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88화 (288/741)

287화

"제가 자란 보육원은 고모부와 고모님께서 운영하시는 곳입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

도진은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벽태웅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학생들 간의, 그것도 집행부의 부원이 연관된 일이었기에 보고서를 올려야 했고 그 담당으로 도진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도진이 섭음술을 뚫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배경 설명을 포함해 이야기를 해야 했고 여기서 벽태웅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 피가 이어진 고모부, 고모는 아니고 원장님들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벽태웅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보육원에 버려져 있던 것을 원장 부부가 발견하여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사정으로 그 보육원에서 자라게 되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원장 부부를 고모부, 고모라 불렀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사니까 우리도 가족이잖아?

-우리가 부모님은 되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고모부와 고모가 되어줄 수 있길 바라.

"그래서 고모부와 고모구나."

"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보육원은,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벽태웅은 행복했었다.

"고모부와 고모를 위해서 되는 대로 기부를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왔네요."

공교로운, 그래도 인연이라면 정말 인연이었다.

벽태웅이 자랐던 보육원이 벽태웅이 이곳에서 가장 처음 마찰이 있었던 동기의 회사가 후원하던 곳이었다니.

"이런 말하긴 좀 뭐하지만,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자면 벽태웅에 의해 보육원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또 심도 있게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무협지에서야 캐릭터의 처절한 불행을 연출하기 위해 자랐던 보육원 등을 몰살하는 스토리가 나오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곳은 '중세'가 아니라 '현대'다.

무림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법치국가인 현대에 섞여 있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살인이 허락되는' 무림이라 해도 현대에 살아가는 이상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었고 그 선 안에 몰살이라는 정신나간 짓거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부가 붕괴하고 테러가 일상인 막장 국가가 아니고서야, 그리고 가진 게 많은 집단일수록 명분 없는 살인도 경계하는데 시민의 몰살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짓이다.

가진 게 있든 없든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건 스스로의 인생 또한 끝장난다는 확정적인 결과를 마주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후원이 끊기는 것인데 그 걱정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다른 쪽으로 금전적인 문제가 생긴다 해도 도와줄 사람이 집행부에만 여럿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지었고 사건 또한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나지윤에게 듣게 되었다.

* * * *

도진은 자투리 시간에 휴대폰으로 뉴스를 읽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연신극기공을 운용하여 몸을 한계까지 단련하고 샤워 후 '가볍게' 몸을 풀 때 등이다.

심도 있게, 나지윤처럼 온갖 정보를 다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많이 본 헤드라인 뉴스는 빠짐없이 살펴보는 것이다.

-흑도 무인 심 모씨, 알려지지 않은 독에 살해당해…….

'음.'

현대에서 독은 '비대칭전력' 중 하나였다.

현대가 무림보다 앞서는 몇 안 되는 것이 바로 독이었기에 더더욱 무섭다.

때문에 독은 생각 이상으로 취급에 강력한 규제가 걸린다.

냉정하게 말해 하루에도 몇이나 죽어 나자빠지는 뒷골목 흑도 잡배의 죽음이 헤드라인 뉴스로 뜬 건 그런 배경이었다.

-구역 변경, 도봉구 재개발구역 마찰 봉합되나…….

전생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도진은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정보들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 믿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고 깊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때문에 오늘도 헤드라인 뉴스들을 빠짐없이 읽고, 당연하게 된 소담과 함께 벚꽃길을 걷는 일상의 연장으로 집행부실에 들른 것이었는데…….

"안녕하세요. 음……. 분위기가 왜 이래?"

조금 일찍 도착한 집행부실 안의 분위기가 묘했다.

"어서 와, 후배들. 이야기는 지윤이에게 들으면 돼."

한유아의 말에 도진의 시선이 나지윤에게로 향했고, 나지윤이 말했다.

"음……. 우리 새내기인 태웅이에 관한 이야기야."

"태웅이?"

떠오르는 건 조중림과의 마찰이다.

설마 조중림이 또 무언가 사고를 쳤나 생각했는데 이야기는 그 규모를 훨씬 넘어 있었다.

"오늘 본 뉴스 중에 도봉구 재개발 구역의 변경 뉴스가 있었잖아?"

나지윤은 도진이 아침마다 뉴스를 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했다.

"응."

"거기에 태웅이가 자란 보육원이 포함돼 있더라고. 근데 그 재개발 사업의 주축에 대산건설이 있어."

"그거……."

큰 그림이 슬며시 보이는 거 같다.

나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합리적 의심이지. 그래서 태웅이가 뛰쳐나갔고 정아가 같이 갔어."

"…일단 나도 가볼게.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

"태백관으로 갔을 거야."

"알았어."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소담과 함께 태백관으로 향했다.

가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도봉구 재개발이 근처 산의 야생동물들 때문에 잡음이 생겼다고 했지.'

도봉구의 낙후된 지역의 재개발이 결정되고 사업을 진행하려는데 돌연 예정 지역 안에 포함된 산에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음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 때문에 환경 단체, 동물 보호 단체 등이 들고일어나며 발생한 잡음이었다.

