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세 번째 시작.
도진은 앞서의 경험을 토대로 돌아오자마자 천마기부터 일으켰다.
두웅-
괜한 소란과 시선을 방지하기 위해 기세가 새어나가지 않는 것까지 고려한 도진은 대번에 퍼져 나가는 중인 독을 전방위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큭.'
연신극기공의 수련으로 단련된 도진마저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이 독과 천마기가 만나는 혈도에서 연신 튀어오른다.
'…비효율적이야.'
독은 은근하면서도 밀도가 높고 끈질기다.
혈도에 달라붙어 몸에 스며들려는 성질이 있다.
그것을 거칠게 날뛰는 성격이 강한 천마기로 제압하고 몰아내려니 오히려 그 여력으로 인해 도진의 혈도에 가해지는 자극이 더 컸던 것이다.
상성도 좋지 않고 효율까지 나쁘다.
도진은 방법을 바꾸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고 이내 천마기가 아닌, 천마군림을 시전하고 그로 인해 연결된 외부의 순수한 자연지기를 이용해 보았다.
'음…….'
효과가 있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 온 끊이지 않는 자연지기는 끈질기게 달라붙던 독을 느리기는 하나 밀어낼 수 있었다.
천마기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상성에서 자연지기가 독에 우위를 가진 덕분이었다.
비록 외부로 배출하거나 몸속에서 태우는 방법은 몰라 시도할 수 없었으나 한곳으로 몰아낼 수는 있을 듯했다.
문제는.
띠링-!
[타임 오버. 세이브 포인트에서 재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러는 사이 일이 다 끝나 버렸다는 것이다.
도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한 번에 끝내지 못했다는 걸로 실망할 만큼 도진은 '잘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하나둘씩, 조금씩 개선해 나가며 이윽고 클리어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타입이었기에 오히려 더욱 의지를 불태웠다.
'다시 해보자.'
일단 퍼지던 독을 한곳에 모으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 방법이었던, 천마기가 아닌 천마군림을 통하여 연결된 외부의 자연지기를 이용하는 수법에 익숙해짐으로써 시간을 단축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도진은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띠링-!
[타임 오버. 세이브 포인트에서 재시작합니다.]
이후로는 독을 다 모으기는커녕 절반도 진행하지 못한 시점에서 타임 오버 메시지를 보아야만 했다.
처음엔 예외로 기다려 주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얄짤없다는 뜻이었다.
'이게 아닌가?'
수없이 반복하다보면 결국 시간 내에 가능해질 것 같기는 했다.
깨달음을 얻으면 예상보다 훨씬 그 시점이 빨라질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막연한 방식으로 될 때까지 하염없이 반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닐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때문에 도진은 우선 한 번 더 재시작할 각오로 몸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했고, 놓치고 있던 요소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독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거였어.'
먹었던 음식물에 섞여 있던, '뭉쳐있던 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미 몸으로 흡수된 독이었으니 이것들이 몸을 마취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뭉쳐있던 독의 역할은 이미 마취되어 버린 몸에 작용하여 잠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력한 수면독만이 아니라 이미 몸에 흡수되어 버린 '마취독'도 해결해야만 했다.
도진은 여기서 한 번 막히고 말았다.
퍼지는 독을 시간 내에 막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이미 몸에 작용하고 있는, 흡수가 되어 버린 독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만약 전생의 도진이었다면 여기서 아무런 답도 내지 못하고 '0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생의 도진은 달랐다.
어떻게든 답을 찾기 위해 밑바닥부터 모든 것을 검토해 나갔고 이내 답으로 보이는 것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천마기의 운용은 굳이 단전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돼.'
도진이 배운 천마심공은 무조건적으로 단전에서부터 운용을 시작하는 내공심법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육체 그 자체가 단전이요, 더 나아가 단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위지혁이 개량한 천마심공이었다.
때문에 천마심공은 낮은 단계에서부터 여타의 무인들이 가지게 되는, '단전'이라는 개념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내공의 운용을 꼭 단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경지가 부족한 도진은 아직 가장 많은 내공이 깃들고 중심이 되는 게 단전이지만 그래도 몸 전체에 천마기가 퍼져 있고 그렇게 퍼져 있는 곳 중 필요한 임의의 위치에서부터 심법의 운용도 가능했다.
그리고 도진은, 얼마 전 솜이의 환골탈태를 도우며 얻은 깨달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해보자.'
두웅-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온 도진은 천마군림을 시전하는 대신 몸속의 천마기를 일깨웠다.
그리고 단전에서부터 천마기를 운용하는 대신, 온몸의 천마기를 동시에 움직여 혈도를 내달리게 만들었다.
제어를 느슨하게 풀자 천마기가 답답함을 해소하겠다는 듯 온몸을 내달렸고, 그것은 곧 몸을 잠식하고 있던 독기를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되는구나.'
그리하여 독에 잠식되어 잃었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쿵!
"커허어억!"
"도, 독이다!!"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 피를 토하고 고함치는 소리 등이 들려온다.
마치 OFF에 맞춰 두었던 소리와 감각을 다시 ON으로 돌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것으로 채움으로써 독을 밀어낸다.'
