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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05화 (305/741)

304화

약리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약리지가 생각하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의선약가의 본가에서 의사를 꿈꾸며 자랐던 약리지였다.

당연히 아주 많은 것을 알았고 아주 많은 것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소리 지르는 아주머니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그래서 꾸욱 참을 뿐 나서지 못했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생각이 많았고 그 생각이 끊을 수 없는 올가미가 되어 그녀를 묶었던 것이다.

한데 그녀의 곁에 있던 선배는 달랐다.

그동안 익히 들어왔던 대로, 잠룡이라 불리는 최고의 후기지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란에 개입했고 거침없이 발언했으며 상황을 잠재웠다.

그녀가 외쳤다면, 제아무리 크게 외쳤다 해도 아주머니에게 닿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 되어 퍼져 나가기만 할 뿐, 닿아야 할 곳에는 닿지 못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소란을 더하기만 했을 텐데.

그녀의 선배가 발한 담담한 목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파고드는 묵직함을 담아 아주머니에게 닿았고 오롯이 아주머니만을 뒤흔들었다.

그 발언은 장황하지 않았고 복잡하지 않았으며 고답성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그저 해야 할 것을, 올바른 것을 담아 간결했으며 그것은 약리지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 한 마디로 아주머니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야 할 부분을 지적했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진이 나서게 만든 진짜 이유.

아주머니가 일으킨 소란으로 인해 그 아들이 마음 고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그녀를 몇 배나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도 나서서 죄송하다고 말함으로써 마무리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 그녀로서는 도진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저 참거나 감내하지 않고 지적해야 할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깔끔하게 매듭지었으니 마치 그녀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정작 당사자인 도진은 완전히 부정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구요?"

"응.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선배의 말에 약리지가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무엇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도진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지적한 것을 모르셨을까?"

"……."

"아니지. 다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소리친 건, 그러지 않고선 버틸 수 없을 만큼 속이 탔기 때문이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근데 난 그걸 굳이 지적했어. 지적해서, 잘못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말았지. 그럼 이건 정말로."

도진의 눈이 약리지의 깊게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잘한 걸까?"

"……."

마치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절벽이 무너지듯 들이밀어졌다.

도진은 그러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 일을 또 자책하실지 모르지. 아이는 여전히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할 거야. 그럼, 난 무엇을 해결한 걸까?"

"……."

약리지의 입술이 힘겹게, 조금 떼어졌다 이내 다시 닫혔다.

분명히 정답이라 생각했던 것이 불합리한 어떤 것으로 인해 오답으로 뒤바뀐 것만 같았다.

마치 버려진 채 비맞은 강아지처럼 파르르 떨리는 약리지의 어깨를 보며, 도진은 갑자기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은 말야, 본능적으로 정답을 알게 돼."

아래로 떨어졌던 약리지의 시선이 다시 도진과 맞닿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선배의 얼굴과 목소리에 약리지가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너도 그랬을 거야. 그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아주 많은 정답이 떠올랐을 거야."

"그런데, 분명히 정답이어야 하는 것들이 이상하게도 정답이 아니게 되는 상황이었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넌 답을 찾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했을 거야."

도저히 설명되지 않던 것이 신기하게도 설명되는 기분을 느끼며 약리지가 점점 빠져들었다.

"원래 그래. 단순하게 보면 정답인데, 세상이란 건 막상 실제 상황이 되면 기출변형이랍시고 꼬고 또 꼬아 버리잖아? 그래서 정답이 정답이 아니게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약리지는 마치 진리를 구하는 것처럼 묻는다.

거기에 도진은 간단히 대답해 버렸다.

"답을 찾을 수밖에 없지."

"……네?"

도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나라고 무적 초인이라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

도대체 그게 뭐냐는 얼굴이다.

도진이 피식 웃었다.

"A급 답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해."

"오늘 낮에 그건 분명 정답이 없는 일일 거야. 생각하면 할수록 꼬이기만 하는 문제에 어떤 답도 적어낼 수 없을지 몰라. 하지만, 그래선 결국 0점이잖아. 그러니까 생각나는 최선이라도 적어내는 거지."

그것은,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약리지는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소란을 빠르게 잠재우긴 했고 의료진 분들의 고생을 줄이기는 했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까지 더 아프게 됐을지 모를 아이의 미래도 막았겠지. 그럼 이건, 적어도 A급은 아니어도 B급 답은 되지 않았을까?"

"아……."

무언가, 무언가 말로 할 순 없지만, 어쩐지 그토록 헤맸던 답의 끝자락을 본 것만 같은 느낌에 약리지는 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했다.

"결국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 생각해. 시행착오를 겪고, 문제를 풀고 또 풀고 그러면서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A급 답을 대번에 내고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도진이 약리지를 보며 말을 맺었다.

"너도, 조금은 어깨에서 힘을 빼도 된다고 생각해."

"……."

마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그것을 덜어준 것만 같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려운 말도 아니었고 환심을 사기 위해 입발린 말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진이 해 준 것은 그런 공허하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의 고민을 다 알고 있으면서, 그 무게를 이해하고 공감한 감정을 담아 해 준 말인 것 같았기에 그녀는 술 기운까지 더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흐르고 만 것이었다.

