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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87화 (287/741)

286화

대산건설의 창립자이자 현 회장은 인물은 인물이었다.

용역 깡패이긴 했지만 무작정, 그리고 무식하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깽판을 치지 않고 '스마트하게' 일처리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마인드에 따라 싹수가 보이는 정보 회사와 협업했으니 대산건설 덕분에 업계에서 힘깨나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노우정보'였다.

규모에 비해, 업계의 특성을 고려해도 이상할 만큼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본래 구린 일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곳이었기에 더더욱 양지의 시선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중림이 연락을 넣은 곳이 바로 그 노우정보였다.

사람 뒤를 캐 약점을 잡고 그 약점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방식의 일처리는 노우정보의 특기 중 특기였고 얼마 가지 않아 직원 중 한 명이 조중림이 원하는 정보를 물어왔다.

30대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그러나 사실은 독사의 성품을 지닌 직원이 공손한 자세로 조중림에게 보고했다.

"나름 용의주도한 놈이었습니다. 보육원에 후원을 하고 있다는 걸 제법 잘 숨기고 있었습니다."

"보육원?"

"예. 우리와 접점이 없었다면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을 수준이었습니다."

보육원, 그러니까 흔히 고아원으로 불리는 시절에서 벽태웅은 자랐다며 직원은 설명을 시작했다.

"부모도 모르고 버려져 있던 것을 원장이 주워다 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육원에 애착이 많은 모양입니다."

대번에 약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보였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그게 약점이 될 거라 생각했는지 나름 익명으로 기부를 했는데 그게 도련님의 회사에서 후원하는 곳이라 쉽게 파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후원하는 곳이라고?"

"예. 회장님이 좋은 뜻으로 후원하시는 곳 중 하나였습니다."

좋게 포장해 '좋은 뜻'이고 절세를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기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의도가 어떻든 좋은 일은 맞지만 좋은 뜻은 아니었다.

조중림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밖에 내지 않고 입꼬리를 비죽 올리고선 말했다.

"그 후원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는데."

* * * *

며칠 뒤.

조중림은 기숙사 공용 식당에서 벽태웅을 마주했다.

조중림이 벽태웅에게 따로 연락해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도진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눈치가 좋은 벽태웅은 조중림이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그를 마주했다.

어떤 수작을 준비했을까.

여러가지 경우를 생각하고 대비를 했던 벽태웅은, 그러나 조중림의 첫 마디에 바로 얼굴이 굳고 말았다.

"너, 돈 좋은 데 쓰고 있더라."

"……."

모르고 들으면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그러나 조중림도 벽태웅도 숭무고 상위권의 학생이 될 만큼의 천재였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너, 네가 자란 보육원 꽤 아끼고 있는 모양이네? 내가 좀 알아봤지.

조중림의 의도를 벽태웅은 대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추잡하면서도 효과적인 협박 수단을 들고 온 조중림의 태도에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보육원, 우리 회사에서 후원하던 곳이더라. 너랑 나랑 참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안 그러냐?"

"…그렇네."

숭무고와 숭무영재고 내에서 '카스트'가 나뉘는 전형적인 관계 중 하나였다.

조중림은 마치 입꼬리를 주욱 찢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좀, 어쩌냐. 우리 회사가 요즘 큰 프로젝트 하느라 자금이 좀 딸리는 모양이야. 후원 규모를 줄일 수도 있다고 하네?"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반쯤은 거짓말이지만 조중림은 실제로 보육원에 책정된 후원금을 줄일 수 있었다.

그것은 조중림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자 앞에서는 처신을 잘하는 조중림은 당연히 집안의 절대권력자인 아버지의 뜻에도 거스르지 않고 살아왔다.

-넌 명문고에 가라. 그래, 숭무고가 좋겠어.

아버지는 '못 배워 먹은 놈'이란 말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것이 콤플렉스가 되고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아들로 대리만족을 하려 했다.

형은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하지 못했지만 조중림은 성공했다.

단순히 턱걸이를 한 것도 아니고 입학 시험 비무에서 무려 4강을 한 덕에 은밀히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를 총애했다.

-사내 새끼라면 그런 면도 있어야지.

본래 예뻐했지만 그게 더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 덕분에, 조중림은 담당 부서의 직원에게 연락해 기부금의 용처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개입이었으나 애초에 그의 아버지부터가 그런 걸 장려하는 인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뒤탈이 나지 않도록, 설령 녹음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은근하게 하는 말이었으나 결과만큼은 거짓이 아니었기에 벽태웅은 조중림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나 때문은 아닌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뭐 너랑 내가 좀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어도 도의적으로 미안해서 말이야."

조중림이 원하는 바는 명백했다.

-꿇어, 이 새끼야.

키 때문에 올려다 보는, 그러나 명백하게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의 조중림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설령 벽태웅이 모른 척하고 날뛰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좋다.

그건 곧 후기지수 황룡의 완벽한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쥐뿔도 없는 놈이 명성마저 잃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

벽태웅은 감정이 일렁이는 눈을 잠시 감았다.

그리고 그 눈을 다시 떴을 때, 조중림은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은 벽태웅의 모습에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고.

무언가를 할 틈도 없이 벽태웅이 섭음술을 깰 만큼 강렬한 내공을 담아.

"미안하다."

허리를 숙이며 사과해 버렸다.

"어? 뭐야?"

"왜 사과해?"

안 그래도 덩치 큰 두 사람의, 그것도 바로 며칠 전 마찰이 있었던 두 사람이 섭음술로 대화하고 있었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벽태웅의 굴욕을 연출할 생각이었기에 의도한 바였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 싯팔?'

