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03화 (303/741)
  • 302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했던가.

    무성하게 뻗은 가지와 잎사귀를 가진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웅성이고 만다.

    본래는 자식을 많이 둔 어버이의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 피상적인 부분 또한 많은 곳에 비유로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의선약가의 본가가 그러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나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보유한 이곳 의료 단지는 일반 병원으로서는 물론이요 무림인들을 위한 병원으로도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단순히 가지가 많을 뿐 아니라 바람마저 끊이지 않는, 심지어 거세게 몰아치는 곳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술렁임의 규모와 지속성 또한 비할 데가 없다.

    그러니까, 약리지의 안내에 따라 병원을 나서던 도진이 소란과 마주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약리지와 함께 의료 단지 내 길을 걸으며 도진은 전생에서의, 이제는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기억을 떠올리며 여러가지 감정에 흔들리고 있었다.

    뺑소니범.

    곽필섭에 의해 불구가 되어 버렸던 시절.

    도진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그 끈적이면서도 단단하게 내린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여러가지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었다.

    그리고 그 경험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였는데 그것을 이곳 의료 단지에서 또 오랜만에 진하게 느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기에 그 지옥과도 같았던 시절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떠올리며 온갖 감정이 따라왔고, 그것이 이곳 의선약가의 본가이자 의료 단지를 이유없이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냐아앙."

    다만 오늘만큼은 그 생각대로 움직이기 어려웠으니 함께 온 솜이 때문이었다.

    모든 걸 떠나 외견으로 보았을 때 솜이는 새하얗고 풍성한 털을 가진 장모종 고양이다.

    '털 날리는 고양이'를 데리고 다른 곳도 아닌 병원을 돌아다니기란 요원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그저 병원을 나설 때까지 천천히 길을 걸으며 추억과 그에 동반되는 감정을 곱씹고 있었던 것인데…….

    "먼저 좀 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아아아아악!!"

    그 추억과 감정을 날카롭게 뒤흔들며 파고드는 처절한 목소리에 도진이 약리지와 함께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소란의 근원지는 병동의 입구.

    그 입구 앞에서 초췌한 중년 여성이 의료진을 붙잡고 소리쳤다.

    "우리 애가 그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아파하는데 치료할 수 있으면서 왜 기다려야 하냔 말이야아아아아악!!!"

    파르르…….

    도진의 곁에 서 있던 약리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이곳 본가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러나 약리지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풍경이었다.

    "진정하십시오, 보호자님."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완치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치료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치료해 달란 말예요!! 왜! 왜!! 조금 더 빨리 못 해주냔 말이에요! 애가 지금 너무 아파하는데에에에!!"

    "죄송합니다. 아이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고통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저희가 노력하겠습니다."

    꾸욱-

    떨림을 억누르려는 듯 약리지는 주먹을 쥔다.

    그런 약리지의 모습까지 더해, 도진은 지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무림병이구나.'

    소리치는 중년 여성은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무림병을 앓고 있는데, 다행히 불치병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불치병이 아닐 뿐 아무나 고칠 수 없는 희귀병이었고 때문에 의선약가의 '고수'들만이 치료할 수 있었다.

    필연적으로 그런 고수는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감당해야 할 환자는 많았기에 '대기 시간'이 생긴다.

    중년 여성은,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중년 여성은 그래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 폭발을, 의료진은 받아 주었다.

    거칠게, 날카롭게, 모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를 상처없이 쏟아낼 수 있도록 부드럽게.

    그 모습에서 도진은 과연 이곳이 의선(醫仙) 약지후의 의선약가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수장의 됨됨이와 영향력이 가문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그 아래 구성원들 또한 모날 수가 없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그리고 인연이 닿아 후배가 된 약리지가 주먹을 꾸욱 쥐고 떨림을 참고 있었기에 한 발 앞으로 나서고 말았다.

    "…이제 화를 좀 가라앉히세요."

    "넌 또 뭐야!!"

    낮은, 그러나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에 중년 여성은 고개를 휙 돌리고 무섭게 도진을 쏘아보았다.

    화가 폭발해 있었기에 상대를 확인하기 보다 그 화살을 돌리기를 우선하는 모습이었다.

    도진은 그런 중년 여성에게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화를 쌓아 두지 않고 풀어내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 화를 주변에 부딪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잖아요."

    "뭘 알아!! 네가 뭘 아는데 그런 소리를 해!!"

    "치료를 기다리는 건 아주머니만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럼 아주머니는 마찬가지로 아픈 환자들을 제치고 새치기를 하겠다는 건가요?"

    "……!!"

    입을 크게 벌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도진의 작고 담담한 말에 '힘'이 실려 그 내용이 머릿속에 때려박혔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려 하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제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하지만 도진은 말에 힘을 담아 그것을 마음까지 전달함으로써 화를 폭발시켰던 중년 여성의 이성을 일깨운 것이다.

    그리고 그 이성이,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머물던 비슷한 처지의 보호자들을 두 눈에 담게 만들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화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을.

    스윽-

    갑자기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이곳의 중심이 되어 버린 도진의 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고 거기엔 약속이라도 한 듯 3층 창문에서 막 고개를 내미는 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도진은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도진에게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잠룡 김도진'의 인사에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만약 그럴 기운만 있었다면 거세게 붕붕 흔들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중년 여성이 멍하니 쳐다 보았다.