"선배."

"응?"

"혹시 저랑 결혼해서 저 내조해 주지 않으실래요?"

"풉."

* * * *

'아, 아니! 요즘 애들은!'

도진은 약리지에게 뿜을 뻔한 술을 내려 놓으며 속으로만 버럭했다.

틀……에 박힌 투덜거림을 흩고 술과 함께 뿜을 뻔한 틀니를 집어넣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 그런 건 좀 신중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도진의 말에 약리지가 꺄하하, 웃었다.

"선배 당황하시는 거 저 처음봐요. 농담이에요."

'으음. 요즘 애들은 이랬지…….'

아니, 어쩌면 내가 원래는 찐따였어서 인싸식 농담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진은 허허, 웃었다.

"그렇구나. 선배가 그런 농담은 들은 적이 없어서 오해할 뻔 했네."

"응, 그래도 반쯤은 진담인데요. 그럴까, 라고 하셨으면 혼인신고서 내러 갈 수도 있었는데."

"……."

얘가 이런 이미지였나 싶은 도진이었다.

어쩐지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약리지는 그렇게 홀가분한 얼굴로 도진에게 잽을 날리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게?"

"아뇨. 저 오늘 당직이라서 병원으로 가야 돼요."

"와, 너한테도 당직을 시켜?"

"혼자하는 건 아니구요. 어쨌든 당직 같은 것에도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그래. 바래다 줄까?"

"네!"

일어나는 모습이 비틀거리는 게 좀 위태로워 보여서 말하니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계산해 주세요."

"잘먹었습니다아. 선배."

"오냐."

계산을 한 뒤 휘청이는 약리지를 데리고 학교로 향했다.

차를 가져오는 게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릇처럼 경공 연습을 하며 달려오느라 슈킨팍시를 가져오지 않았다.

음주 운전의 문제도 없는 것이 경지에 이른 도진은 얼마든지 취기를 외부로, 완벽하게 배출할 수 있었으니 괜찮았는데 말이다.

"아. 선배랑 같이 걸으니까 좋네요."

"선배. 업어주면 안 돼요?"

"떽. 외간 남자한테 업어달라고 하는 거 아냐."

"우우. 꼰대."

결국 약리지와 함께 밤길을 함께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아. 도착했다."

"그래. 일단 기숙사 가서 좀 씻고, 술기운도 좀 빼내고 들어가."

"네. 오늘 감사합니다, 선배."

꾸벅.

깊이 인사하고 기숙사로 향하는 약리지는 몇 번이고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약리지에게 장단을 맞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 뒤 몸을 돌렸다.

'이게 선배의 귀감이지.'

그리고 자화자찬을 해 본다.

전생에선 닿을 수 없었던 인물 중 한 명.

약리지의 선배가 되어 조언을 해 준 경험은 과연 조금 들뜨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피식 웃으며 도진은 솜이가 기다릴 집으로 향했다.

* * * *

그리고 잠시 뒤 기숙사.

"아."

기숙사 안에 들어선 약리지는 들뜬 기분으로 샤워를 하기 전 술기운을 배출하고선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술기운이 더해졌던, 이성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었던 홀가분함이 바로 그 술기운과 함께 날아갔다.

동시에 오늘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화아악!!

스스로가 했던, 자신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언행들이 떠올라 수치사 해 버릴 것만 같은 감정이 폭발했다.

'꺄아아아아악!!'

몸을 돌려 이불에 다이빙한다.

그리고 미친듯이 베개와 이불을 퍽퍽퍽 쳐댔다.

퍽퍽퍽퍽퍽!!

최고급 매트리스와 이불, 베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폭발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내용물이 비산했을 것이었다.

이 나이에 기록해 버린 흑역사.

결코 잊혀지지 않을 흑역사가, 무림인으로서 단련된 머리에 너무나 선명하게 새겨지고 말았다.

'미쳤나 봐! 미쳤나 봐!!!'

퍽! 퍽! 퍽! 퍽! 퍽!

내일부터 선배를 어떻게 봐야 하지?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지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간 번뇌가 미친듯이 머리를 헤집었지만 떠오르는 건 그저 선배의 얼굴과 그 말이다.

'정답이 없는 일.'

이런 걸 전문 용어로 '노답'이라고 했던가.

별의별 시답잖은 생각마저 떠오르고.

이어서 바로 그 선배에게 오늘 배웠던 것도 떠오른다.

'A급 답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선, 결국 0점밖에 맞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B급 답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꺄아아아악!'

그녀 또한 천재였지만, 아무래도 이런 부분만큼은 배웠다고 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약리지는 그저 지킬 수 있을지 모를 금주를 다짐하며 베개를 두드렸고.

퍽퍽퍽퍽퍽!!

그날, 베개는 -99999의 대미지를 입고 폐기처분되었다.

* * * *

그리고 월요일.

약리지는 사형 선고를 받으러 가는 기분으로 집행부실에 들어섰고 도진을 마주하게 됐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

일생일대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인사하는 약리지의 모습에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 안녕. 좀 있다 혼인신고서 내러 갈 거지?"

'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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