과장 좀 보태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아예 90도로 숙이며 벽태웅은 내공까지 실어 만천하에 사과하는 걸 알렸다.

그렸던 그림들이 있는데 이건 완전히 그림이 종이를 찢어 버린 수준이었다.

순간 머리가 덜컥 굳더니 억지로 움직여도 공회전만 해댔다.

그 사이 벽태웅은 청산유수처럼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네가 우리 보육원에 신경 써 줄 만큼 착한 친구라는 걸 모르고 오해를 했었어. 심지어 회사 차원에서도 신경을 써달라고 말까지 해 주는 네가 나쁜 사람일 리가 없지."

"그날은 내가 오해를 했었어. 그러니까 사과할게. 미안해. 앞으로도 우리 보육원을 잘 부탁해."

"아, 아, 어……."

마치 0.0001초 차이로 승부가 나는 초고속의 레이싱 경주 중에 실수해서 차가 빙글빙글 도는 사이 모든 게 끝나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결론이 나 버렸다.

그리고 그 상황이 더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와, 뭐야. 싸우는 줄 알았더니 남자답게 대화로 해결하는 거였어?"

"어?"

"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켜보던 학생들이 모조리 깜짝 놀라 경악했다.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모를 수가 없을, 현 숭무고 최고의 명성을 지닌 2학년.

잠룡 김도진이 식당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뭐야?'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 누구도 이곳에 김도진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

중간에 들어왔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있었는지.

누구 한 명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뽐내는 김도진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그 누구보다 '존재감'에 민감한 것이 무림인이다.

눈치채지 못하게 뒤를 잡히면 그대로 목숨을 헌납할 수도 있는 것이 무림인이니까.

적어도 자신의 영역 안에 스며든 존재가 있다면 무조건 알아채야만 하는 것이다.

한데 아무도, 그것도 심지어 '잠룡'의 존재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이 자리의 모든 시선이 경악으로 물든 채 도진에게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집중 속에서 도진은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개 미친.'

잠룡을 상징하는 건 압도적인 실력이다.

한데 이제 거기에 이제 '압도적인 은신술'까지 더해야 할 것 같다.

-제법 태를 갖추게 되었구나.

-감사합니다.

도진의 무공은 패도(覇道)만이 아니다.

사신 장호에게 배운 사신(死神)으로서의 소양 또한 갖추고 있다.

무흔잠영(無痕潛泳).

선에 대한 이치가 깃들어 있는 이 몸을 다루는 법은 대상의 시선을 '나'에게 잇지 않는 것을 넘어 선이 이어져도 의식하지 않도록 그 존재를 자연스레 녹아들게 만든다.

그래, 숨기는 게 아니라 '녹아들게' 만드는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숨은 것은 사람을 더욱 자극한다.

허나 길가의 흔한 돌멩이는 설령 눈에 들어와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기억에 일절 남지 않는다.

도진의 무흔잠영은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그 이치를 흉내나마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실이 지금이었다.

벽태웅이 나가는 걸 보았고 직감적으로 조중림을 만나러 간다는 걸 알았기에 은밀히 지켜보기 위해 무흔잠영의 묘리를 이용했다.

조중림의 어설픈 섭음술은 당연히 도진의 감각을 차단하지 못했고 대화 또한 고스란히 들었다.

처음엔 외통수라 생각했다.

조중림은 참 비열한 쪽으로 준비를 잘했고 당장 벽태웅이 어찌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한데 아니었다.

벽태웅은 자존심을 굽힘으로써 오히려 대역전을 해냈다.

-너는 할 수 없는 회심의 한 수로구나.

-예.

도진은 천마의 후계자로서, 소천마로서, 그리고 미래의 천마이자 신교의 지존으로서 결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천마이자 지존은 그 자신만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 때문에라도 서서 죽어야 했고 살아야 한다면 다리를 자르면 잘랐지 무릎을 꿇어선 안 됐다.

하지만 벽태웅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고 역으로 상대를 옭아매 버렸다.

만천하에 조중림의 수작이 드러나 버렸다.

목격자가 적지 않으니 입단속을 해도 이야기가 퍼져 나갈 것이고 조중림은 완전히 '새'가 돼 버렸다.

그뿐인가.

겉으로 보면 벽태웅이 조중림에게 사과하며 자신이 자랐던 보육원을 잘 부탁한다고 진지하게 말했고 조중림은 그걸 받아들인 모양새가 됐다.

심지어 회사 차원에서도 후원을 하고 있다는 게 언급됐으니 이제 조중림은 결코 보육원을 건드릴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명예를 걸고 지켜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외통수가 거짓말처럼 자살골로 둔갑한 꼴이다.

'녀석, 제법이네.'

정말로 인물이다.

황룡이란 별호를 얻었던 게 결코 과하지 않았다.

정말로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녀석이 이름을 떨치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자리를 수습해 주었다.

"남자답게 훈훈하게 사과까지 했는데 같이 밥 먹어야 하지 않겠어?"

"아, 아닙니다. 저는 이미 점심을 먹어서……."

"그랬구나. 생각해 보면 밥보다야 화끈하게 같이 술 한 잔 하는 게 낫겠네."

"예. 제가 다음에 자리를 한 번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조중림이 퇴장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우리도 순찰이나 하러 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진은 벽태웅과 함께 공용 식당을 나왔다.

조금 투박하지만 그렇게 조중림의 건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크게 확장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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