한 과장만은 아닐 정도로 말이다.
한데 그런 나라에서 돌연 우벽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장인이 튀어나왔으니 기존의 주류를 형성하던, 그것도 한 분야의 장인이라 불리던 자들이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는가.
그런 장인들이 이번에 우벽진이 신제품 런칭 행사에서 대표가 되는 작품의 모델로 '자국의 후기지수', 그것도 손자가 포함된 후기지수들을 낙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중심이 될 제품의 모델을 후계자와 후기지수들로 내세웠다 이거네요."
"예. 그렇습니다."
애들 자존심 싸움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본래 예술가이자 한 분야의 대가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런 성격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합동 무대'로 이어졌다.
"그동안의 전통대로 이번에도 각 공방의 명품 라인 제품들의 런웨이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한데 이번엔 단순한 런웨이가 아닌, 단체 비무의 형태로 진행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통과되었습니다."
세계 장인 박람회에는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명품 라인의 제품들은 특별 무대에서 런웨이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이번엔 단순히 런웨이로 하지 말고 아예 단체 비무로 제품들을 뽐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단체 비무요?"
"예. 실제로 비무를 하는 건 아니고 약속된 형태로 무대를 보여주는 형태에 가깝습니다."
전문 모델이 아닌 후기지수를 기용한 이상 무대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걸 피할 수는 없다.
세계 장인 박람회의 진행 위원회는 그 부분을 해결하기를 원했고 명장들은 자신이 우벽진보다 낫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나온 해법이 바로 단체 비무였다.
"아무래도 명장의 작품을 들게 되면 후기지수라 해도 무기에 억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인이 좋은 무기를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무기는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도구가 주체가 되어 버리고 만다.
결코 좋지 않은 일.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선 '정답'이 될 수 있으니 사람이 아닌 작품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세계 장인 박람회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런 그림이 되더라도, 어쨌든 자신의 작품을 든 후계자와 후기지수가 더 돋보이길 바라는 게 당연할 것이고 또한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작품을 든 후기지수를 밟고 올라서길 바라겠죠."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서열 정리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우서연의 말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합동 비무의 비중 자체는 고르게 배정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비중이 고르다고 해서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법이죠."
하려고 한다면 모두가 주인공이 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서연이 맹호추라 불리던 시절의 우벽진을 닮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 주인공을 가리기 위한 싸움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 * * *
우벽진의 신제품 런칭 파티가, 세계 장인 박람회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달여의 시간은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세계 장인 박람회 정도 되는 행사가 되면 한 달은 준비 시간으로 결코 긴 시간이 될 수 없었다.
하물며 모델로서의 역할까지 부여받은 상미에게는 더더욱 짧은 시간이었으니 상미는 그 준비를 하기 위해 집행부 활동도 당분간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 빠진 만큼 더 열심히 할게요, 선배."
"그래. 우리 잘 나가는 후배님들이 바쁜 만큼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니까!"
그리고 거기에 도진 또한 포함되었으니 다른 게 아니라 도진도 명성공방의 후기지수 모델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런칭 파티에는 그때 이후 추가로 제작한 눈 시리즈의 작품들 또한 포함되어 있어. 그러니 자네 또한 함께 해주면 좋겠는데……."
우벽진이 은근한, 그러나 결코 거부하지 말아달라는 눈빛으로 도진에게 한 말이었다.
장인들의 자존심 싸움 이야기 때 아닌 척하던 그였으나 사실은 무지하게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겁하게도 치트키를 쓰기로 했다.
갑작스런 그 부탁에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미의 수락했으면 좋겠다는 뜻이 그득히 담긴 시선도 시선이었고 도진 또한 '관종'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관심을 받는 것.
전생에서부터 도진은 그것이 좋았다.
다만 그럴 수 없었기에 점점 더 소극적이 되고 내성적이 되었던 것인데 이번 생에선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 모델로서 세계적인 무대에 선다는 것 또한 부담보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수락할 수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집행부 활동에서 당분간 빠지게 된 도진은 자유를 빼앗긴 도비를 연기하는 한유아에게 티켓이 담긴 고급스런 디자인의 봉투 하나를 건넸다.
"뭐야, 이건?"
"세계 장인 박람회 VIP 초대권이요. 뇌물입니다."
"오, 후배. 문주가 되더니 사회 생활이 좀 늘은 것 같아?"
한유아는 '뇌물'에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기색이었는데, 그래서 도진은 조금 의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유아'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금화의 영애.
당연히 도진의 초대권이 아니더라도 VIP를 넘어 VVIP로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의 초대권을 반기는 기색이었으니 의문이었다.
"와, 뭐야. 선배 것만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너희 것도 있지."
한유아에 이어 도진은 친구들에게도 초대권을 나누어 주었다.
워낙 크게 열리는 행사였기에 초대권도 여러 장을 받았다.
집행부의 친구들은 물론이요 소담과 암산서가의 사람들, 그리고 이은지에게까지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누어 주면 딱 네 장이 남는데, 이 네 장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족들이 다 모인 저녁 식사 자리.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국제 무대 모델로 서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