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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06화 (306/741)

305화

약리지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정통으로 꽂혀 버린 흑역사킥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를 뻔한 걸 생각만으로 억누르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런 자신의 초인적인 육체 통제력에 감사했다.

"왜 그래, 리지야?"

"아, 아니에요. 선배."

마주한 선배는, 그러니까 도진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직을 서며 지새웠던 새벽 내내 괴로워했던 흑역사의 환영이 만들어낸 환청이었던 것이다.

만약 소리내어 비명을 내질렀다면 약리지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또 한 번 괴로워해야 했을 테니 스스로에게 무한한 감사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무수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번뇌하는 약리지의 모습에 먼저 와 있던 남사현이 물었다.

"피곤해, 리지야?"

"아, 아니, 아니야. 괜찮아."

"피곤하면 잠시 눈 붙이고 수업 들어가."

"그래, 고마워."

소꿉친구의 배려에 약리지는 인사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도진은 그런 약리지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신경쓰지 마.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런 장난도 좀 칠 수 있는 거지. 그런 거 가지고 어색해하면 진짜 남 같잖아.

전음을 쓰지 못하는 약리지는 살짝 흠칫했지만 이내 거기에 담긴 도진의 배려에 번뇌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그런 것이다.

그 나이대에는 흑역사 한둘쯤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거나 불행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런 흑역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지옥문이 열려 튀어나온 아귀마냥 물어뜯는 일은 거의 없다.

약리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약리지는 오히려 흑역사라 하기에도 함량 미달이다.

술이 들어갔고 속이 상했던 게 풀리면서 조금 들떠 한 '술주정' 같은 걸 두고두고 놀릴 이유가 없다.

하물며 그것이 같은 또래도 아니고 사실은 나이를 두 배는 더 먹은 만큼 배려심이 있는 도진이었으니 더더욱.

그리고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만 도진이 '정말로 평범한 선배'였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내 커플이 되는, 흑역사가 아니라 썸이 되는 계기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약리지는 그렇게까지 깊이 알거나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흑역사가 어떤 두뇌를 풀가동하던 연예인의, 밈이 되어 버리기까지 해 수많은 사람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던 '눈물 셀카'와 달리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큼은 알게 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평범하게 도진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중간고사라는 큰 고비 하나가 지나갔다.

* * * *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간고사가 지나 있었다.

여러가지 말은 나와도 숭무고와 숭무영재고는 어쨌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이었고 그만큼 중간고사는 불이 붙은 폭풍과 같았다.

그 뜨거운 폭풍이 지나간 뒤, 하얗게 불태웠던 학생들이 학교의 익명 게시판에서 잡담을 나누며 여유시간을 즐기는 건 그리 흠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개중 특히, 유독 타올랐던 건 숭무영재고 학생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입장 제한이 걸렸으며 익명까지 보장되는 자유게시판이었다.

-아, 시발. 문제 왤케 어려움;; 70점이 점수냐?;;

-? 70점이면 상위 15% 아님?

-십새키가 기만하네.

숭무영재고는 숭무고와 커리큘럼, 그리고 장소를 공유한다.

숭무영재고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숭무영재고의 학생은 지극히 희소한 일부를 제외하고선 상위 10%내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당연히 게시판에서는 그런 상위 10%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2학년 이론 1등은 나지윤이더라.

-올백 시발.. 그게 사람이냐 진짜 ㅋㅋㅋㅋ

-하지만 통합 1등은 잠룡이죠.

-어일잠(어차피 일등은 잠룡이라는 뜻ㅎ)

-ㅎ이 존나 킹받네 ㅋㅋㅋ

-상식이 있다면 그 선배는 순위에서 일단 제외하고 시작해야 됨.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다. 자연재해지.

-ㄹㅇㅋㅋㅋ 같은 학년인 사람들은 존나 억울할듯.

-하필 재수도 없게 걔랑 대련 시험 잡힌 애 있더라 ㅋㅋㅋㅋ 표정 시발 ㅋㅋㅋㅋㅋㅋ

-나라가 식민지가 돼도 그런 표정은 안나올듯ㅋㅋㅋㅋㅋ

중간고사의 상위권은 예상대로였다.

도진이 이론과 실기에서 학년 1등을 차지함으로써 전교 1등 기록을 이어나갔다.

다만 이론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지윤이 올백으로 도진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함으로써 이슈를 만들어냈다.

-문주야, 잘생겼어, 공부도 잘해, 무공도 빠지지 않아. 나지윤 선배 1등 신랑감...♡♡♡♡♡♡♡

-어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곳은 한블럭 아래다.

-거긴 여자애들 방인데.

-? 알면서 왜 여기 왔냐.

-남자애들 방이 없어서.

-으아악 미친색기다;;

도진이 포함된 42기는 여러모로 43기 신입생들에게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취급받고 있었다.

도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말하는 잠룡 패밀리, 집행부의 멤버들이 1년간 워낙 여러 이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번에 새로 집행부원이 된 43기 멤버들이 더해진다.

-우리 동기들도 사실 한 대단함 함ㅎㅎ;

-ㅇㅇ 곤충좌가 있지. 엣헴.

-곤충좌 ㅋㅋㅋㅋ 시발 예의상 이런 자리에선 황룡이라 불러줘라 ㅋㅋㅋ

근래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 역시 황룡 벽태웅이다.

