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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89화 (289/741)

288화

무림에는 무가(武家)와 상가(商家)가 있다.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무가란 무당파, 화산파 같은 무공이 중심이 되는 세력이고 상가는 무슨무슨 상단 할 때의 그 상단 가문을 들 수 있다.

현대의 세력을 예로 들자면 정의검가, 호원무가, 태양권가, 단파문 등은 무가이고 금화나 오성은 상가다.

복잡하게 이론을 들지 않아도 무가와 상가의 구분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어렵지 않다.

한데 이 구분이 시간이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있었으니 무가와 상가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태양권가를 예로 들 수 있다.

태양권가는 무공이 주가 되는 대한민국의 명문 무림세가다.

그러니까 당연히 무가이지만 동시에 태양 그룹이라는 재벌 가문이니 상가라 해도 틀리지 않다.

명문 무림세가이면서 재벌가.

태양권가는 무가와 상가의 구분을 허물어 버리는 예가 되는 것이다.

태양권가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무가가 사업체를 운영하는 건 이제 드물지 않은 일이었고 반대로 상가가 강력한 무공을 익히고 세가화(世家化) 되는 것 또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전문가들은 머지않은 미래에는 무가와 상가의 구분이 없어질 거라 입을 모아 말했으며 무공은 자본주의 시대의 '돈'과 같은 것이 될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런 미래가 이미 도래한 국가로 일본을 꼽았다.

실제로 일본은 무공이 곧 돈이요, 명예요, 또 권력인 나라가 되었기에 이보다 강렬하고도 명확한 예시가 없었다.

한국 또한 그런 시대가 올 거라 그들은 주장했는데, 그것을 반박할 수 없게 하는 예시가 한국에도 있었으니 바로 군홍무가였다.

정치권과 유독 끈끈한 관계의 군홍무가는 무력과 동시에 권력을 가졌으며 자연스레 금력(金力) 또한 가지게 되었다.

그런 군홍무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번 도봉구 재개발 사업이다.

"우리 대산건설은 군홍무가의 1차 하청 같은 포지션입니다. 아버지가 군홍무가에 연줄을 대고 있거든요. 그 덕분에 군홍무가의 '하청'을 우리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가의 성격을 띠고 있는 군홍무가는 따로 건설회사를 운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영향력으로 재개발 사업의 이권에 개입했고 '1차 하청'인 대산건설을 끌어들임으로써 여러가지로 해먹을 수 있도록 판을 짰다는 요약이다.

"저희가 기생충들이 깐 협상 테이블을 걷어찬 건 맞는데, 구역 변경을 진행한 건 저희가 아니라 군홍무가였습니다."

기생충이란 돈을 노리고 시위를 하는 단체들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의견을 냈고 구역 변경의 진행은 군홍무가에서 했다는 거네."

"예, 맞습니다."

조중림이 고개를 끄덕였고 도진은 침묵했다.

이 이야기를.

도진은.

'이 시기였어.'

알고 있었다.

도봉구 재개발 사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고 도진 또한 뉴스는 물론이요 꺼라 위키의 정리된 문서를 몇 번이나 읽었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전생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

당시 용역 업체랑 충돌한 사람들 중에는 숭무고의 학생도 있었다…… 는 내용을.

'태웅이가 황룡이란 별호를 얻은 건 본 시험에서의 모습 때문이었지.'

별호라는 건 보통 실력만으로 붙여지는 게 아니라 '명성'이 있어야만 했다.

스스로 나 누구요하고 자칭해봐야 비웃음만 살 뿐 별호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벽태웅이 이렇게 빨리 별호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본 시험에서 도진과의 한 수 교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생에서 벽태웅은 이 시기 눈에 띄는 학생일지언정 아직 후기지수로서의 별호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벽태웅이, '도봉구 재개발 사건'에서 보육원과 얽힌 일로 인해 무인으로서 이름을 떨칠 수 없게 되는 불행한 사건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된 벽태웅은 그저 '숭무고의 학생 중 하나'로 기록에 남았고 무대에서 퇴장했다…….

도진은 그런 결론에 이르렀고 위지혁과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네 생각이 맞을 게다.

-이 아이는 아직 덜 여물었지. 하물며 보육원은 이 아이의 역린.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달려들었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전생의 비사(祕事) 아닌 비사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 고맙다."

그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진은 집행부의 일도 미루고 동기 한 명을 만났다.

"어, 오랜만이야. 잘 지냈냐?"

그 동기의 이름은 무진혁.

다름 아닌 군홍무가의 둘째 무진혁이었다.

* * * *

"뭐 먹을래? 내가 하나 쏜다."

"아, 그래. 콜라."

"오케이."

오랜만에 보는 무진혁은 도진이 슬쩍 당황할 정도로 친근하게 굴었다.

본래 에스포로 도진과 대립했으며 리더 노릇을 하던 권민국과 비선 실세 포지션이었던 곽필섭이 나락으로 간 뒤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여 지내던 녀석이었다.

도진과 사이가 좋을 이유가 없는 녀석인데 뜬금없이 갑자기 만난 오늘 친구 먹고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온 듯 구니 아무리 도진이라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원인은 무진혁만의 '내적 친밀감'이었다.

