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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93화 (293/741)

292화

-천산설표(天山雪豹)라 불리던 영물이 있었다.

깊숙이 들어왔던, 등산로가 아닌 거친 산을 평지처럼 내달린다.

그 길 아닌 길 곳곳에 보이는 참혹한 피와 살점을 스치며 도진은 위지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천산의 만년설이 내린 곳에 산다는 이야기가 퍼져 천산설표라 불렸지.

그것은 위지혁이 교주로 있던 천마신교의 근거지인 천산의 만년설이 내린 곳에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영물이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그 옛이야기를 꺼내놓은 건, 이 사건의 중심이 된 마물이 바로 그 천산설표가 아닌가 위지혁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헌에서 천산설표는 성장기에는 호랑이 이상으로 그 덩치가 크게 자란다고 했다. 허나 내단이 성숙기에 이르러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면 오히려 고양이만큼이나 작아진다고 기록되어 있었지.

그 이유는 천산설표가 쌓는 기의 특성에 있었다.

-만년설이 내리는 곳에 산다는 것 때문에 놈의 기가 차갑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만 오히려 그 반대다. 천산설표는 극양(極陽)의 기운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에 양기를 다스리는 데 수월한 환경인 만년설이 내린 천산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극양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기엔 덩치를 불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덩치의 도움을 받다 내단이 성숙기에 이르면 불필요하게 커다란 덩치를 버리고 환골탈태를 통하여 본래의 체구로 몸을 재구성하니 비로소 '설표'라 불릴 자격을 얻는다.

-놈은 환골탈태에 실패하고 주화입마에 든 개체로 보이는구나.

위지혁은 만년설이 내린 정상에서 설표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을 때 위지혁이 도진의 신안을 통해 본 마물은 설표가 맞는 듯했다.

-이것은 확실한 이야기가 아니다만, 본래 설표가 미숙한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환골탈태를 해야만 할 경우 어미가 도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물이 된다는 기록도 있었다. 혹은 양기가 강한 곳에서 환골탈태에 돌입하다 실패해 마물이 됐다는 기록도 있었지. 만약 이 기록들이 맞다면 놈들은 바로 그 본의 아닌 상황에 놓였고 주화입마에 빠져 마물이 되어 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놈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최소한으로 싹 튼 영성과 본능이 해결책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해결책이란 미쳐 날뛰는 양기의 기세를 분출할 수 있는 외부의 상대다.

단, 목숨에 위협이 되지 않는 '적당한 수준'의 상대를 찾으려 한다.

그 상대가.

처벅.

"……."

보육원을 등지고 선 벽태웅이었다.

* * * *

그것은, 분명하게 '행운'이었다.

도시에 스며든 설표는 다른 개체보다 조금 더 늦게 마물화가 되었다.

덕분에 다른 놈을 상처입히고 미끼로 내놓음으로써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로 놈은 포위망을 은밀히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화되고 말았다.

동시에 곧 자멸하리라는 걸 알고 있는 본능은 최소한의 가능성을 찾아 움직였고 그것이 벽태웅이었다.

위협적이지만 승리를 자신할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몸을 터뜨리려 드는 기운을 부딪칠 수 있는 '튼튼한 생물'.

그 생물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감지했고 벽태웅만을 노리고 달렸기에.

그것은 놈이 스며든 동네의 주민들에게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웨에에에에엥-!!

이미 놈이 도시에 스며들고 움직이고 있을 때에야 도진의 보고로 뒤늦게 경보가 울리며 대피 방송이 나왔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다급히 몸만 빠져나와 달렸으니 만약 이때 설표가 날뛰었다면 끔찍한 인명 피해가 나왔을 테니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행운이었지만.

그르르르르…….

"……."

설표를 마주해야 했던 벽태웅과 아직 대피하지 못한 보육원의 식구들에겐 수많은 사람들의 행운을 대가로 마주해야만 했던 거대한 불행일 수밖에 없었다.

경보가 울리기도 전에 마물은 이미 보육원 안에 들어서고 있었으며 벽태웅은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놈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을 감지했음에도, 공포에 몸이 굳어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르릉.

그것은 벽태웅이 처음으로 마주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인위적인 살기가 아니었으며 인위적인 목숨의 위기도 아니었다.

어설프게 상상한 죽음도 아니었으며 어설프게 목덜미에 드리워지는 위협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무림과 같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죽음에 대한 위협이자 공포였으며 그렇기에 벽태웅은, 열일곱의 벽태웅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공포에 발은 커녕 입술조차 떼지 못한 것이었다.

