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약리지가 가졌던 꿈은.
기억하는 가장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의사였다.
의선약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의가의 풍경을 접하며 살아왔고 그것이 너무나 좋은 것이었기에, 약리지는 자연스럽게 의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원장님 덕분에 우리 아이가 나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원장님.
신의(神醫)를 넘어 의선(醫仙)이라고까지 불리며 아버지는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그런 아버지에게 사람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을 전했고 아버지는 그런 감사의 말에 멋있게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 현대에 접어들던 시기.
약지후는 무림 르네상스 시절부터 신의라 불렸으며 이내 의선이라고까지 칭송받았고 그런 의선에 의해 의선약가는 눈부실 정도로 이름과 함께 세를 넓혀 나갔다.
동화와 같은 이야기, 그리고 동화가 아닌 현실임에도 소설 같은 본가의 풍경은 어린 약리지에게 환상보다 아름다운 현실을 보게 해 주었다.
재능에 축복받았던 약리지가 그런 현실에 더더욱 즐겁게 꿈을 위해 매진했으니 압도적인 성취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현실에까지 스며들었던 단꿈에 쓴맛이 스며든 건, 천재였던 약리지가 '진짜 현실'을 볼 수 있게 된 열 살 무렵이었다.
-요즘 들어 소송이 많아졌군요.
'소송?'
-예. 무림병 환자가 늘어난 게 원인이네요.
-치료를 할 수 있는데 고의로 미뤘다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씁쓸한 이야기네요.
'무슨 이야기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현실을 모르는 약리지에겐 알 수 없는, 한국말이지만 암호와 같은 이야기였기에.
'그래서' 약리지는 모르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진짜 현실을 알게 되었다.
-원장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금 더 빨리 할 수는 없었던 건가요? 왜 우리 아이가 이렇게까지 아픈 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건가요?
아버지에게 따지듯 묻는 보호자.
아버지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치료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약리지의 또래 아이는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 아이의 보호자는.
아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은 채 싸늘하게 몸을 돌렸었다.
약리지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의 약리지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이해해 주어야 하는 일이란다, 리지야.
-이해요?
-그래. 만약 내가 너무너무 아프다면 너는 많이 슬프겠지?
-……응.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얼굴이 된 약리지를 토닥여주며 아버지는 말했다.
-그런 아버지를 치료해 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너무너무 바빠서 일을 미룬다면 너도 어쩌면 화가 날 수도 있지 않겠니.
그건 잘 모르겠다.
아직 어린 약리지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어렴풋이 무언가가 잡힐 듯 하긴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줘야만 해. 리지도 조금 더 크면 알 수 있을 거야.
-응. 노력해 볼게요.
잘은 모르겠지만 존경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배웠다는 생각에 약리지는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갈 수 없었다.
한 번 보이기 시작한 현실은, 마치 꿈임을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듯 강렬하게 존재감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절박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그만큼 강렬하고도 날카롭고 난폭한 감정이 사소한 계기로도 터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약리지는 그런 감정의 와류에 너무 쉽게 노출되곤 했다.
양보. 양해.
아버지는 그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점점 커가며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약리지는 아버지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왜 우리만 이해해줘야 해?'
'양보라는 건 서로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천성이 착했던 약리지는 그 재능까지 더해 훌륭한 의선약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주에 의해 '의선약가의 가풍'이 되어 버린 일방적인 희생을 받아들일 순 없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선의에는 선의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악의에도 무조건 선의로 답하는 건, 약리지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나는 아버지처럼은 될 수 없어.'
그것이 간극을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간극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혹은 집안 어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래서 점점 커지는 간극을 그저 품은 채 약리지는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계속해 나갔고 지금에 이르렀다.
인내심이란 한순간 소모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증발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급발진'이지만 사실은 차곡차곡, 그리 될 만한 인과를 쌓은 것이란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약리지는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인내심을 소모하게 만드는 감정의 와류를 끊임없이 대하면서도 계속 참아왔으니까.
다만 그 열기를 억누르는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친구들의 '풍류를 즐기는 자리'에 초대 받았을 때 기분 전환을 위해 참석을 한 것이었다.
"어서 와."
"여기 앉아."
소꿉친구인 남사현과, 그런 남사현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 약리지를 반겨주었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 들뜬 얼굴이지만 그 사근사근한 매너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약리지는 그들 사이에 앉아 즐기지 않던 술을 함께 하며 조금은 속이 풀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오늘 너희 병원에 김도진 선배 왔었다면서?"
"아……. 응."
