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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84화 (284/741)

283화

현재 암산서가가 포함된 잠룡문의 업무는 사실상 오성아가 모두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일을 다 정리한 뒤 그 서류를 도진에게 결재받는 형태다.

어떻게 보면 문주인 도진이 오성아에게 일을 다 미룬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저 아이는 신뢰를 줄수록 더 재능을 발휘하는 성격이로구나.

장호는 오성아에 대해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유능한 그녀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허나 오성에서 근무하던 때에는 결코 그럴 수 없었기에 항상 숨막힌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사자군의 제국'이라고까지 불리는 오성의 사풍은 극단적으로 말해 '상명하복'이었고 직계라고는 해도 그 위세가 제한되는 회사에서 오성아는 상사의 지침에 따라야만 했으니까.

때문에 그에 반대되는, 그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신뢰해 주는 도진에게 오성아는 점점 더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단순히 일을 미루는 게 아니다.

신뢰하여 전적으로 맡기지만 방치하지 않는다.

그녀의 노력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또 꼼꼼히 살핀 뒤 존중을 담아 의견을 내며 의논을 하고 결정한다.

혼자만 혹사하는 게 아니라 항상 함께 해 준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니 오성아는 '이 사람이 내 주군이다'라는 생각마저 요즘 들고 있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반발심과 충동으로 잠룡문을 선택한 것도 있었고 그렇기에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오성의 사람으로 아직 남아 있는 것인데 조만간 정말로 사표를 질러 버릴 때가 올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아직은 오성의 사람으로서 오군성의 방침에 따라 도진의 '컨설팅'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오성아는 극도로 바쁠 수밖에 없었다.

도진의 컨설팅에 집중하기 위해 여러 프로젝트나 상시 매달려 있어야 하는 업무에서는 배제되었으나 그 외에도 오성 장학 재단에서 근무하는 엘리트로서 처리해야만 하는 업무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오성아라 해도 양쪽의 업무를 동시에 소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오성의 직계이자 사자군 오군성에게 사사받은 제자로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일주일도 못 가 쓰러졌을 정도로 그녀의 업무는 과중했다.

때문에 오성아는 어느날 소담을 포함한 암산서가의 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한 것이다.

"암산서가의 일을 총괄할 총관을 두었으면 해요."

암산서가는 시스템적으로는 잠룡문의 문도가 아니라 식객으로 되어 있다.

현재 잠룡문의 총관 포지션은 오성아가 맡고 있으니 따로 암산서가의 일을 도맡을 사람을 두겠다는 뜻이었다.

서로에게 꼭 필요하지만 내가 하기엔 뭐하고, 다른 사람이 나서 주었으면 하는 그 미묘하고도 오묘한 시선을 제자들이 주고받는 가운데 오성아는 이미 생각해 두었던 사람을 지목했다.

"저, 저요?"

"네. 한 번 배워보시지 않겠어요?"

오성아가 생각한 사람은 현재 제자들 중 맏이인 소여은이었다.

본래 암산서가의 제자들을 돌보던 입장이었고 안살림을 도맡았었다.

성격이 여리지만 그만큼 꼼꼼하게 동생들을 돌보며 인망도 있으니 총관 역할을 하기에 딱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 그……. 네. 열심히 해볼게요."

여린 성격의 소여은은 그렇게 암산서가의 총관이 되었다.

"추후에 암산서가가 정식으로 문파가 되려면 앞으로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춰야만 해요."

"네에."

"기본적인 뼈대는 제가 갖춰 놓을 테니까 한 번 적용해 보시고 의견을 주세요."

"그러도록 할게요."

올해로 서른 하나인 소여은은 오성아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이지만 그 분위기와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오히려 동생으로 보인다.

때문에 조금 못 미더워 보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느낌과 달리 예상 외로 일의 습득이 빠르고 처리도 괜찮았다.

여기에 본래 어린 제자들과 어른들 사이에서의 '중간관리직'으로 잘 해왔던 경험까지 있어 오성아는 꽤 많은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배경으로 오늘, 역사적인 첫 계약에 소여은이 함께 오게 된 것이었다.

"협의 내용을 반영하여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예."

오성아가 건넨 계약서를 오대용이 주정아와 함께 꼼꼼히 확인했다.

소담을 제외하고 소여은을 포함한 암산서가의 제자 여덟 명이 네 명씩 두 조로 나뉘어 기존 경호 인력과 함께 파트 타임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계약서다.

DS 엔터는 뒷골목 흑도의 성격이 강해 뒤가 구린 짓거리를 많이 해 왔다.

20여 년 전만 해도 도시전설급의 흉악한 짓거리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시대가 시대라 그때만큼 막장 짓거리는 하지 못하게 됐다.

허나 그렇기에 들키지 않도록, 더더욱 음습하게 수작을 부리곤 했는데 그런 DS와 바른 엔터는 이번에 전쟁을 치른 것이다.

결과 DS는 이미지는 물론이요 물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바른 엔터에 크나큰 앙심을 품게 되었다.

도진이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으나 지금의 도진은 DS라 해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거물이 되었다.

건드렸다가 오히려 박살나기만 했고.

때문에 DS는 바른 엔터를 노릴 확률이 높았다.

지금껏 해 왔던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전쟁에 대한 보복을 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는 생각은 적어도 DS의 구린 면모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대용은 경호 인력을 두 배로 늘리기로 판단하고 여기에 암산서가의 제자들까지 파트 타임으로 고용한 것이었다.