한국 최초로 나타난 영물, 마물 사건에 도진과 함께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그 사연이 알려짐으로써 43기 중에선 대중에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서진쟝을 빼놓지 말라능...

-;;; 십새캬 말투;;

물론 다른 후기지수들도 유명하다.

우서진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 우벽진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데다 그 외모 때문에 남녀 가리지 않고, 아니 오히려 여자 동기들에게 더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재밌게도 인싸 중 인싸인 남사현이 상대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남자 신입생들의 관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빙봉 윤상미와 약봉 약리지다.

미모와 실력을 두루 갖춘 여자 동기에게 또래의 남학생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우주의 섭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 관심은 보답받지 못했다.

-윤상미는 안 돼.

-시바류ㅠㅠㅠㅠㅠ...

관문 시험에서부터 제대로 눈도장을 찍고 기레기에서 사이버 렉카로 암흑진화를 한 악질에 의해 홍역까지 치렀던 윤상미는, 당연하게도 학기초부터 엄청난 대시를 받았다.

또래 학생들은 숭무고는 물론이요 숭무영재고에 입학한 인재들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고백할 만큼의 자신감과 패기를 갖추었다는 말이니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조리 참패했다.

-고백하고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잃었다.

-포브스 선정 영혼을 가장 잘 꺾는 여자..

윤상미는 익힌 무공이나 이미지와 달리 봄바람 같은 동기였다.

겉으로는 차갑지만 사실은 사근사근했고 다른 동기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게 모르게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으니 더더욱 남자 동기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하지만.

-미안. 받아줄 수 없어.

고백만큼은 예외였다.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심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하지만 확실하게 거절을 했는데…….

-나는 내가 콩벌레인 줄 알았어.

-혹시 나는 집먼지진드기이고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정신차려 색기들아;;

그 고백을 거절하는 '분위기'가 문제였다.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

자격을 논하기 그 이전의, 무어라 표현조차 못할 만큼 함량 미달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태도가 그들의 자신감을 꺾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이유를 곧 찾을 수 있었다.

-상미랑 사귀는 법 : 잠룡보다 대단하고 잘난 채로 상미에게 잠룡 이상으로 인상적인 무언가를 해 줘야 함;;

-십새키들아 할 수 있는 방법을 달라고;;

이미 그들은 관문 시험에서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중에도 오직, 오롯이 도진에게만 향해 있던 시선과 표정을.

그리고 중간고사까지 함께 하며 은근히도 아니고 대놓고 드러내던 도진에 대한 생각과 태도까지.

그것은 그야말로 '도진교 광신도'에 다름 아니었다.

날뛰진 않았다. 설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으니 완전히 도진으로 꽉 차 버렸음에도 잔잔한 그 수면 아래가 두려운 것이다.

남자 동기들은 그래서 윤상미를 포기했다.

이는 숭무영재고만이 아니라 숭무고의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마저 다르지 않았으니 어찌어찌 수작을 부리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윤상미의 무공의 근원은 김도진과 닿아 있다.

그리고 윤상미를 도진이 아낀다는 건 예의 사건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윤상미를 건드리면 도진이 잡으러 온다.

인생을 곱지 않게 마감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시도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 그래서 난 고백하는 게 더 좋음..

-???;;;

-이게 몬소리지?;;

-내가 지금까지 다섯 번 고백했는데, 고백할 때마다 점점 더 나를 하찮게 봐주는 게 너무 좋아....하아하아..

-으아아악 미친씹놈이다;;;

……그래서.

아주 특이한 취향의 누군가를 제외한 그들의 시선은 약리지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의선약가의 직계. 약봉 약리지.

새하얀 가운을 걸친 모습을 특히 자주 보이는 그녀는 또래의 마음을 훔치기에 차고 넘치는 예쁜 소녀였지만 사실 초기에는 다가가지 못할 어떤 '벽'이 있었다.

-남사현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엄청 인싸인 줄 알았는데 좀 느낌이 달랐음.

-ㅇㅇ 존나 거 뭐냐. 분명히 친절한데 겁나 벽이 느껴졌음.

사실 약리지는 '남자의 착각'을 거의 확정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다름 아닌 교내에 있는 병원의 실습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이지만 나고 자란 곳이 의선약가였기에 그녀에게는 누구에게 견주어도 바래지 않을 만큼 훌륭한 프로 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주로 외상 때문에 병원을 방문하는 숭무영재고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실습에 임하는 약리지의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누가 되었든, 어떤 상처이든 거리낌없이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니 그 손길에 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으응.. 눈나..

-나는 2학년이지만 그래도 눈나..

안 그래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상황.

한데 보이진 않지만 너무 명확했던 벽 때문에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좀 달라졌다.

-요즘 약리지한테서 벽이 사라진 거 같음;;

-어, 그거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구나..

-너두? 나두!

약리지가 두르고 있던 벽이 사라진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이었으면 착각이었을 텐데 그들은 곧 그것이 혼자가 아닌 모두의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벽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사람을 거절하고 차단하는 느낌이 사라지고, 그것은 곧 혹시 열심히 도끼질하면 통하는 건 아닐까하는 기대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나 내일 병원가서 약리지한테 고백해본다.

바로 그것을 실행하겠다는 용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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