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한산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로 객잔은 부산스럽다.
낡았지만 관리가 잘 돼 반들반들한 테이블과 불편한 나무 의자.
현대와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그러나 낯설지만은 않은 상상 속 무협의 세상.
도진은 오감을 통해 느껴지는 그 '질감'에 대박을 친 VR 게임 '무림열전'을 떠올렸다.
무림열전. 지금 이 시기에는 아직 초대박을 터뜨리지 못했지만 전생에서는 국내의 게임 회사를 세계구급 게임 회사로 만들어 준 AAA급 대작 시리즈다.
VR로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주변 기기를 포함하여 프로모션을 진행하였음에도 60만원이 필요했기에 전생의 도진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때문에 모니터 너머 PC 게임으로 즐겨야 했고 VR 플레이는 너튜버들이 올린 동영상으로만 감상했었는데…….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그때의 영상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반쯤은 장난으로 무림열전에서 사용하던, 포브스 선정 이세계로 날아가거나 게임 속으로 다이브했을 때 무조건 외쳐야 하는(거짓말) 그 단어.
상태창을 읊조려 봤으나 반응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도진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스승들이 자신의 심상세계에 개입하여 '연출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심상세계였기에 도진은 그것을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뒤이어 이곳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것들이 수련이 될 거라는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척하면 척.
전생에서 방구석폐인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던 도진이었으니 이런 흐름에서 헤맬 이유가 없었다.
제자의 그런 면을 스승인 위지혁과 장호는 심상세계에서 지내며 잘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자신들을 숨겨 도진이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하여 게임 속에 정말로 다이브한 느낌으로 도진은 기본 중의 기본, 주변의 파악을 시작했다.
'음.'
굳이 이 시점에, 이 자리에 앉은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감각을 펼치고 꼼꼼히 주변을 살핀 도진은 우선 한 가지 특기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단체 손님이 오나보네.'
이 객잔은 1층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고 제법 넓다.
그리고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2층은 중앙이 뻥 뚫려 있고 가장자리를 두르며 복도가 있는 구조다.
그러니까 1층은 식당, 2층부터는 방이 있는데 바로 그 1층의 중앙이 통째로 예약이 잡힌 듯 세팅이 된 채 비어 있었다.
그 외, 외곽에 몇몇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다.
물론 도진 또한 외곽에 있었는데 계단 아래라 특히 시선을 끌지 않는 조금 어두운 자리다.
그리고 주방.
주방에서 직원들이 정말로 열나게 요리를 하는 기척과 소리가 들린다.
언뜻언뜻 들리는 말을 통해 단체 손님이 꽤나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각이 나왔다. 이건 '단체 손님 오면서 사건 무조건 터집니다'하고 예고하는 정보들이다.
여기에 결코 엑스트라로 볼 수 없는 인물이 셋.
커다란 모자가 달린 피풍의(披風衣)로 모습을 완전히 감춘 여자가 혼자 앉은 테이블.
그리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분위기가 결코 범상치 않은 어려 보이는 여자와 그 여자의 호위로 보이는 중년의 딱딱한 분위기의 남성이 앉은 테이블.
이 두 테이블을 주시해야 할 것 같다.
어쩐지 정말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 도진이 씨익 웃는데 그 순간 직원, 그러니까 점소이가 다가와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 놓았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대협."
큼직한 고기가 고명으로 얹혀진 국수, 그리고 고기와 야채를 같이 볶은 제육볶음 같은 게 나왔다.
도진은 '이런 거 주문한 적 없는데' 같은 아마추어 같은 소리를 하는 대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어 보았다.
후르륵.
뜨끈한 국물 한 모금.
그리고 면발에 큼직한 고기를 함께 씹었다.
'오.'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맛'이 분명하게 느껴졌으니 위지혁, 혹은 장호의 기억과 경험이 전해진 것이었다.
도진의 심상세계에 좀 더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의 심상이 전해져 모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본래 한계가 있는 자각몽에 현실감이 더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디테일적인 면에서 현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으니 '음식 본연의 맛'이 아닌 '스승들이 경험한 맛'이 느껴진다는,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다른 감각이었다.
그렇게 도진이 평범한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을 체험을 하는 사이 사건의 중심이 될 '단체 손님'이 도착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나리!"
점소이가 아니라 객잔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직접 달려가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댄다.
그 인사를 받는 건 쥐수염의 간사해 보이는 남자로 이 마을의 관리인 듯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인이 열심히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음.'
단순하게 관리를 대접한다고 보기엔 너무 과한 자세다.
관리가 무언가 어떤 것을 해 주었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한 자리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주방에서 줄줄이 나와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지는 음식들은 말 그대로 단순히 식사일 것이고 '진짜'는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질 터.
'장 스승님께 배운 걸 활용해야 하는 건가?'
음식을 먹으며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언가 뒷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대놓고 광고를 하고 있으니 이들의 뒤를 파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까지 생각했던 도진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생각이 멈췄다.
'……뭐야.'
꿈뻑꿈뻑.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잠기운이 쏟아졌다.
심상세계이기에 육체의 제한이 없는 지금 도진은 현실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하며 그것은 이렇게 수련을 위해 장소와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도진은 무언가에 의해 버틸 수 없을 만큼의 잠기운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독?'