안티체리는 물론이요 레드슈도 조심해야 했다.

언뜻 레드슈는 숭무고 2학년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무공이란 기본 능력을 '곱해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기본 능력을 곱해주는 무공이란 게 정신적인 상태에 따라 오작동을 하거나 아예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극도로 섬세하고 고도화된 무공은 그렇기에 공포에 휩싸이는 등의 정신 상태에 따라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확률이 얼마든지 있었고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가진 무공의 수준이 높아도 무용지물이 된다.

'수십 배의 곱'이 가능한 무공을 익혔다 해도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면 겨우 '몇 배의 곱'을 발휘한 뒷골목 잡배에게도 고수가 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레드슈의 멤버들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고는 하나 전원이 2학년으로 진급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온실 속의 화초다.

결국 '무림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애송이라 할 수 있는 그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흑도에게 당할 확률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방심해서는 안 됐다.

여기에 가장 표적이 될 확률이 높은 권이솔이 있다.

타이거라운드레이블이 공중분해되는 데 가장 큰 이유였던 게 권이솔이었으니까.

심지어 권이솔은 최소한의 호신 무공조차 익히지 못한 일반인 중의 일반인이었으니 만전을 기해야만 한다.

그 만전을 기하기 위해 오대용은 파트 타임으로 암산서가의 제자들과 경호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예. 검토 확인했습니다. 이대로 계약 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대용이 싸인을 했고 그 옆에 도진이 싸인을 했다.

그렇게 체결된 계약서를 한 부씩 나눠 가진 뒤 오성아가 말했다.

"혹시 더 말씀하실 부분이 있으십니까?"

오대용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성아의 시선이 오대용과 마주했다.

그리고 오대용이 말했다.

"정신나갈 거 같으니까 이제 평상시처럼 말하자."

"풋."

엄격 근엄 진지한 오대용의 말에 주정아가 풋, 웃고 말았다.

도진 또한 웃었으며 오성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 이야기는 끝났으니 그러자."

엄마아빠 아들, 딸.

혹은 호적메이트끼리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역시 부담이 컸던 모양이었다.

도진은 어린 동생들이 워낙 잘 따라줘서 잘 공감하지 못했는데, 본래 호적메이트 간의 사이는 조금은 어색하거나 데면데면하다고 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할게요."

계약을 끝내고 나가는 길.

오대용의 인사에 소여은은 주춤거리지 않고 최대한 자신 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이 또한 오성아의 교육의 성과였다.

* * * *

그리고 다음날.

테이블에 마주 앉아 저녁을 함께 하며 소담은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말에 조금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잘들 해야 할 텐데……."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가출을 하기 전까지 소담은 암산서가의 제자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자랐다.

때문에 그녀는 동생들이, 언니와 오빠들이 잘할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암산서가의 가풍을 어기고 '바깥 세계'에 관한 지식을 쌓았으며 가출해서는 도진이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기에 어려움없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들과 언니, 오빠들은 갑작스레 사회에 내던져졌으니 적응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소담의 걱정스런 얼굴에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잘들 할 거야."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지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암살자로 키우지 않았고 살행(殺行)에 나서지 않았다지만 호국 가문이었던 암산서가의 기술을 고스란히 익힌 재능있는 무인들이란 말이다.

그런 능력을 살려 역으로 경호원으로 일하게 된 그들이 실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도진이었다.

"조금 어긋나는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해결할 수 있을 거고."

물론 모든 것이 동화처럼 잘 풀리지는 않을 확률이 더 높다.

허나 그런 경험을 함으로써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까지고 꽁꽁 싸매고 보호하려 들어선 성장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니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오대용도 함께 조를 짤 무인들에 관해 신경 써 주는 등 조치를 해 주었으니 그들을 믿는 게 최선이다.

도진의 말에 소담은 걱정을 미소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문주님의 말씀이니까 믿어볼게."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후기지수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까만 머리카락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작은 체구의 소녀.

거기에 새하얀 가운까지 걸친 그녀는 다름 아닌 약봉 약리지였다.

홀로 안에 들어선 그녀는 이내 집행부 선배인 도진과 소담을 발견하고선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응, 리지야. 저녁 먹으러 온 거야?"

"네."

"같이 먹을까?"

"예,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당연히 괜찮지. 어서 앉아."

자리에 앉은 그녀가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도진이 물었다.

"실습은 할 만해?"

실습.

그것은 무려 '외과 실습'이었다.

의선약가는 '의가(醫家)'다.

그러니까 의사 집안인데 침을 놓고 기치료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현대 의술을 익힌 의사 또한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한방 치료만이 아니라 양방 치료 또한 병행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무림은 물론이요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의사들을 보유하고 키우는 의선약가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협약을 맺고 의사와 수습 제자들을 파견하곤 했다.

세가에서는 '돌연변이'라 불리지만 사실 의사로서의 지식과 기술도 뛰어난 약리지는 그런 배경으로 실습을 거쳐야 했는데 그 장소로 숭무고 내의 병원을 택한 것이다.

흔히 의사 인턴이 살인적인 업무와 갈굼을 받는 걸로 유명했는데 약리지 또한 그렇게 고생하는 건 아닌지 묻는 것이었다.

도진의 물음에 약리지는 옅게, 그러나 자신감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

그 웃음에 도진은 어째서인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미래에서의 별명, '만만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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