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95화 (295/741)

294화

-설표가 새끼를 낳는다고 해서 그놈이 '영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물이라 불리던 천산설표.

그런 천산설표가 새끼를 낳는다고 해서 그 또한 영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위지혁은 말했다.

-애초에 그렇게 바로 영물로 새끼를 낳을 수 있었다면 천산설표는 영물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종(種)으로서 번식했을 게다.

-그렇네요.

사람으로 따지면 초월경(超越境)에 들어 그 육체가 '완전히 형질 변화한 무인'끼리 부부의 연을 맺어 아이를 낳는다 해서 그 아이가 완전히 형질 변화한, 초인인 채로 태어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갓 태어난 설표는 보통 부모의 보호 아래 수행을 거듭하는데 내공을 쌓고 영성이 트이는 데 성공하면 그제서야 영물로서의 격을 갖출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환골탈태에 성공하면 영물로서의 천산설표가 되고 실패하면 얼마 전 사건에서 보았던 '마물'이 되어 날뛰다 선천진기(先天眞氣), 생명력이 모두 고갈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설표 역시 영물로서의 격을 갖추는 사례는 지극히 드물 것이다. 때문에 문헌에서도 부모가 지극히 보살피고 이끈다 해도 영물에 도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보면 멸종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더 이상 자식을 낳고 기를 여력이 없어지면 설표가 자신의 내단을 자식에게 물려줌으로써 대를 이어가는 건 아닐까 하고 저자는 추측하더구나.

그런 면에서 볼 때 영물의 문턱까지 도달했던 설표가 두 마리나 있었다는 건 정말로 희소한 경우였다.

그리고 여기서 위지혁과 장호는 의문을 표했다.

-도대체 어째서 이곳에 그 아이들이 있었던 것인지가 의문이로구나.

그 말대로였다.

-분명히 영물이었을 어미, 혹은 아비, 어쩌면 둘 다가 보호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현대에도 천산이 있고 만년설이 있다.

가정으로 사살되었던 천산설표가 그 천산의 만년설에 살고 있었다고 했을 때.

아니, 설령 거기가 아니라도 좋다.

어쨌든 본래의 보금자리가 있었을 터인 천산설표의 새끼들만이, 어떻게, 이곳 한국에 온 것인지 그 연유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영물을 생포하려는 흑도에서 추적했다?

새끼들을 지키려 하는 어미나 아비를 사살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새끼를 놓쳤다…… 는 가정은 너무나 어설프다.

영물을 수색하고 찾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세력이, 어미와 아비를 사살했지만 새끼를 놓쳤다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야 그럴 수 있다고 억지로 납득한다 해도 그렇게 어미와 아비를 잃은 새끼들이 추적마저 뿌리치고 한국까지 흘러들었다?

개연성을 포기한 어설픈 삼류 스토리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영물이 된 설표는 강력하고 현대의 무인들 수준은 떨어지지만 그렇기에 현대인들에겐 '과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 과학이 더해진 현대 무인들의 부대는 천운마저 허락지 않을 것이다.

더더욱, 지금 한국은 '따듯한' 계절이다.

천산설표가 굳이 따듯한 한국까지 와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강제라면 앞서 생각했듯 쫓는 세력이 있다는 건데 그 세력이 아직 영물이 되지 못한 설표를 잡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다.

자의로는 따듯한 한국으로 올 이유가 아예 없다.

환골탈태를 앞두고 있으니 러시아로 가면 갔지 한국으로 왜 온단 말인가.

애초에 국경을 넘다 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생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서는, 당시 도진은 지옥의 구렁텅이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바깥의 소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위키를 뒤적였다.

서소담, 우정한의 이야기를 읽었고 그에 얽힌 사건들도 분명히 정독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영물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생과 달리 영물이나 마물이 등장한 적이 없었다는 거다.

등장했다 해도 최소한 외부에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마무리 되었으니 위키에 기록되지 않았을 터.

-가장 높은 가능성은 두 마리가 공멸(共滅)한 경우일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상처입히고 드러나게 만들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저번 생에서는 그 시도에 실패하고 두 마리가 싸우다 양패구상해 사라졌다는 말이다.

가능성은 높았다.

비등비등한 가능성의 결과가 나오는 건 '독립 시행'이니 어느 쪽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두 마리가 호각지세라면 이번 생에서는 어떻게 한 놈이 이겼지만 저번 생에선 양패구상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건에 영물이 등장할 일은 없어진다.

다만.

-으음……. 명쾌하게 풀리는 게 없네요.

-그렇구나.

모든 것이 가능성일 뿐 확신할 수는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때에,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존재인 '세 번째 설표'가 나타난 것이었다.

-허허…….

"……."

서벅.

거대한 덩치의 설표가 다가왔다.

놈과 눈을 마주하는 도진은 백설을 뽑지 않았다.

그 눈이 마기(魔氣)에 물들어 있지 않았기에.

총기가 묻어나는 눈동자는 깊고 맑았으며 도진에게 일절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놈은, 앞서의 두 마리와 달리 아직 마물이 되지 않은 분명한 영물이었다.

세 번째가 있었다니.

이건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앞서의 가정이 모조리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만큼 눈앞의 존재는 크나큰 변수였다.

그르릉.

놈이 낮게 울었다. 그리고.

터억.

도진의 앞에 몸을 낮추고 엎드렸다.

-이건…….

-도와달라는 것이로구나.

세 번째 설표.

아직 주화입마에 들지 않은 놈은, 몸을 엎드리고 도진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니까.

-저에게 어미의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도진은 이미 위지혁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자력으로 환골탈태가 여의치 않을 경우, 설표는 어미나 아비가 그것을 도와준다고.

지금 도진의 눈앞에 엎드린 설표가 바로 그런 도움이 필요했다.