다급히 천마기를 일으켜 저항하며 도진은 자신의 몸속에 본래는 없었던 '다른 요소'가 침투해 있음을 파악해냈다.
독(毒).
경악스럽게도 도진은 독에 당한 것이었다.
아니,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니 엄밀하게는 독이라 하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이 독에 당했느냐 하는 것이었고 도진은 곧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음식이다.'
음식에 섞여 있던, 몸속에서 소화되면서 섞이지 않으면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특수한 독에 서서히 중독된 것이었다.
솜이를 도와주며 얻은, '관조'에 관한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은밀하고도 수준 높은 독이었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를 통해 컴컴해져가는 시야에 어느새 사람들이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경악스럽게도, 감각이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는 걸 그것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도대체 누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도진은 이내 저항할 수 없는 수마(睡魔)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띠링-!
[게임 오버. 세이브 포인트에서 재시작합니다.]
* * * *
'헛!'
다음 순간.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뜬 것 같은데 마치 몇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것 같은 감각과 함께 도진이 눈을 떴다.
소리를 지르거나 벌떡 일어나는 대신 도진은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고, 이내 '단체 손님'들을 관찰하던 시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여기가 세이브 포인트인가.'
배경은 무협이고 하는 건 수련인데 그 틀은 게임이라는 아주 하이브리드한 상황이다.
사족이지만, 그 안내 메시지의 목소리는 서소담이었다.
도진은 스승님들이 현대에 아주 많이 적응하고 물들어 있다는 걸 새삼 느끼며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음식을 먹을 만큼 먹은 뒤였다.
낙장불입인 상태에서 시작하라는 스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겨낼 수 있는 독이라는 거겠지.'
방금 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사실은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독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독에 관해선 배운 바가 없었지.'
과거 무림도 그렇지만 사실 현대에서도 독은 경계해야 할 무서운 수단이었다.
오히려 현대이기에 독은 더더욱 무섭고도 은밀하다.
접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그것을 접하는 순간이 몇 배나 무서워진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은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으음.'
눈을 감고 스스로의 몸을 관조해 본다.
이미 소화되며 섞인 독은 몸속을 은밀하게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마취독처럼 은밀하게 몸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이내 졸음이 쏟아지게 만든다.
목숨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마취하듯 재우는 것을 목적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니 그 성질 더러운 천마기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나 도진이 의지를 일으킨 순간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 격렬하게 일어나 독을 찢어발기려 한다.
'크윽.'
도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독의 저항이 끈질겼다.
범상치 않은 독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넘어 독의 은근하고 질긴 성질은 천마기마저 묵묵히 감내하며 버텼던 것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천마기는 더욱 격렬하게 내부에서 몰아쳤고 그것이 내부를 울려 도진의 통증이 되었다.
마치 한덩이로 연결된 채 뻗어나가는 무언가처럼 독은 몸을 잠식해 나가고 단전에 깃들어 있던 천마기가 반발하여 거세게 영역을 확장하려 드는 독을 두드리는 형국이다.
성과는 지지부진하고 고통만 계속되는 대치였지만 그 덕분에 도진은 어떻게든 잠들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는 도진의 귀에, 어느새 사건은 터지고 그에 동반되는 고함들이 들려왔다.
"네 이년! 감히 현령의 친족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현령의 친족을 죽이는 건 무사할 수 없는 일이고, 민초의 가족을 죽이는 건 무사할 수 있는 일이더랍니까?"
"뭐, 뭣이라?!"
한이 서린 목소리가 둔탁해진 감각마저 뚫고 들어온다.
극도로 좁아지고 명도가 낮아진 시야에 피를 토하고 엎어진 자들로 가득한 중앙의 테이블이 보인다.
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예의 피풍의로 자신을 감추고 있던 여자와, 본래는 없던 무장한 병사들을 뒤에 둔 남자가 대치하고 있다.
덜컥.
결코 눈을 뗄 수 없을 상황임에도 순간 끊긴 정신에 고개가 푹 꺾였다 다시 들렸다.
그 반복 속에서 언쟁이 격화되고 이내 무기가 뽑히는 가운데, 중년의 범상치 않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천마신교의 교리는, 저 여자가 아닌 너희를 천벌을 받아야 할 자들로 규정하고 있느니라."
'뭐…… 라고?'
천마신교.
도진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남자를 좀 더 관찰하려 했으나 도통 제대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온힘을 다해 독에 저항하고 있으나 또 한 번 실패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허나 도진은 바로 포기하는 대신 최대한의 경험과 정보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사이 또 하나의 대사를 들을 수 있었다.
"황실에 대한 그 발언,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공주님!"
'공주?'
앳되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기세를 담은 목소리가 먹먹해진 귀를 파고들었다.
"현령!"
"천마신교!"
"공주님!"
'허허.'
혼란하다, 혼란해.
마치 오늘만 보고 연재하는 아마추어 작가가 생각나는 대로 다 때려 넣은 무협 소설의 한 토막에 섞여든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진은 탁자에 고개를 박았다.
띠링-!
[게임 오버. 세이브 포인트에서 재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