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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08화 (308/741)

307화

약리지와 남사현이 인연을 맺은 계기는 널리 알려진 대로 어릴 적의 일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현실'을 알아가며 고뇌하던 약리지를 남사현이 쿡 찔러 버렸고 거기에 폭발하여 또래를 '두들겨 팬' 것이 그날의 사건이자 둘이 소꿉친구가 될 수 있었던 계기였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약리지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약리지가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발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폭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게 만든 것이 바로 남사현이었다.

약리지가 또래를 두들겨 패게 만든 것은 사실 사소한 것이었다.

아버지와의 간극으로 인한 고민을 또래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또래가 그녀의 일생일대의 고민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왜 못 해?'라는 뉘앙스로 답했던 것이다.

'끓는점'에 이미 가까워 있었기에 사소한 계기로 그것이 끓는점에 도달해 버렸고 또래를 두들겨 팬다는 실수를 하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해 남사현이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힘든 일.

오히려 그런 말에 또래를 두들겨 팬 약리지가 혼나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남사현은 그런 약리지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고자질하지 않았다.

-제가 무언가 기분 상하게 할 말을 한 거 같아요. 미안해, 리지야.

-…….

오히려 그녀에게 먼저 사과했다.

약리지는 천성이 착한 아이였으며 넓고 깊게 사고할 수 있는 천재이기도 했다.

양보와 양해. 그리고 여러가지들.

그날의 일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깊이 고민했고 친구가 된 남사현의 영향이 더해져 지금의 그녀가 되었다.

남사현의 무리와 함께 어울리며 그와 친구들, 그리고 그녀 스스로의 경험과 사고방식이 그녀가 폭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몇 겹이나 되는 잠금장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잠금장치들이, 드디어 기능을 하지 못한 날이 왔다.

"너, 다시 말해 봐!"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다시 말해 달라고 그래요? 어설픈 멘트치다 컷 당해서 부끄럽다고 막말하면 안 된다고요."

"이이익!!"

'와.'

-아주 후벼파는구나.

-그러게요.

어느새 현장에 스며들어 소란을 지켜보던 도진이 스승과 함께 감탄했다.

상대를 쏘아붙이는 약리지의 언변은 전생에서 상대를 '학살하던' 만만좌를 연상케 했다.

마치 공개적인 장소에서 은밀한 생각을 기록했던 일기장을 큰소리로 읽어 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소름마저 돋을 정도다.

"선배. 선배. 진정하세요."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중간에서 말리는 남사현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 '만만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다.

위지혁의 말대로였다.

남사현은 '너무 맑은 물'이었다.

그런 남사현이 소꿉친구였던 것이 약리지에겐 오히려 독이 되었다.

성향만을 보면, 오히려 남사현이 의선의 후계자여야 했다.

약리지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기에 남사현을 계속 보아 온 약리지는 남사현이 아님에도 '남사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느라 조금씩 어긋나고 말았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살기 위해 억지로 머물려 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진화하여 적응하지 않고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 없었고 그 탈이 난 모습이 바로 전생의 만만좌.

배출하거나 식기 전에 계속되는 자극에 화가 쌓이고 그 화로 인해 언제나 뜨거운 속.

그로 인해 상해 버린 속과 낮아진 끓는점이 특정 자극에 격렬히 반응하게 된 것이 전생의 만만좌가 된 약리지다.

'A급 답'만을 제출하려다 오히려 더 낮은 점수를 받아 버리고 만 약리지.

그런 전생의 실패를, 왁왁 소리치며 싸우는 현생의 약리지는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되는 것을 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찾는다.

청소년이기에 할 수 있는 '풀이 방법'이었으며 천재인 약리지는 그 풀이를 통하여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긋날 일은, 아마 없을 거라 도진은 믿었다.

약리지는 천성이 착한 아이였으니까.

이번 일이야 '사소한 것으로 환자와 싸운 것'으로 잘못이 없다 할 수 없겠지만 이미 말했듯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미숙함은 나이를 먹으며 계속되는 경험 속에서 원숙함이 될 것이고 천성이 착한 아이이니 사소한 것으로 욱하여 싸우는 일도 화를 해소한 뒤로는 없게 될 터.

그러니까 실습을 거치고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된 약리지는, 이런 경험들을 양분 삼아 분명히 좋은 의사가 될 것이다.

십인십색.

'의선 약지후'와 같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사현이랑도 이제서야 제대로 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약리지가 두르고 있던 벽이란, 사실은 타인의 접근을 막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었다.

'남사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 스스로를 압박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이 벽을 만들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알고 인정하며 스스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지킨다.

남사현의 친구들도 사실은 그랬다.

남사현이 좋은 사람임을 알고 인정하여 그 무리에 끼었고 비슷한 성향을 띠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남사현인 건 아니었다.

약리지는 그렇지 못했기에 소꿉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남사현, 그리고 무리의 친구들과 분명한 선을 두었던 것이다.

전생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분명했던 그 선을 이번엔 지울 수 있을 거라 도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남사현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었다.

말했듯 남사현은 좋은 사람이다.

그냥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사 같은 녀석이었다.

다만 세상이 그렇듯 하나의 답이 모든 상황에서 답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불행하게도 그 답이 오답이 되는 케이스에 약리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좋게 풀린 듯해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도진을 지켜보던 위지혁과 장호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시야에 만족한 것이었다.

무릇 지존이란 그렇게 넓고 깊게, 그리고 포용력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천마신교의 지존이란 패(覇)와 도(道)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에 더더욱.

줏대 없이 어느 쪽도 옳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용(中庸)이 깃든 시야를 가져야 하는데 도진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음, 그럼.'