녀석 내부의 기운은 이미 포화 상태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운이 몸을 터뜨릴 듯 거세게 휘돌고 있는데 그것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몸을 불태워 버릴 듯한 열양지기(熱陽之氣).

그것을 제어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하는 따듯한 기후이기에 더더욱 놈은 버거웠다.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의 두 마리와 마찬가지로 마물로 전락하여 날뛰다 생을 마감할 처지.

그렇기에 놈은 도진의 도움을 바라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찌할 테냐.

위지혁은 물었다.

-도와야지요.

그리고 도진은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위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도진이 엎드린, 그러나 그럼에도 도진과 눈높이가 같은 거대한 설표에게 다가가 그 몸에 손을 올렸다.

최대한 부드럽게 정제한 내공이 손을 통하여 설표의 안으로 흘러들어갔고 날카로워진 감각을 이어 내부를 관조했다.

설표가 도진의 의도를 이해하고 저항하지 않았기에 파악은 금방 끝이 났다.

-음…….

내단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열양지기가 별의 중력을 벗어나 튕겨 나가려는 위성처럼 회전하고 있다.

그것을 두터운 껍질, 몸으로 덮고 있지만 한계였다.

늦기 전에 넘쳐나는 기운을 이용하여 내단을 완성하고 육체를 새로 구성해야만 했다.

그래,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답은 간단했다. 기운을 모으고 올바른 흐름을 만든 뒤 이끈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이치를 보는 도진의 신안은 답은 찾았으나 지식이 없기에 그 방법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괜찮았다.

도진의 안에는 그 방법을 아는, 절대고수인 두 스승이 있었으니까.

-인간이 아닌 것의 진기도인(眞氣導引)은 처음이다만 믿어도 좋다.

두 사람은 하늘 너머에 이르고 이치를 깨달은 무인이다.

비록 형태가 달라도 이치는 다르지 않으니 도진이 신안으로 보고 두 스승이 일러주는 것을 따를 수만 있다면 이 환골탈태가 실패할 일은 없었다.

그 일러주는 것을 오차없이 따르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도진은 매일 그보다 어려운 수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있는 얼굴로 설표와 눈을 마주했다.

"시작한다."

설표는 도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뜻이 눈으로 전해졌기에 지체없이 억누르고 있던 기운을 풀어냈다.

갑작스럽지만 그만큼 유예할 여유가 없었기에, 대번에 환골탈태가 시작되었다.

쿠우우우웅……!

'…….'

각오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강렬한 흐름이다.

억누르고 있던 둑이 터진 듯, 잠시라도 힘을 풀면 그대로 휩쓸려 흔적도 없이 타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도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 흐름을 붙잡고 이끌었다.

설표가 최선을 다한다고 하나 한참 역부족인 힘을 메꾸는 도진에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이 계속되었으나 이 또한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는 도진에게는 익숙했다.

-그대로 내단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원을 그려야 한다.

스승의 말에 따라 온 사방으로 전력을 다해 질주하려는 야생마 같은 기운을 도진은 꽉 붙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당겼다.

손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길게 이은 내공을 정신력만으로 움직이려니 수십 배나 되는 힘이 소모된다.

-원을 점점 줄여 나가야 한다. 이제는 벗어야 할 '껍질'의 기운을 모두 수습했다면 이제 진체(眞體)에 그것을 깃들이는 것이다.

실수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 칼날 위를 걷는 듯 지극히 섬세하고도 버거운 작업.

찰나인지, 아니면 긴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사투는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

쩌저적-!

수분을 모조리 잃고 마치 다 타버린 것처럼 설표의 육체가 바스라졌다.

크게 놀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도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설표와 이어져 있는 도진은 이것이 환골탈태의 올바른 진행 과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

마치 하나의 별이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기운이 응축되고 또 응축된 내단은 이윽고 완성되었고 그 내단을 중심으로 별이 태어나듯 육체가 재구성되고 있었다.

우서진 때처럼 일부의 변화가 아닌, 온전히 새로이 구성되는 생명의 변화.

머지 않은 미래에 도진 또한 겪어야 할 그 지극히 신비롭고도 아득한 영역의 과정을 영혼으로 느끼는 도진 또한 새로운 영역을 보았다.

덩치를 불리는 천마기로 가득 차 있던 육체가 우주처럼 확장했다.

아니, 도진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가능성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었다.

전신의 혈도를 모조리 인지하고 그 인지한 영역으로 천마기가 내달린다.

인지하지 못해 기능하지 못했던 혈도는 물길이 트인 듯 천마기로 거칠게 적셔지며 윤택해졌고 도진은 그 모든 현상을 깨달음으로 조율했다.

뚝. 뚝.

설표와 닿지 않았던 손끝으로 시커먼 노폐물이 배출되었다.

온몸을 통제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만이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했던가.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통제하고 있었을지언정, 도진은 자신의 내부에 펼쳐진 소우주는 온전히 관조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무지(無知)를 알게 되었다.

비할 데 없이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한 걸음 더 높이 올랐구나.'

아쉽게도 천마심공의 5성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벽은 앞서와는 비할 데 없이 높고 견고하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기반을 비로소 닦았음을 도진은 느낄 수 있었다.

사아아아아-

기운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눈을 떴다.

도진의 몸을 중심으로 다 타 버린 재와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으니 천산설표가 벗은 '껍질'이었다.

기운을 온전히 수습함으로써 생기가 사라진 껍질이 바스라져 퍼진 것이다.

그리고.

-허허……. 고놈, 꽤 귀엽구나.

도진의 품 안에는 껍질을 벗어던진, 새하얗고 풍성한 털을 자랑하는 '고양이'가 한 마리 안겨 있었다.

"야아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