지금껏 피상적으로 천마기를 이용하여 독을 밀어내려고만 했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 천마기를 온몸에 가득 채움으로써 스며들어 들어차 있던 독을 천마기 스스로 밀어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퍼지고 있던 수면독만이 아니라 이미 스며들어 있던 마취독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솜이의 환골탈태를 도우며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전신 세맥까지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온몸을 빠짐없이 천마기가 순환하도록 의도할 수 있었고 마취독과 수면독을 한곳으로 몰아내 천마기로 감쌀 수도 있었다.
'됐다……!'
게임 오버 되지 않았고 타임 오버 되지도 않았다.
드디어, 도진은 독을 이겨내고 비로소 사건에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어날 시간이로구나, 제자야.
'……어?'
지금껏 존재를 감추고 있던 스승의 말과 함께, 도진은 강제로 '로그아웃'을 당해야 했다.
* * * *
깜빡.
"냐아앙?"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과 함께 솜이의 폭신한 감촉이 현실을 알렸다.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솜이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확인했고 이내 로그아웃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전 4시 13분.
기상해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심상세계는 당사자의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간을 가속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무한정이 아니다.
결국 시간은 흐르는 법이고 도진이 독을 이겨내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13분이나 기상이 늦었다.
-나머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이어서 하자꾸나, 제자야.
-예, 스승님.
스승의 말에 따라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 갈까, 솜이야."
"냐아앙!"
당장 가자고 대답하며 솜이가 도진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도진은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사람들이 수련터로 사용하는 산에 올랐다.
쉽게 말해 '동네 약수터' 같은 곳으로, 진지하게 수련하는 무인들은 사용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단련하는 동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다 보니 이용자가 두어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산한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외부에서 티가 나지 않게 연신극기공을 곁들여 수련하고 솜이가 넘치는 기운을 배출할 수 있도록 어울려 주는 등의 '간단한' 수련을 했다.
-독하다, 독해. 연신극기공을 하면서 표정 하나 안 변한단 말이지.
-살수를 해도 잘 했을 것 같습니다.
-인내심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동기와 목표, 보상이 확실하니 더욱 극대화된 것 같습니다.
두 스승은 여느 때처럼 도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둘이서만 제자의 수련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련을 하고 잠시 쉬는 사이 도진이 휴대폰을 보니 연락이 두 개 와 있었다.
-뭐해, 후배!
-잘 주무셨어요, 선배?
하나는 유지은, 하나는 약리지였다.
도진은 적당히 아침 수련 중이라고 답장을 해 주었다.
-대련하지 않을래?
-와, 진짜 부지런하시네요, 선배.
그리고 몇 번 이어지는 문답을 슬슬 마무리하기 위해 도진이 마지막으로 답을 했다.
-오늘은 따로 해야 할 수련 때문에 안 될 것 같아요. 아마 내일까지 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주말 동안 수련 좀 열심히 할 것 같아. 너도 주말 실습 파이팅.
특별한 수련을 하다 말았다.
본격적으로 진행하려던 게임을 학교에 가야 해서 못하게 된 그런 느낌이다.
때문에 도진은 해야 할 일들만 끝내고 다시 수련을 계속할 예정이었고 유지은과 약리지는 그런 도진의 답장에 알겠다는 답장만을 남겼다.
무인의 수련을 방해해선 안 되는 법이었으니까.
대화를 끝낸 도진은 마저 수련을 하고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오전 6시.
부모님과 동생의 연호신공 수련을 봐주고 샤워 후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아버지의 회사가 비수기라 가능했던 가족이 모두 함께 하는 아침 식사였다.
반대로 이은지는 일하는 곳의 물류창고 물량이 갑자기 늘어 연장 근무를 한다고 연락이 왔었다.
"다녀오세요, 아버지."
"다녀오세요!"
"그래. 다녀올게."
아버지 김서우는 출근을 하고 어머니 서정원은 서재로 향한다.
회사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서정원은 요즘 들어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단순히 고생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계발과 함께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한 어머니의 모습에 도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너희는 오늘 뭐 해?"
그리고 외출 준비 중인 동생들에게 물으니 릴리와 윌리엄을 만나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오늘 한국 오나 보구나."
"응."
유진이와 호진이는 릴리, 윌리엄과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매일 만날 수는 없었으니 릴리와 윌리엄의 본가가 영국에 있기 때문이다.
한데 요즘 들어 올리버 후작이 근래 중점을 두어 진행하고 있는 일로 인해 자주 한국에 오게 되면서 아이들이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그래, 잘 놀다 와."
"응!"
그렇게 동생들까지 보내고 도진은 어머니에게 수련 때문에 저녁까지 방에서 안 나올 거라 미리 말씀을 드린 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냐아아앙."
솜이가 꼬리로 탁탁치며 이른 시간부터 누워서 되겠냐는 듯 불만스레 울었다.
"미안, 미안. 수련 때문에 그런 거니까 좀 봐주라. 대신 저녁에 많이 놀아줄게."
"냐아앙."
어쩔 수 없다는 듯 불만스런 얼굴로, 그러나 떠나지 않고 도진의 곁에 솜이는 식빵을 굽는 자세로 앉았다.
내단의 기운을 다루는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런 솜이를 쓰다듬어 준 뒤 도진은 다시 눈을 감았다.
현령, 천마신교, 거기에 공주님까지.
어쩔 수 없이 잠시 중단해야 했던, 특별한 수련의 스토리를 확인하기 위해.
도진은 심상세계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