크허어어엉-!

마물은 그런 벽태웅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고 덮쳐들었다.

드리워지는 그림자.

점점 가까워지는 발톱.

그럼에도 벽태웅이 굳어 있을 때였다.

"형아아아아아!!"

"……!"

찰나의 순간.

목덜미에 그 거대한 발톱이 박히기 전에 벽태웅은 동생의 외침으로 공포를 내뱉었고 본능적으로 배운 무공의 걸음을 구사했다.

크릉!

사냥감이 굳어 있었기에 마물의 동작은 조금 컸고 그 덕분에 벽태웅은 찰나의 여유를 얻어 발톱을 피할 수 있었다.

뿌득!

그리고 이를 악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크허헝!

인간으로선 불가능할 만큼의 유연함과 힘으로 놈은 대번에 몸을 뒤집으며 다시 한 번 앞발을 휘둘렀다.

거기에, 벽태웅의 주먹이 작렬했다.

꽈아아앙!

커헝!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과 함께 벽태웅의 몸이 사정없이 밀렸다.

그러나 그 흔들림을 무식할 정도의 힘이 담긴 진각으로 해소하며 벽태웅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밀었고.

꽈아앙!!

마물을 한 번,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후욱, 후욱. 여기는."

벽태웅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보육원의 풍경이었다.

-자, 아, 해야지.

-아…….

-옳지, 잘 먹는다. 우리 태웅이. 많이 먹고 크게 자라야지?

-응.

그리고 그 풍경과 함께 하는, 밥을 떠주던 어머니, 아니 고모의 얼굴이었다.

-야, 조만간 태웅이가 너보다 크겠는데?

-괜찮아. 태웅이는 그래도 내 동생이니까!

이어지는 건 이제는 사회로 나간, 그러나 자주 얼굴을 비춰 여전히 가족이라 생각하게 만들던 형과 누나들이다.

상처에 반창고를 발라 주던, 몰래 숨겨 두었던 과자를 입에 넣어 주던.

그르르르르…….

"여기는!"

-태웅이 형아아아!

-쟤들이 수지 괴롭혔어!

그리고 타고난 힘이 있어서 새로 생긴 동생들을 지켜줄 수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때로는 자신보다 키가 큰, 무공을 배운 나쁜놈들도 있어서 사실은 무서웠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콰득!

주먹을 쥔다.

크허어어어엉!

덮쳐드는 공포에 언제나 그러했듯 주먹을 내질렀다.

"우리집이야!"

꽈아아아앙!!

폭음이 터지고 괴물이 다시 한 번 밀려났다.

후욱, 후욱.

평소에는 수천 번을 내질러도 지치지 않던 주먹질 몇 번에 벽태웅은 어깨로 숨을 몰아쉬었다.

버거운 공포가 무서운 기세로 체력을 앗아간다.

그러나 결코 물러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너에게 힘을 주마. 나의 꿈을, 그리고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스승이자 두 번째 은인에게 배운 무공을 되새긴다.

거신공(巨神功).

거대한 신의 힘을 육체에 깃들이는 무공.

아직 미숙한 벽태웅의 무공은 그러나 온전하지 않아 오히려 마물에게 힘에서 밀리고 있었다.

지극히 상성이 좋지 않은 최악의 상대.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마물에게 압도당하여 도망치지 못하고 주저앉은 동생들이,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남은 고모와 고모부가 그의 뒤에 있으니까.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벽태웅은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한 방 한 방이 마치 대포를 마주 때리는 것처럼 벽태웅의 단련된 육체와 내부를 뒤흔들었다.

무공을 배운 이후로 결코 모자람을 느끼지 못했던 힘이, 체력이, 그리고 내공이 금새 바닥을 보였으며 자신하던 힘에서도 압도당했다.

그르르르…….

이성을 잃은 마물이 그럼에도 남은 맹수의 본능으로 사냥감이 한계에 달했음을 대번에 눈치챘다.

불행히도, 벽태웅의 저항은 오히려 마물의 기세를 더욱 올려놓았다.

그냥 두었으면 자멸했을 넘쳐나던 기운이 벽태웅과의 격돌로 조금은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목적했던 바를 이룬, 조금은 편해진 마물이 조금 더 강한 기세로 벽태웅을 덮쳤고.

벽태웅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오른팔을 내밀었다.

콰득!

이빨이 섬뜩하게 근육에 박혀들었다.

마물은 그것을 그대로 뼈째 으스러뜨리려 했으나.

두웅-!

……!!

마치 입 안에서 폭발하듯 터지는 기운에 순간 굳고 말았다.