    아이는 중년 여성의 아들이었다.

    도진이 다시 중년 여성에게로 시선을 맞추곤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가 불안해 할 거 같아서요. 주제 넘게 나섰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가볍게 인사하고서 도진은 몸을 돌렸다.

    도진이 나선 것은 비단 숭고하게 보일 정도로 직무를 다하는 의료진의 모습과 후배가 된 약리지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중년 여성의 기질과 비슷한,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기질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감정적이었다 보니 감각이 날카로운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 중년 여성의 거칠게 흔들리는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과 비슷한,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기운이었기에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잡아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아이가 바깥의 소란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요즘 배우고 있는 장호의 가르침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그것이 도진을 움직이게 만든 세 번째 이유였다.

    '어머니도 그러셨을까.'

    전생에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벌벌 떨리던 시기.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입원했던 도진.

    어머니가 과연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도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고 그 편린이나마 엿보게 될까 두려워 했었다.

    그런 복합적인 것들이 도진이 본래는 지나쳤을 '정답을 내기 힘든' 소란에 나서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네. 안녕히 가세요, 선배."

    서로 말없이 묵묵히 걷다 약리지와 병원 앞에서 헤어졌다.

    도진은 그 길로 솜이와 함께 근처 산 중턱에 마련된 수련터에 올라 수련을 했다.

    슈킨팍시를 가져오지 않았던 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고 집까지 '산책'을 하기 위해서.

    다만 동적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수련을 한 건, 솜이와 함께 있을 때엔 감시의 시선이 붙기 때문이다.

    공용 공간이라 해도 감시의 시선이 붙을 때 그곳에서 수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보여 주어도 상관없는 부분만 수련을 했다.

    앞으로 1년간은 이렇게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게 산책 겸 수련을 간단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수련을 지하 연무장에서 한 뒤 샤워를 하고 몸을 쉬기 위해 잠시 누웠다.

    "냐아앙."

    배 위에 드러앉은 솜이를 쓰다듬으며 도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두 스승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고 도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그날 밤.

    도진은 생각지 못했던 전화를 받았다.

    -선배.

    "응, 리지야."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으나 이렇다 할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던, 약리지였다.

    그 약리지가 전화로 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을 했다.

    -혹시 술 드세요?

    * * * *

    -저 여기 포장마차인데, 같이 드셔 주시면 안 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리지의 상상도 못했던 제안.

    그것도 꼬인 혀로 하는 제안에 도진은 가볍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섰다.

    일부러 솜이까지 집에 두고 전화로 약리지가 말해 주었던 포장마차에 들어서니 약리지가 바로 보였다.

    새하얀 가운은 걸치지 않았으나 특유의 사모예드 같은 하얗고 차가운 기질이 느껴지는 그녀는 구석 자리에서 벌써부터 취해 있었다.

    녹색의 소주병이 두 병이나 비어 있었고 세 번째 병도 반 정도 비워졌다.

    일부러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던지 약리지는 눈이 반쯤 풀려 있어 위태위태해 보인다.

    무림인이라지만 취기를 억누르지 않았고 도진이 알기로 애초에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아이였으니 무려 두 병 반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선배."

    "그래, 리지야."

    얘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틀……에 박힌 잔소리를 머릿속으로만 하고 도진이 약리지의 앞에 마주 앉았다.

    까딱 나올 뻔 했던 틀니를 집어 넣으며 도진이 다른 말을 꺼냈다.

    "웬일이야. 이렇게 취해서는."

    사실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렇게 제멋대로 짐작하고 결론 내리기보단 본인에게 묻는 게 좋았기에 도진이 물었다.

    약리지는 도진의 물음에 비뚤게 웃었다.

    "그냥…… 제가 못난 거 같아서요."

    "니가?"

    "네."

    뒤적뒤적.

    괜히 제육볶음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뜸을 들이다 약리지가 말을 이었다.

    "오늘 사현이랑 친구들 만났거든요."

    사현. 호협남가의 후계자 남사현.

    약리지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로 아직 학교에서 조금 겉도는 느낌의 약리지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는 인싸 신입생이자 집행부 동기였다.

    "응. 그런데?"

    "걔랑 이야기하고 있자니 제가 너무 못난 거 같았어요."

    저녁을 먹고 꿀꿀한 기분으로 있자니 남사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들과 간단히 술자리를 가질 건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이었다.

    마침 시간도 비었고 기분도 별로라 술 한 잔하면 나쁘지 않겠다 싶어 참석한 거였는데…….

    -응, 그렇지. 의선약가의 분들이 천사 같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잖아.

    -동감. 의선약가 의료진은 사탄이 와도 못 까지.

    -리얼 키키.

    오늘 있었던 소란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잠룡 김도진이 개입했던 탓에 입소문이 났다.

    기사화가 되었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커뮤니티를 통해 소문만큼은 꽤 퍼졌던 것이다.

    당연히 그 이야기를 '인싸'인 남사현과 친구들 또한 들었고 그런 식으로 의선약가를 찬양해 주었다.

    자신의 가문이 칭찬받는 것이니 기분이 좋아야 했는데.

    "그걸 듣고 있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약리지는 그것이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