생각이 정리되자 도진은 주위를 슬슬 둘러 보았다.

어찌되었든 이 싸움을 끝내긴 해야 했다.

더 오래 가고 격화되어선 나쁜 일이 되어 버릴 것이었으니까.

허나 굳이 도진이 나설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미 더 지켜봐선 안 되겠다 생각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폐쇄된 공간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선임 담당자까지 있는 공간이었으니 이곳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나선 것이다.

"자, 그만하세요. 여기는 병원입니다."

"더 이상의 소란은 안됩니다."

상급자의 개입에 약리지는 작지만 당차게 자기 주장을 하던 입술을 다물었다.

당분간 이불과 침대가 남아나지 않을 끔찍한 일을 겪었던 권오현 또한 어쩔 수 없이 몸부림을 멈췄다.

멈췄지만, 결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이글거리던 그는.

'……?'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인파 사이에 섞여 있던 도진과 눈이 맞았다.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결코 도진이 무언가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수치심에 시선을 한군데 두지 못하던 권오현이 정말로 우연찮게 도진과 시선이 맞았던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저승사자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어.'

맹세컨대 도진은 권오현을 압박하지 않았다.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깊은 상처가 될 흑역사를 남기고 만 권오현의 처지에 동정하여 옅게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덜덜덜.

하지만 권오현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님들 그거 아셈? 숭무고에서 나쁜짓 하면 잠룡이 잡아감ㅋㅋㅋㅋㅋㅋ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농담 댓글이 농담이 아니게 된 것으로 여겨졌고 몸이 덜덜 떨렸다.

-녀석. 살인미소로구나.

-아, 스승님.

위지혁의 농담에 도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 *

사건은 그래도 좋게 마무리되었다.

-감염 소견이 있으니 피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약리지는 처음 발단이 되었던 그 소견을 그대로 올렸고 자신이 맞았음을 검사 결과를 통해 증명했다.

2학년이 되면 실제 날붙이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데, 그로 인해 대련 등에서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잦았다.

중요한 건 여기서 그 날붙이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관리되지 않은 무기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 여러가지 좋지 않은 감염이 추가로 발생하는 것이다.

권오현은 검사 후 결과에 결국 약리지에게 사과했고 약리지는 그 사과를 쿨하게 받아 주었다.

비록 흑역사는 남았지만 권오현 또한 답이 없는 수준의 양아치는 아니었기에 사과를 함으로써(절대로 도진이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좋게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 사건이 있었던 금요일이 지나 토요일을 앞둔 새벽.

솜이의 기질 검사 결과 또한 좋게 나와 걱정없이 도진은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치칭-!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는 도진을 상대하는 건 다름 아닌 천마 위지혁이다.

또래를 종이인형처럼 날려 버리는 검격이 심상세계이기에 가능한 기의 소용돌이마저 휘감고 폭풍처럼 쏟아지지만 그것을 받아내는 위지혁은 여유롭기만 하다.

마치 의도된 듯 단 하나의 검격도 피하지 않고 맞부딪쳐주고 있는데, 어느 한 순간 도진이 특이하게도 위지혁의 검 중심을 자신의 검 끄트머리로 부딪쳤다.

팃-

분명히 격렬한 기세로 부딪쳤는데 신기하게도 무게가 없는 것처럼 작은 소리와 함께 위지혁의 검이 도진의 검을 타고 주욱 미끄러졌다.

위지혁의 검에 담긴 힘이 기울어, 그러니까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진 또한 검을 주욱 뻗어 위지혁에게 쏘아냈고.

"훌륭하구나, 제자야."

다음 순간 도진의 목에 위지혁의 검이 먼저 닿아 있었다.

도진은 끄응, 하고선 검을 거두었다.

이 수련은 중심과 균형에 관한 기술, 그러니까 '기(技)'의 수련이었다.

힘을 구사하는 존재에게는 분명히 '중심'이란 것이 있다.

그 중심을 파악하고 균형을 깨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이번 수련의 목적이었다.

도진은 대련 상대가 되어 준 위지혁의 중심과 균형을 찾기 위해 수련 내내 극한까지 집중하였고 이내 한 번, 중심을 찾고 균형을 깨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비록 위지혁이 보여주고 의도한 것이라고는 해도, 바로 그 천마 위지혁이 의도한 바를 깨달았으니 자랑해도 좋을 일이었다.

한바탕 수련을 끝낸 휴식 시간.

위지혁은 제자를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법 무림인 태를 갖추게 되었구나."

"아하하. 그런가요."

"그래. 당장 무림에 출도해도 어디가서 삼류 소리는 듣지 않을 게다."

지금껏 도진이 매진해 온 것은 심(心)과 체(體)였다.

심(心).

힘(力)이 아닌 길(道)를 걷고 이치를 추구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니까 무도(武道)가 아닌 구도(求道)의 길을 걸었다는 소리다.

도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 위지혁의 천마신공을 익히면서도 '일반 무인'들과는 달랐던 이유.

그리고 심상세계와 무공을 배운 시간이 지극히 짧았던 실제 육체 사이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연신극기공에 매진한 것이 체(體).

그러니까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 기(技)가 빠져 있었다.

이것은 모두 위지혁과 장호의 의도였다.

이상적이되 느리지 않게 도진을 성장시키기 위해 두 절대지경의 무인이 준비했던 플랜.

우선은 영혼을 깨달음의 영역으로 이끌고 육체로 받친다.

그 과정에서 기술은 조금 서툴러도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르고 여유가 생기자 이제 기,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유는, 다름 아닌 도진이 천마심공의 5성 앞에 서 있기에 생긴 여유였다.

"아느냐, 제자야."

위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는 재능충이란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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