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2학년이 된 무림학교의 학생들은 중요한 선택 하나를 하게 된다.
일반 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듯, 그리고 대학에서 인문계와 자연계를 나누듯 '무림과'와 '사회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좀 더 세속적인 단어를 쓰자면 육식계와 초식계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림과는 극단적으로 말해 민간 무림 군사 기업 등이 수행하는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적나라하게 말해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심지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다.
사회과는 그에 비해 피와 살이 튀는 '무림'이 아닌 사회 속에 살아가는 무인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경찰로 따지면 같은 무림을 담당하는 부서라 해도 잔혹하게 사람을 살해하는 등의 마두(魔頭)를 상대로 사살 허가가 나오는 게 무림과고 경범죄자를 취급하는 게 사회과다.
도진을 포함한 2학년 이상 대부분의 집행부 멤버는 무림과를 택했다.
사회과를 택한 건 주정아뿐이었다.
"나는 가업을 이을 거니까."
그 외에 도진의 지인들로 범위를 넓히면 서태주는 무림과, 레드슈 멤버들은 사회과였다.
이렇게 과를 선택한 2학년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실습을 나가게 된다.
원칙적으로 1학년 2학기부터 실습을 나가는 게 가능하지만 숭무영재고를 포함한 대부분의 무림고 학생들은 2학년부터 무림, 혹은 사회에 진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이번 43기 응시생들의 본 시험에서 2학년들이 나선 것부터가 숭무고가 준비한 실습의 일환이었다.
참여하는 2학년들은 정식으로 '의뢰자'인 숭무고에게 의뢰를 받아 수행하고 대금을 지급받는 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습과 실습을 위한 더욱 본격적인 수업이 진행되기에 숭무고 내에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숭무고와 그 주변에서는 학교 내에 갖춰진 최고의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유명무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허나 그 범위를 숭무영재고까지 넓히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 오히려 수많은 환자들이 방문하고 그만큼의 치료가 이루어졌으니 수업과 실습에서 다치는 학생들 다수가 교내의 병원 신세를 지기 때문이다.
전담 코치나 트레이너, 그리고 주치의를 보유한 학생들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더욱 많다.
여기에 자신의 신체 정보를 노출하기 꺼리는 건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찬가지지만 단순한 외과 치료 등을 받는 데 그 정보가 노출될 일은 없었다.
기(氣)에 대한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평범한 병원의 장비로 그것이 노출될 일은 없으며 운기조식이라도 대놓고 하는 걸 스캔하지 않는 이상 민감한 '문외불출(門外不出)의 비기'가 드러날 일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정보를 숭무고가 자체적으로 엄격히 관리·분리 보관하기까지 하며 교내 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종사자는 심하다고 할 정도의 보안 서약을 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다 학생의 경우 치료비가 공짜이기까지 했으니 주치의를 두는 등의 제도는 활용하지 않아도 수업이나 실습 중 다쳤을 경우 그냥 가까이 있는 교내의 병원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이들의 상처는 '외과'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관련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고 실습이 필요했던 약리지가 파견된 이유였다.
열일곱이라고 하면 어린 나이였지만 무림에서는 열일곱을 성인으로 쳤다.
여기에 국가에서도 인정받은 의선약가에서의 시험을 통과했기에 약리지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그랬기에 숭무고에서 실습을 치를 수 있었다.
다만.
'음…….'
새하얀 피부에 새하얀 교복, 거기에 실습생을 상징하는 가운까지 걸친 그녀를 보며 도진은 사모예드를 떠올렸다.
겉으로는 냉미녀 스타일이지만 사실은 무른 성격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
그 성격이 무르기만 한 게 아니라 치와와처럼 욱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의선약가 본가에는 특성상 절박한 환자와 보호자들로 넘쳐나고 그들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만큼 절박하기에 쉽게 선을 넘곤 했다.
의선약가의 가주는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해 주었기에 '무림의 절반은 의선약가주 편이다'란 말이 나올 만큼 칭송받았지만, 어린 나이부터 그것을 지켜봐야 했던 약리지는 그로 인해 조금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약리지는 그런 진상을 마주하면 버튼이 눌린 것처럼 으르르, 하고 만다는 거다.
"선배님들도 잘 가르쳐 주시고 시설도 좋아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응, 잘 됐네."
실습생들은 교대로 병원 내의 숙소에서 당직을 서야 하고 당직 아니더라도 근처에 마련된, 학생 기숙사 바로 옆에 마련된 기숙사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시간에 약리지가 공용 식당에 들린 것도 그런 배경이었는데, 수련과 공부, 집행부 활동까지 병행해야 함에도 약리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불만이나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이미 본가에서 단련된 '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상에는 버티지 못하겠지.'
지금까지야 별다른 문제없이 잘 하고 있지만 만약 무언가 어긋나서 진상을 상대하게 되면 약리지는 분명히 들이받을 것이다.
'흐음.'
몰랐을 때면 모르겠는데 어쨌든 후배가 되었고 그냥 후배도 아닌 집행부 후배이니 도진은 이 새하얀 사모예드의 외모에 치와와의 성격을 숨기고 있는 후배가 봉인해 두었던 흑염룡, 아니 치와와를 해방했을 때 조금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 중 사고가 난다면 약리지가 먼저일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생각을 했고, 그 예상은 빗나갔다.