이게 순수한 의도를 가진 단체가 아니라 돈을 노린 역겨운 것들이다 보니 잡음이 더 커졌는데 대산 건설도 '성깔 있는' 곳이다 보니 그들과 협상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그게 구역 변경이었던 거지.

이쪽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도진은 그 내막을 깊이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으니 그게 바로 변경된 구역 안에 벽태웅이 자란 보육원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콰앙-!

태백관이 가까워지자 폭음이라 해야 할 만큼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익숙한 기세가 느껴졌으니 벌써 일이 터졌다는 걸 알게 된 도진이 속도를 높였고, 곧 조중림의 목을 붙잡고 벽에 처박아 버린 벽태웅을 볼 수 있었다.

"아니라고? 정말로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씨이……발. 아니라고 이 개새꺄……!"

학생들은 물론 직원들의 시선까지 모으고 있음에도 벽태웅은 아랑곳않는 기색이다.

그동안 보아 온 '곰같은' 면모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흥분한 모습이었는데, 그럴 만했다.

으레 그렇듯 이번 재개발 구역은 상당히 낙후된 곳이다.

보상을 해준다 해도 재개발된 곳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흔하디흔한' 문제가, 벽태웅이 자란 보육원은 너무나 심각했던 것이다.

-무허가 시설에 무단 점유까지 걸려 있었던 모양이야. 원장 부부가 잘못한 건 아니고, 여러가지로 꼬여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처벌받지는 않겠지만 보상도 거의 못받게 됐다는 게 문제야. 아이들만 해도 스무 명이 넘는데, 한순간에 날벼락이지.

만약 조중림이 벽태웅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벌였다면 이보다 효율적이고 치명적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목이 붙잡힌 채 이를 악문 조중림의 표정을 보며 그 가능성을 의심했다.

'혼자 벌일 만한 일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너무 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재개발 사업이 '어떻게 어떻게' 됐고 거기에 조중림이 개입해 변경되는 구역 안에 벽태웅의 보육원이 포함되도록 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 가능성을 논하기가 힘든 규모의 일이다.

"태웅아, 진정하자, 진정!"

그래서 정아가 진땀을 흘리는 벽태웅의 곁으로 다가가 그 우람한 팔뚝을 잡았다.

마치 며칠을 굶은 곰이 사냥감을 덮칠 때처럼 번들거리는 눈의 벽태웅은 선배인 주정아의 만류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태웅아, 잠깐만."

꾸욱.

그런 벽태웅의 팔에 도진의 손이 얹힌 모습은 정말로 흥분한 곰의 팔을 사람이 붙잡은 것만 같았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며 성장한 도진 또한 키가 180에 달했고 예술과도 같은 근육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벽태웅은 그만큼이나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던 것이다.

한데.

파르르…….

그런 도진의 손이 닿은 순간 벽태웅의 근육으로 꽉 들어찬 두터운 팔뚝에서 힘이 풀리며 손가락이 벌어졌다.

"콜록! 콜록!"

목을 붙잡은 손이 풀리자 조중림이 허리를 숙이며 격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드러난 조중림의 목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있으니 벽태웅의 무시무시한 악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조중림 또한 숭무고에서도 돋보이는 피지컬을 지닌 내가고수인데 벽태웅의 악력을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관심은 다른 데를 향했다.

"와, 잠룡 선배 진짜……."

"저러니까 어나더 클래스구나……."

"진짜 봐준 거였네."

인간이 미쳐 날뛰는 불곰의 팔뚝을 잡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그리 힘을 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도진의 손에 벽태웅의 아귀가 풀려 버리는 결과가 나왔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내공의 고수라 해도 육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게 가능한지 지켜보던 1학년은 물론이요 2학년들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농담조로 잠룡의 물리 엔진이 고장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도는데 그게 농담같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 관심 속에서 벽태웅의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자신을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힘을 겪는 상황에 이성이 차가워진 것이었다.

도진이 웃으며 벽태웅과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일단은 중림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때?"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도진과 소담, 주정아, 그리고 벽태웅과 조중림이 태백관 안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이거 제가 한 일 아닙니다."

조중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이었다.

그러니까 흔해빠진 멍청한 양아치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스마트한 악당이었다.

도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함을 주장하기 위해 섭음술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주변에 들리도록 힘주어 말하는 조중림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다 보는 가운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이런 짓거리를 할 만큼 조중림은 바보가 아니었다.

"응, 나는 니 말 믿어. 그러니까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줄래?"

화를 가라앉히는 벽태웅 대신 도진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조중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 말했다.

민감한 이야기였는지 이번엔 섭음술을 펼쳤다.

"일단 이번 재개발 사업의 중심은 우리 대산건설이 아닙니다. 주축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1차 하청이란 말이죠."

"진짜 중심에 있는 건…… 군홍무가입니다."

"어? 군홍무가? 무진혁네?"

그리고 나온 말은 과연 섭음술을 써야 할 만큼 엄청난 내용이었다.

주정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을 만큼.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들은 도진의 눈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잠깐만. 이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