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안녕하세요."
"어, 안녕."
"어서 와."
아침. 집행부실에 들어와 활기차게 인사하는 약리지를 선배와 동기들이 맞이해 주었다.
그 광경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말로 하기엔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던 거리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리지가 좀 달라진 거 같아. 그렇지?"
"그러게. 무슨 일 있었나 봐."
커플임을 과시하듯 찰싹 붙어 앉은 오대용과 주정아는 달라진 약리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이런 식의 '변화'는 높은 경지를 목표로 매진하는 무림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그렇게까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무공이란 정신적인 발전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한 깨달음이 사람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한민국 무림의 미래라고까지 불리는 숭무고임에야.
오대용과 주정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식의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약리지가 달라진 이유라 생각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다만.
"……."
끄덕.
"……."
끄덕.
3학년의 유지은과 2학년의 서소담은 물론이요 심지어 1학년의 윤상미까지 세 사람은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 깨달음의 이유가 도진이라는 걸 무공을 넘어선 어떤 직감으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선배."
"그래. 안녕."
살갑게 도진에게 인사하는 약리지.
그 살가운 태도에 무언가, '어떤 직감'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조금 더 살가운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다.
도진은 그것을 그리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약리지는 분명히 '도끼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두 사람 좀 친해 보이네?"
그런 약리지와, 약리지를 은밀하게 지켜보는 '봉'들의 시선을 모두 꿰뚫고 있던 금봉 한유아가 씨익 웃으며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듯 직구를 날려 버린다.
유지은과 서소담, 윤상미는 흠칫했지만 정작 약리지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선배한테 상담을 했거든요. 그걸 계기로 좀 친해졌죠."
남사현과 어울리며 쌓은 눈부신 인싸력이 느껴지는 대답이다.
한유아는 흐응, 하고 그렇구나 말했다.
짧은 문답이 끝자자 약리지의 시선이 다시 도진에게로 향했다.
"아, 선배."
"응?"
"삼촌한테 연락 받으셨어요?"
약리지의 삼촌이란 다름 아닌 약정후다.
의선약가의 실력 있는 젊은 의사이자 기질 검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고수.
도진은 약리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오늘 검사 결과지 수령하러 오라고 연락 왔어."
사람이 아닌 동물. 그것도 그냥 동물이 아니라 영물의 기질 검사였기에 예상보다 하루 더 걸렸다는 안내와 함께 검사 결과지를 수령하러 오면 된다는 연락을 어제 받았다.
개인의 일이 아니라 거창하게 말하면 정부까지 얽혀 있는 일이었기에 바로 수령하러 가는 대신 오늘 생안부의 최 과장과 시간을 맞춰 함께 방문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집행부 활동을 끝내고 여유롭게 오후 6시로 잡았다.
도진의 입장에서야 금요일인 오늘 집행부 활동까지 다 끝내고 본가로 가는 길에 들러 수령하면 되는 일이라 나쁠 게 없는 시간이었다.
최 과장의 경우도 어차피 할 '추가 근무' 시간이었고 그 전에 본래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면 되니 나쁠 게 없었고 약정후 역시 금요일이다 보니 야간 진료까지 봐야 해서 합의된 시간.
"아, 그러시구나. 그럼 선배. 저 태워 주시면 안 돼요?"
"응, 괜찮아."
여기에 약리지가 함께 가길 원해 도진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리지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곳이 집이었으니 어차피 가는 길 후배 한 명 태워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병원으로 가 볼게요."
"응, 수고."
"수고해."
점심을 먹고 티타임까지 즐긴 뒤 약리지는 병원으로 향했다.
자청해서 실습 시간 외에도 병원에 골몰하던 때와 달리 요즘 여유를 가지며 생기가 느껴지는 약리지였다.
"후배."
"네, 선배."
"요즘 리지 인기 엄청 많은 거 알아?"
그런 리지에 관해,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한유아가 흘긋 웃으며 말했다.
도진은 여상스레 그 말을 받았다.
"오, 그래요?"
"응. 이미지 변신이 엄청 남자애들에게 꽂혔는지 고백하겠다고 벼르는 애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야."
"헤에, 재밌겠네요. 그러고 보면 상미 너도 꽤 고백 많이 받지 않았어?"
별 의미도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선 화제를 상미에게로 돌린다.
그 모습에 왜인지 흐뭇한 얼굴로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거절했지만요."
"아, 유명하지."
주정아는 다 안다는 얼굴로 히히 웃는다.
상미에게 고백했다가 마음이 꺾여 버린 남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이슈에 제법 민감한 주정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오늘 있을 '빅 이벤트'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아! 그 이야기 들었어?"
"뭐?"
"오늘 리지한테 누가 고백한다던데?"
* * * *
그날 늦은 오후.
교내의 병원을 찾아간 도진은.
"괜히 작업 멘트치다 안 되니까 급발진하셔 놓고 이렇게 소란까지 부리면, 나중에 이불 찰 걸요, 선배."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만만좌'의 포스를 풍기는 약리지를 보게 되었다.
* * * *
본래 교내의 병원에서 실습을 하는, 가운을 걸친 약리지는 유독 경직되어 있었다.
긴장조차 하지 않고 일절 흠잡을 데 없는 치료를 하던 모습이 아니라 분위기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듯이.
그런 태도가 약리지에게서 타인이 벽을 느끼도록 만들었고 쉽사리 다가갈 수 없게 만든 것이었는데…….
"고생하셨습니다."
"고, 고마워."
그런 벽이 사라진 약리지는 과연 순백의 천사에 다름 아니었다.