1호 사건의 주인공은 벽태웅이었다.
* * * *
금요일 오후.
집행부 활동도 끝나고 본가에 가기 전 도진은 유지은, 그리고 상미와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후배! 이제 나랑 같이 실습 다니자."
개파식에도 참석해 주었던 유지은은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날부터 시작된 '같이 놀자' 같은 어조로 하는 말이었다.
"네, 네. 선배. 괜찮은 일 있으면 꼭 선배랑 같이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2학년은 본격적으로 실습을 다니게 되는 시기다.
아예 실습만 다니는 수업이 있을 정도다.
도진은 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무공에 대한 원론적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수업 위주로 시간표를 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습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이론만이 아닌 현장에서의 경험 또한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유지은은 그런 도진에게 정의검가에 들어오는 의뢰를 협업의 형식으로 같이 하자고 매일 노래를 불렀다.
도진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오히려 좋은 이야기였기에 이렇게 달래듯 고개를 끄덕이기를 반복하는 나날이었다.
유지은을 달래며 도진의 시선이 상미에게로 향했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어?"
"네. 다 좋아요."
상미는 웃으며 진심으로 답했다.
비로소, 오롯이 혼자 가지게 된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거기에 매일 유일신님을 영접할 수도 있었으니 상미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 다행이네."
"흐음, 후배. 나도 상미처럼 세심하게 돌봐주면 안 돼?"
"아니, 선배. 제가 선배를 얼마나 챙겨주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라면 먹을 때는 나무젓가락 둘로 나눠 주고 포도 먹을 때도 껍질 벗겨서 알맹이만 먹여주는 그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건 아기 돌봐주는 수준이잖아요."
"응애."
"큽."
연상의 나이에 그렇지 못한 드립은 결국 도진을 웃기고 말았다.
비례하여 상미의 유지은에 대한 경계는 올라갔고.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
'음?'
어렴풋이, 멀리서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를 도진은 들었다.
평상시 불필요한 정보를 듣지 않을 수 있도록 감각을 일정 범위로 제한해 두었음에도 그 소리가 들렸던 건, 고함소리에 '악의(惡意)'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세가 담겨 있었고 그 기세에는 명백히 악의, 혹은 적의라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담겨 있었기에 도진의 감각에 잡혔던 것이다.
"들었어, 후배?"
"네."
그리고 그 악의를 유지은은 물론이요 한천검공에 의해 감각이 날카로워진 상미 또한 감지한 듯했다.
"한 번 가볼까요?"
"응."
"네."
도진은 유지은, 그리고 상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숭무고 기숙사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허나 기세에 악의를 담아 고함을 칠 만큼의 일이었으니 사건은 사건이었고 그렇다면 집행부로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도진을 필두로 하여 세 사람은 고함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향했고 곧 기숙사 입구에서 고함을 친 인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산건설의 둘째였지?'
커다란 덩치에 제 화를 못 참아 연기를 뿜듯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가 있었다.
각진 얼굴에 190은 되어 보이는 키, 커다란 덩치가 결코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43기 신입생이었다.
이번 입학 시험 비무에서 4강에 올랐으며 우서진에 의해 탈락했던 상위권의 학생으로 이름은 조중림이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는 그는 벽태웅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는 기숙사 관리인인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슬쩍 각이 나온다.
그리고 그 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조중림이 으르렁거렸다.
"벽태웅, 괜한 참견 말고 꺼지라고."
잔뜩 화가 난 곰이 섬뜩하게 이빨을 드러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더욱 덩치가 큰 불곰 같은 벽태웅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나 집행부인데. 괜한 참견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씨발!!"
무덤덤하면서 조금 템포가 느린 목소리는 조중림의 불타는 화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했다.
"욕하지 말고. 네가 잘못한 거니까 관리인님한테 사과해야지.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 할 일이야."
"개소리하지 말라고!"
결국 임계점을 넘은 조중림이 내공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타고난 신체조건에 입학 시험 비무에서 4강에 오를 만큼 출중한 실력을 지닌 조중림의 돌진은 코뿔소를 연상케할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터억-
"……?"
눈이 돌아간 코뿔소와 같았던 조중림의 얼굴이 순간 멍청해졌다.
달리는 기세까지 더한 그의 바위마저 부수는 정권이 아무렇지 않게 내민 벽태웅의 손바닥에 '안착'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그야말로 안착이라고 해야 할 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투웅!
"으헉!"
다음 순간 그는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뒤늦게 고무에 튕겨나간 공처럼 말이다.
"와! 재밌는 수법이네."
유지은이 그 광경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말은 바닥을 굴렀던 조중림의 귀에 쏙 들어오는 '조롱'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조롱이 들려온 방향을 쏘아보았다.
"꺄! 후배. 쟤가 나 노려 봐."
유지은은 반 걸음 슬쩍 물러나며 도진의 뒤로 얼굴과 몸의 절반을 감췄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훤히 드러내고 있으니 조중림의 분노 게이지가 한계를 뚫게 만들기에 충분한 모션이었다.
허나.
"……."
스을쩍.
조중림의 눈이 이성을 되찾더니 천천히 내리깔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 조절을 잘하는 모습이었다.
도진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렇게 분노 조절을 잘해 준 후배의 모습에 음, 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길래 싸우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