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방법을 차분히 생각해 보자."
"예, 선배님."
보육원을 방문한 뒤로 도진은 나지윤에게 관련된 정보를 매일 듣게 되었다.
"구역 변경이 확정된 뒤로 꽤 복잡해졌어."
본래 그 일대는 개발이 되지 않은, 많이 낙후된 구역이었다.
산을 끼고 있어 어떻게 보면 서울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산골 오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때문에 더더욱 혼란이 크다고 했다.
재개발 자체에 대한 여론은 긍정적이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공공 주택까지 조성하기 위해 진행되는 재개발이었으며 특별히 논란이 될 만한 부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상도 논란이 되지 않도록 지급했기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조합원이 되거나 보상을 받고 이사를 갔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렇지 못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안에 벽태웅이 자란 보육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골에는 그런 게 있잖아. 관습."
시골에서 종종 일어나는 토지 문제가 있다.
조상 대대로 여기까지는 우리, 저기부터는 너희, 이런 식으로 토지 소유권을 '관습적으로' 인정하며 살아왔는데 그걸 정확히 측량하고 또 문서화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그런 문제가 변경된 구역에서도 일어났고 벽태웅의 보육원이 연관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보육원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다수가 다른 사람의 땅이었다는 거지."
본래 시골이었다가 어설프게 현대화된 동네였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거기다 그 보육원 출신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던 몇몇 시설도 무허가 시설이 되어 버렸고."
보육원은 보금자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그런 여러 문제들로 인해 갈곳이 없어졌다.
결국 문제는 간단하기에 잔혹하고 또 해결하기 어려운 돈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시위해야 한다는 여론이 없는 건 아닌데 그다지 위력은 없어. 해봐야 호응도 얻기 힘든 상황이고."
"그리고 시세보다 조금 더 쳐주면서 땅을 사겠다는 회사가 있는데 타고 올라가면 노우정보라는 회사가 있더라. 대산건설이랑 유착이 강한 회사였지?"
"응."
'어렵네.'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곳이었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은 그 지원을 받지 못한,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곳이었다.
아이들의 관계도 끈끈해 한둘씩 나누어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사실, 도진이 명성공방에 부탁하면 명성공방에서 출자해 아예 재단을 세워 버리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 어쩐지 꺼려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넘어 무조건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그 정도나 되는 일을 앞선 고민이나 노력없이 해달라고 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조금 더 좋은, 마음에 걸리지 않는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도진은 고민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건 구역 변경을 하지 않고 본래 계획대로 재개발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낙후되어 재개발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동네를 완전히 밀어버림으로 인해 갈곳 없는 '난민'이 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낙후되었다고 하나 나고 자란 '고향'이기에 떠나기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분명히 있다.
구역이 변경되면서 선택된 낙후된 동네.
그 동네가 아닌, 본래 구역이었던 산의 외곽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것.
애초에 재개발 계획에서는 그 산을 깎거나 밀어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려 했다.
요즘 대세가 자연과 어우러지는 주거였으니까.
다만 산을 포함시킬 수 없게 됐으니 낙후된 동네를 밀어 버리고 녹지를 조성하는 쪽으로 계획을 비틀었다.
당연히 이건 하지 않아도 될 비용 소모, 그것도 엄청난 지출이 되니 시공사 측에서도 달갑지 않다.
그러니까 원점으로 돌아가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야생동물들이다.
산의 외곽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대로 공사를 진행하면 안 된다며 환경 단체와 동물 보호 단체가 들고일어났다.
사실, 과거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잡음이야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재개발 사업의 구역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데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건 무공으로 인해 '자연 보호'가 그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무공에 생명을 불어 넣은 내공, 기(氣)라는 건 자연의 기운이니 곧 자연의 기운이 강할수록 내공을 쌓는 게 유리해지니까.
들고일어난 것이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돈을 노린, 조중림의 거친 표현을 빌리자면 '기생충'이었음에도 엄청난 지출을 감수하고 구역 변경을 하게 된 배경이다.
-어렵네요.
-그렇구나. 세상이 참 복잡해졌어.
이번 일은 스승들도 크게 조언을 해 줄 수 없었다.
단순한 인간 관계 등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복잡한 현대의 '시스템'이 얽힌 일이었으니까.
'천마신교의 지존'이라면 몰라도 아직 학생인 '잠룡 김도진'이 해결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다.
상책(上策)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중책(中策),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더라도 나쁘지 않은 해결책을 쓸 수밖에 없나 싶었던 때였다.
"도진아."
"왜 그래, 지윤아."
도진을 찾아온 나지윤의 얼굴이 미묘했다.
무언가 보통이 아닌 정보를 가져왔음을 짐작케하는 얼굴이었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한 도진에게 나지윤이 말했다.
"그 산에, 영물이 있다는 것 같아."
* * * *
내공은 생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은 꽤 중요한데, '인간'이 아니라 '생명'이란 단어를 썼다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내공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심지어 식물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여럿 나왔으니 무협지에서 가끔 등장하곤 하는 지능이 높고 가죽이 강철처럼 단단하며 발톱은 철판마저 찢는 영물들, 그런 영물들을 연상케하는 내공을 익힌 인간에 비견할 수 있는 동물들이 희소하다고는 해도 발견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런 동물들을 '영물(靈物)'이라 불렀다.
그런 영물이 발견됐다고, 나지윤은 말한 것이었다.
"영물이라고? 정말?"
세계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발견되는 영물이 뜬금없이 재개발 예정 구역에서 나왔다고?
당연히 상상도 못한 일일 수밖에 없었는데 나지윤은 확정된 건 아닌듯 입술을 오물거리다 말했다.