씨익.

벽태웅은 웃었다.

거신공, 격발(激發).

체내의 내공을 폭발시키듯 운용함으로써 가진 내공 이상의 힘을, 그것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내공운용법이다.

선천적으로 강력한 육체를 타고나야만 쓸 수 있는 수법이며 이것이 극에 달해야만 거신공을 대성할 수 있었다.

소거인 강거혁은 그 수준이 부족했기에 대성할 수 없었던 그 무공을, 벽태웅은 익힐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

그렇기에 마물의 이빨에도 벽태웅의 오른팔은 끊기지 않았으며 격발마저 운용하는 데 성공했다.

평생 그를 배신하지 않았던 육체.

콰득!

그것은 이번에도 배신하지 않았기에 벽태웅은 격통에도 왼 주먹을 쥘 수 있었으며.

쿠웅!

진각을 밟을 수도 있었다.

"…우리집에서."

그리고 또 한 번 왼손으로 격발이 시전되었다.

"나가!"

꽈아아아앙!!

커허헝!

콧잔등에 제대로 틀어박힌 주먹에 마물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허억, 허억."

벽태웅이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한 수.

"와아아아아아-!!"

공포에 짓눌려 있던 동생들이 함성을 내지를 수 있게 만들어 준 한 수.

그러나.

그르르르르…….

"……."

냉혹한 현실은 벽태웅이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그대로, 놈이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다.

벽태웅의 주먹은, 최후의 한 수는 놈을 쓰러뜨릴 수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베테랑 무인들마저 장비의 도움을 받고 무리를 이루어서야 안전하게 사살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후기지수라고는 하나 아직 애송이인 무인이 쓰러뜨리기에 마물의 벽은 잔인하리만치 높았던 것이다.

꾸욱-

"그렇겠지."

하지만 벽태웅은 공포에 짓눌리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고 등을 돌려 도망치지도 않았다.

보육원을 지켜 온 그는 항상 그랬으니까.

만용, 조차도 아니다.

그는 곰 같은 성정을 타고났으니까.

이미 계산은 끝나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제아무리 갑작스런 사태라고 하지만 이토록 긴급한 상황에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을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원이 올 것이었다.

벽태웅이 할 일은 그저 그때까지만, 아주 잠시만 버티는 것이다.

이 목숨을 던지기라도 한다면 애송이인 자신이라도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벽태웅은 그렇게 목숨을 건 각오로, 공포마저 넘어선 각오로 단단히 마물의 앞에 섰고.

두웅-!

그 각오와 투지가, 하늘을 대신하는 기적이 늦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오오오오오-

해일이 밀려오는 걸 두 눈 가득 마주한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을 받은 벽태웅이 마물에의 공포도 잊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선배, 김도진을 바라보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어 버릴 것만 같은 경이롭고 또 흉포한 기세를 넘실거리는 선배.

'진짜, 왜 저렇게 센데.'

그렇기에 벽태웅은 그 기세를 오롯이 마물에 집중하고 있는 선배의 등장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다.

다 괜찮다.

순간 눈이 마주친 선배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즉시 지켰다.

'……!'

그륵……!

마치 세상이 세로로 쪼개지는 듯한 기세였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해일이 일순간에 극한까지 연마된 칼날로 압축된 듯했고 세로의 선을 그렸다.

그 선은 지켜보던 벽태웅마저 자신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닿았던 마물의 목과 몸통을 나누었다.

천마검공(天魔劍功), 절세(絶世).

위지혁이 보여 주었던 세상을 둘로 나누었던 검세.

그 검세의 묘리를 끝자락이나마 구사한 도진의 전력을 다한 검공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후욱, 후욱.

드물게도 숨을 몰아쉬며 도진이 벽태웅의 앞에 섰다.

위지혁의 말에 따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던, 아직 등교 시간이 되지 않아 벽태웅이 머물고 있을 보육원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고 다행히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아아…….'

벽태웅이 그런 도진의 모습에 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오직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고, 긴장이 풀린 육체가 무너지려 했다.

터억.

하지만 그 육체는 무너지지 못했으니, 어느새 다가온 도진이 그 우람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탱한 것이었다.

"…멋졌다, 후배야."

그리고 도진이 웃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동생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 형은 무너지면 안 되는 거야.

툭툭.

가볍게 두드려주는 어깨를 시작으로 하여 거짓말처럼 다 사라졌던 힘이 샘솟는 것만 같은 감각을 벽태웅은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당당히 펴며, 벽태웅이 답했다.

"예.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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