도진에게 적대적이었던 무진혁은 그러나 저번의 비무로 인해 심경에 변화가 왔으니 어찌되었든 도진과의 '화려한 비무' 덕분에 외부에서의 평가는 물론이요 집안에서의 평가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잠룡이랑 손발을 맞춰 뭔가를 보여줬다!'는 생각이 곧 혼자만 하는 연애, 아니 혼자만 쌓아가는 우정처럼 도진에 대한 생각을 바꿨고 그게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진 것이다.

도진으로선 전혀 의도치 않았던, 그리고 전혀 모르던 무진혁의 내적 친밀감.

한데 그것이 또 '나비효과'가 되었다.

도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속을 읽었다는 듯 무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재개발 때문에 온 거지? 맞아. 내가 조금 손을 썼어."

"원래는 거기에 우정한 걔 절이 포함될 뻔 했는데 내가 건의해서 바꿨어. 그거 때문에 얼굴 붉히는 건 그렇잖아?"

"…응, 그렇지."

도봉구 재개발 사건.

그것은 본래, 조용히 지내던 유룡 우정한이 에스포를 징치하며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재개발 구역의 변경 범위 안에 유룡 우정한이 지내는 절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의 소설 한 권 분량은 나올 그 엄청난 사건의 원인.

한데 그것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흐름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세상의 흐름이란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수많은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고 또 필연이 모여 우연을 낳는다.

얼마 전 도진은 전생에서 수수께기로 남았던 일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어떻게 문월고에 입학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비밀이었으니 이 또한 비사라면 비사였다.

전생에서 뺑소니의 범인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했던 문월동에서 마주쳤던 일진 양아치들.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구다훈이 연관되어 있었다.

구다훈의 아버지는 문월동의 터줏대감이자 한량에서 재개발 추진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며 패악질을 부리던 인간이었다.

이렇다 할 직업도 없는 건달에 가까웠던 인간이 감투를 쓰고 자그마한 힘을 얻자 아들을 무림학교에 넣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한데 아들 하나만 넣자니 부자연스럽게 티가 나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아무나' 하나 섞었으니 그게 바로 도진이었던 것이다.

나성보가 구장성을 탈탈 털다 나온 범죄 중 하나였다.

이번 생에선 도진이 없으니 다른 학생을 넣었는데 관련 비리로 문월고까지 탈탈 털리고 있다고 들었다.

전생에서는 평생 알 수 없는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알고 나니 참 별거 없는 이야기였고 코웃음이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이번에 알게 된 비사, 그리고 달라진 이야기는 꽤 의미가 깊었다.

유룡 우정한은 자신이 그렇게 '무림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원치 않았지만 해야만 할 일이었기에 무림인이 되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 원치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 도진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바뀐 건 아니었다.

"음, 근데 미안하지만 벽태웅이 걔는 도와주기 힘들 거 같아."

"이미 한 번 내가 고집을 부렸고 다 결정이 됐는데 거기다 대고 다시 내가 나서봐야 계획이 바뀔 순 없는 거거든. 게다가 미리 알았다고 해도 거기가 완전 중심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미안하다."

순순히 미안하다고까지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해봐야 억지 트집잡기밖에 안 된다.

애초에 무진혁은 직계라고 해도 아직 본격적으로 가문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다 떠나서 도진의 친구인 우정한을 생각해 나선 것만 해도 칭찬해 줄 일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신경써 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잘가라."

마음 속에서 명확한 빌런으로 존재하던 무진혁과 이렇게 인사하고 헤어지게 되는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도진은 변화한 관계로 인해 조금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날, 벽태웅이 자란 보육원에 방문했다.

오성아, 유지은, 그리고 벽태웅과 함께 방문한 도진을 원장 부부가 반겨 주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 태웅이 선배시라구요."

"아하하. 예, 안녕하세요."

반겨주는 두 사람은 도진이 '유명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조카의 선배이기에 반겨주는 기색이 가득했다.

유지은 또한 다르지 않았고 오성아 역시 부담가지지 않도록 평범한 손님으로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벽태웅.

"너 이놈 시키! 선물 보낸 거 너지?!"

짝!

"아, 고모! 아파요."

"돈이 생기면 저금을 해서 너 장가갈 때 써야지! 이렇게 잔뜩 쓰면 어떡해!"

짝!

"아프다니까요, 고모!"

작고 마른 손이 거목 같은 팔뚝을 때려봐야 아플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태웅이 아프다고 하는 건, 그 손에 담긴 힘이 아니라 마음이 벽태웅의 근육마저 뚫고 들어가 가슴에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었다.

찰싹찰싹 벽태웅을 때리며 나무라는 목소리는, 액면만 보면 사납고 정성을 몰라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란 말과 행동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민감한 동물이다.

벽태웅의 고모는, 낳은 정은 없어도 키운 정이 가득했으니 누가 보아도 그것이 애정이 담겨 있는 나무람이자 고마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황룡이라 불리는 후기지수라도, 숭무고 동기들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벽태웅이라도 고모의 손길은 매울 수밖에 없었다.

"차라도 마시고 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원장 부부는 조카의 손님을 홀대하지 않았다.

차와 과자는 단출했지만 그 정성은 결코 단출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이들의 얼굴은 크게 그늘지지 않았으며 그 옷과 얼굴이 꼬질꼬질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뼈가 뒤틀리고 힘줄이 닳은 만큼, 아이들은 구김살이 없었고 깨끗했다.

도진 일행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권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원장 부부는 그것을 전혀 권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티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조카의 손님으로 일행을 대해주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도진은 말했다.

"돕고 싶은데요, 누나."

그리고 오성아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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