어느 순간 오늘 있었던 일이 화제가 되면서 다시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희 집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그러게. 누구 한 명 환자한테 짜증내는 걸 본 사람이 없다잖아."
의선약가를 극찬해 준다.
환자가 아무리 히스테리를 부려도 천사처럼 받아준다는 찬양. 그 찬양이 마치.
너는 왜 그렇게 못해?
그렇게 그녀를 추궁하는 것만 같아서.
"나, 그만 일어나 봐야 할 거 같아."
그녀는 그 추궁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 것이었다.
친구들은 어색한 그녀의 태도에도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가라며 인사해 주었다.
그런 친구들의 태도마저 약리지를 찌르는 것만 같아서 이렇게 혼자서 즐기지도 않는 소주를 들이붓고 만 것이었고 술김에 도진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기보단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뒤섞여 작용했다.
약리지는 집행부실의 분위기를 읽고 대번에 알았다.
한유아 선배도 있고 유지은 선배도 있는데.
집행부는 그런 선배들이 아닌 2학년 김도진 선배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벽태웅에게 들은 선배는 정말 어른스럽다는 이야기.
또 오늘 보았던 선배의 모습까지.
차라리 친했다면 연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약리지는 술의 기운까지 빌려 뜬금없이 도진에게 연락을 했고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마주한 도진을 보며 약리지가 속내를 풀어냈다.
"사람들은 의선약가를 그렇게 칭찬해 주지만, 저는 아니란 말이에요. 아닌데, 그렇게 보여야만 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 한탄을 도진은 피상적으로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리고 이치를 깨달아 트인 머리로.
미래이자 과거. 약리지를 '만만좌'라 만든 것이 바로 이런 감정들이라는 것을.
이런 외부에서의 시선을 만족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이, 그녀의 특정 상황에서의 '끓는점'을 낮추고 만 것이었다.
"선배처럼 하지도 못했어요. 소란을 그런 식으로 현명하게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저 화가 나는 걸 억누르는 못난 모습밖에 보이지 못한단 말예요."
"그건 아냐."
한탄하던 약리지의 말에 도진은 즉답했다.
그 단호하고도 즉각적인 부정에 약리지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날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냐? 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냐."
"…그건 겸손이잖아요."
"야. 내가 무적 초인도 아니고 정답이 없는 걸 어떻게 해결한단 말야?"
"정답이 없는 거라구요?"
"그래. 정답이 없는 일이지."
거기까지 말하고서 도진은 포장마차의 아주머니가 가져다 준, 자신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따르고선 아주 조금 홀짝였다.
쓴맛을 느끼며 도진이 말을 이었다.
"아들이 너무 아파하는 걸 보는 엄마의 기분은 어떨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차례가 되지 않아 마냥 기다려야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오늘 소리지르던 아주머니의 이야기다.
열일곱이 된 약리지는, 감히 '이해한다'고 하진 못해도 그것이 어떨지 짐작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약리지 이상으로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전생에 했었다.
"그걸 이해하니까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아주머니를 비난하지 않았을 거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같은 처지이거나 그 처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아주머니를 수군거리는 소리로나마 비난하는 사람이 단 명도 없었을 터.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는 '천사와 같은' 의료진들 또한 견디지 못하고 쏟아내는 아주머니의 화를,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약리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또 스스로를 책망하려 했지만.
"그런데."
"……."
"그렇다고 해서 아주머니의 태도가 정당한 건 아니잖아?"
단호한 그 말에 약리지의 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억지이고 화풀이잖아."
설마 그런 말이 도진에게서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참으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어. 누굴 먼저 해주고 누군 미루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최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선. 그마저도 없다면 최악은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게 옳은 거잖아."
"결국 위급한 순서대로, 그중에서 차례를 지키는 게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선 최선이라고 난 생각해. 그렇게 볼 때 우리 아이를 먼저 치료해 달라고 하는 건, 결국 억지이면서 화를 풀기 위한 화풀이라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약리지는 멍하니 도진을 바라보았다.
도진은 말을 이었다.
"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하지만 양해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받아주고 있었던 거란 말이지."
양해.
그 단어가 유독 뇌리에 박혀들었다.
"하지만 다들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양해라는 건 강제적인 게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저 양해를 하지 못했던 것 뿐이었어."
양해를 못했을 뿐이다.
이어진 그 말 또한, 약리지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주머니의 화를 받아주던 그분들은 그런 고생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나는."
"그리고 너는 이제 나에게 남이 아니니까."
"아……."
"그래서 그냥, 참지 못하고 나선 것 뿐이란 말이지. 무언가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실은."
도진이 다시 한 번 소주를 조금 들이켜고선, 그 쓴맛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