희고 고운 손으로 붕대를 감아주는 약리지의 모습에 취해 있던 숭무영재고 2학년 남학생이 멍한 눈과 붉어진 얼굴로 인사하며 떠나간다.
그런 학생들이 연달아 오가고 이내 무언가 특별한 결심을 한 얼굴의 2학년 남학생이 마주 앉았다.
특기할 만한 건, 그 남학생에게는 환자가 아닌 일행들 몇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깊게 베이셨네요."
"어. 대련하다가."
깊은 눈동자로 환부를 확인하는 약리지를, 남학생은 빤히 응시했다.
올려 묶은 머리카락.
그로 인해 드러난 희고 고운 목덜미.
그리고 워낙 새하얘 드러나는, 감정을 뒤흔드는 핏줄까지.
남학생은 혼을 빼앗긴 듯한 감정에 생각했다.
'이 감정! 틀림없는 사랑이다!'
권오현. 숭무영재고 2학년.
숭무영재고 학생들은 숭무고 학생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예외였다.
실력이 부족해 숭무고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배경만큼은 숭무고에서도 통할 만큼 대단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때에 거침없이 '나랑 사귀자!'라고 외쳐볼 법도 하지만, 그는 급발진하지 않았다.
'부담을 주면 안 되지.'
고백을 하긴 할 건데 급발진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기회를 보았고 곧 각이 보였다.
"피 검사를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는 그 각을 놓치지 않았다.
"오, 왜? 혹시 내 정보가 궁금한 거야?"
…썩은 멘트였다.
약리지는 그 썩은 멘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뇨. 감염 가능성이 있어서 검사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권오현은 그런 약리지의 태도에 무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이어지는 단추를 아주 나쁜 방향으로 꿰고 말았다.
"좀 이상한데. 겨우 베인 상처인데 피 검사를 왜 해? 혹시 의선약가는 그런 걸로도 생체 정보를 얻을 수 있나?"
명백히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권오현은 말을 한 순간 아차 싶었지만 물리지 않았다.
여기서 물리고 우물쭈물하는 건 하책이다.
차라리 이걸로 어떤 식이든 인연을 만들고 사과를 하든 어쩌든 만남을 이어가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좀 변했다지만 약리지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는 의사'였다.
벽을 치지만 그만큼 환자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싸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잠시 텀을 두고 미안하다, 실수했다 사과하며 그 사과의 뜻으로 밥 한 번 사겠다 말하자는 계획이 착착 세워졌다.
그런 계획이.
"무지한 생각으로 모욕을 주는 건 죄가 될 수 있어요, 선배님."
약리지의 거침없는 지적에 날아가 버렸다.
"뭐, 뭐?"
권오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약리지는 개의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피 검사로 무슨 유의미한 생체 정보를 얻는다는 거예요. 그것도 의선약가에서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학교 내에서 시스템의 감시 하에 이뤄지는 검사로요."
"……."
피 검사로 '의학적인' 정보는 무궁무진하게 얻을 수 있지만 '무림적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더더욱, 그런 쪽을 철저하게 관리하니 애초에 그런 쪽의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우리 의선약가에 대한 크나큰 결례이자 모욕이에요. 사과하세요."
"……."
분위기가 싸해졌다.
권오현의 고백을 구경하러 온 학생들은 물론이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흘끔, 시선을 주었다.
개인 진료실도 아니고 실습생과 환자들, 선임 의료진들까지 있는 개방된 장소에서의 일이었으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권오현은 욱하고 올라온 감정을 내뱉었다.
"하! 듣자듣자 하니까. 아니, 내가 좀 걱정돼서 그런 말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거 가지고 지금 협박하냐, 너?"
"협박이 아니라 선배의 말도 안 되는 모욕을 오히려 차분하게 지적한 거죠."
"아니 근데 이게"
드르륵!
"야야!!"
"왜 그래, 임마!"
벌떡 몸을 일으키는 권오현을 지켜보던 일행이 말린다.
동시에 새로운 인물이 난입했는데 다름 아닌 남사현이었다.
"왜 그러세요, 선배."
남사현은 친구가 대련 중 다쳐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함께 방문했고 그러다 우연히 이 사건을 보게 돼 개입한 것이다.
인싸답게 그는 권오현과도 친분이 있었다.
"아니, 저게……!"
말리니 더 흥분해서 뭐라뭐라 소리친다.
남사현은 그것을 들어주며 약리지에게 시선을 향했다.
'왜 그래, 리지야.'
그 시선을, 약리지는 몇 번이고 보았었다.
그래,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남사현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약리지의 머릿속에 꽤 깊게 남았다.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간극'에 고민할 때.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그저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남사현은 그렇게 말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좋은 쪽으로 해결하자.
내가 더 양보하고, 내가 더 양해해서 '좋게' 끝내는 게 낫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함으로써 일은 좋게, 깔끔하게 끝맺을 수 있다.
소란없이 그렇게 봉합한 일들이 약리지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았다.
이게 잘 끝낸 것이고 좋은 게 좋은 건 맞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아 답답했었다.
나만 제외하고 다 좋게 끝나는 것이니 이게 맞는 거고 그저 내가 모자란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아니야.'
누군가의 조언 덕분에 그게 정답이되 정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약리지는 남사현의 시선 너머에 있는 권오현을 보며 참지 않고 말했다.
"괜히 작업 멘트치다 안 되니까 급발진하셔 놓고 이렇게 소란까지 부리면, 나중에 이불 찰 걸요, 선배."
권오현이 망치로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어 입을 쩌억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