"사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거든. 재개발 예정 구역은 산의 외곽이었는데 그 외곽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야생 동물들이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그래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별개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동물들이 산 깊숙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역인 외곽으로 나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 이유가 강력한 영물의 등장으로 인해 외곽으로 밀려난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문가들이 추적을 하는데도 잡히지 않고 심지어 배설물 등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어. 만약 초기에 남아 있던 미미한 흔적들이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거라는 보고서였지."
제아무리 동물이 영악하다 해도 전문가들을 이 정도로 따돌리고 모습을 감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육체 능력, 혹은 지능이 있다는 소리이며 곧 '영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잖아?"
"응, 맞아."
영물의 등장은 재개발과 관련된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만들 만큼 커다란 변수였다.
땅을 파다 국보가 나온 수준이다.
"후배!"
잠시 도진과 나지윤의 이야기가 멈춘 틈에 활달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건 유지은이었다.
그날 도진이 돕고 싶다는 말에 '나도!'라고 외치던 유지은은 나지윤을 거쳐 도진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사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대번에 짐작하고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나랑 같이 실습하러 가자!"
* * * *
영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극비였다.
아직 확정된 이야기도 아닌데 소식이 흘러나가 대혼란이 일어나고 사람이 몰리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정말로 영물이 있으면 더더욱 통제가 필요한 일이고.
때문에 비밀리에, 그리고 빠르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의뢰가 명망 있는 무림 세력 몇 곳에 들어갔고 그중 한곳이 정의검가가 되었다.
당연히 비밀 엄수를 해야 하는 계약이었고 눈에 띄어서도 좋을 게 없었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그러나 신뢰할 만한 실력을 가진 무인들이 선발되었고 그 안에 유지은이 포함됐다.
명목은 전문가들의 산행을 호위하기 위한 고용.
그러나 사실은 영물 발견시 필요한 무력의 확보와 행사를 위한 고용이다.
이 의뢰에 유지은은 도진이 동행하기를 바랐다.
"제가 낄 수 있는 거예요?"
비밀 엄수 의무가 있는 의뢰에 외부인인 도진이 낄 수 있냐는 물음에 유지은이 씨익 웃었다.
"저번에 식객으로 네 이름을 올려뒀잖아. 그러니까 돼."
식객은 머무는 동안만이라고는 하지만 그 세력의 구성원으로 취급된다.
여기에 직계인 유지은의 보증이 더해진다면 참여가 가능하다고 한다.
설령 식객에 유지은의 보증이 있다 해도 실적이 없었다면 반대에 부딪쳤을 텐데 보증하는 대상이 '바로 그 잠룡'이기에 잡음 없이 받아들여졌다.
도진으로선 부탁을 해서라도 끼고 싶었던 일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요, 선배."
"응응. 고맙지?"
"네. 나중에 홍시 껍질이라도 까 드릴게요."
"오! 그건 생각도 안 해봤는데 설레네. 기억해 둘게."
그리하여 도진은 2학년 첫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 * * *
영물이 관련된 일이었기에 준비는 번개같이 진행되었고 다음날 아침 바로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마침 토요일이었기에 따로 수업을 빠지기 위한 실습계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유지은이 포함된 정의검가 사람들과 함께 잠룡문 문주이자 정의검가의 식객 자격으로 정부에서 파견한 조사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조사대의 책임자가 공무원 느낌을 물씬 풍겨 조금 경직된 분위기이긴 했으나 별다른 마찰없이 출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산의 입구에서 벌어졌다.
"뭐야?"
"재개발 반대 시위하는 단체들이군요."
조사대의 대장을 맡은 깐깐한 인상의 사람이 옆에 선 대원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멀쩡한 산의 입구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다.
곳곳에는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붉고 노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으며 빨간 조끼로 복장을 통일한 사람들이 다가오는 조사대에게 은근한 시선을 향했다.
이곳을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이런 조치를 한 적이 없었으며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이없게도 국가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단체가 멋대로 국유지와 사유지가 섞여 있는 산을 점거한 꼴이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그의 입장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당장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
"왜 입구를 막고 있습니까."
대표로 보이는 배가 많이 나온 남자가 나섰다.
"이곳을 재개발하기 위해 동물들을 쫓아내거나 산을 훼손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겁니다."
"……하?"
너무나 당당한 태도와 그렇지 않은 어이없는 내용에 조사대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생각을 정리해 입을 열었다.
"그건 여러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럴 자격도 없구요. 그만두십시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저희가 나선 겁니다. 자연과 동물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협조해 주십시오."
조사대의 대장은 꽤 깐깐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기에 원칙을 잘 지키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굳이 설득하려드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대화를 중단하기로 했다.
"이렇게 입구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계시면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만 말하고 그는 입구를 지나가려 했다.
"어허. 협조해 주십시오."
그러나 당연하게도 붉은 조끼를 입은 사람들에게 바로 제지당했다.
"…무슨 짓입니까?"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 보았지만 단체의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이곳을 다시 재개발 구역으로 만들기 위해 온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온 겁니다. 더 이상 방해한다면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조사대 대장의 딱딱한 말에도 단체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자연 보호를 위해 봉사하는 우리를 공무집행방해죄로 잡아가겠다구요? 하! 이게 바로 횡포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좋습니다. 잡아가 보십시오!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겁니다!"
바리케이드 앞에 붉은 조끼들이 장벽을 만들듯 섰다.
조사대 대장은 막무가내인 그들의 태도에 더욱 인상을 썼다.
그리고 바로 그때, 조사대 무리에 조용히 있던 도진이 말한 것이었다.
"이분들, 돌팔이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