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사아아-
검을 들고 선 상미에게서 기세가 퍼져 나간다.
본래 기세란 추상적이며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상미에게서 퍼져 나가는 기세는 달랐다.
현대의 모습을 바꿔 놓은 무공(武功).
그 무공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내공(內功)이 기세에 깃들어 실재가 된 것이다.
기(氣)를 유형화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그 기운만큼은 기세에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상미는 올라 있었다.
그에 힘입어 상미가 일으킨 기세는 한천상기(翰天霜氣)가 깃들어 그녀를 중심으로 한기를 퍼뜨렸다.
허나 한기의 중심이자 근원인 상미는 서리의 중심에서 오히려 싱그러운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으니 지켜보는 사람의 눈을 홀린다.
그야말로 새하얗게 내린 눈 사이에 싱그럽게 뻗어 생명력을 발산하는 존재를 발견한 사람이 된 느낌을 받게 한다.
무인은 무로써 말한다.
상미는 기세를 일으키고 부드럽게 휘두르는 검으로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그 이미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담긴 말을, 명장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수인 우벽진은 누구보다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조용히, 오롯히 상미의 '말'을 다 들은 우벽진이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미소지으며 우벽진은 말했다.
"고맙네. 덕분에 내가 원하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우벽진은 수치화되고 정형화된 방식으로 무구를 만들지 않는다.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명장의 이름에 걸맞는 작품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벽진의 '명장'으로서의 작업 방식은 무구를 사용할 무인에게서 영감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영감을 통하여 벼려낸 무구는 처음 무인의 손에 닿는 순간부터 마치 떨어져 있던 영혼이 합쳐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우벽진이 그 무인에게서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영감을 받았다 해도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그리고 온힘을 다해 만들지 않으면 그런 무구는 탄생하지 않는다.
즉.
지금 우벽진은 명장의 이름을 건 명검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숭무고 수석에게 주어지는 부상이라 해도 과분한 물건이었다.
하물며.
"기대해도 좋아. 상미 네가 쥘 검은 설란을 대표하는 검이 될 거니까."
우벽진이 이번에 상미에게 주려는 건 그냥 명검도 아니고 세계에서 인정받은 눈 시리즈의 연작인 설란 시리즈를 대표하는 검이었다.
"부담가지지 않아도 좋네. 도진이는 알 테지만 나는 날 위해서 작품을 만들고 내가 원하지 않으면 무엇이 되었든 하지 않으니까 말야."
눈 시리즈는 우벽진의 새로이 시작하는 시기를 새하얗게 눈이 내린 벌판으로 심상화하여 무구에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설란 시리즈는 그 벌판에 피어나는 생명력, 혹은 가능성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이미지는 거짓말처럼 상미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또한 그렇기에 우벽진은 상미에게 줄 무구를 설란 시리즈의 '화룡점정'으로 이미 낙점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진이만이 아니라 저에게까지 그런 검을 주시는 건……."
눈은 두 개.
그러니까 설란 시리즈의 화룡점정도 두 점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바로 우서진의 것이었다.
상미가 그렇듯 우서진 또한 설란 시리즈의 이미지에 딱 맞는 무인이었고 하물며 우벽진의 손자였으니 영감과 동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손자이자 후계자에게 그런 것을 주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미는 그저 손자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명장 우벽진의 역작을 단순히 부상으로 받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담가지지 않아도 좋아. 상미 네가 바로 이번 시리즈에서 나의 뮤즈가 아닌가. 게다가 우리 명성공방의 파트너이기도 하고."
숭무고 43기의 수석으로서 상미는 따로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대신 도진과 마찬가지로 명성공방과 파트너 계약을 체결했다.
허나 설령 그 파트너 계약까지 더해도 우벽진의 검을 받기엔 모자랐다.
설란 시리즈는 우벽진이 눈 시리즈를 뛰어넘을 거라 자신하고 있는 시리즈였으며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결과물이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 해도 세계에서 손꼽을 명작 반열에는 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작의 무구는, 그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했을 때 기본이 수십억 단위였다.
그렇기에.
우벽진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고집이야. 명성공방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 독단이고 월권행위일 수도 있지. 그러니까 비즈니스적인 조건을 하나 더 걸까 하는데."
비즈니스적인 조건.
거기에 상미의 눈동자에 긴장이 어린다.
과연 어떤 조건이 더해져야 그 가치를 메꿀 수 있을까.
우벽진의 입이 열렸다.
"이번 봄 런칭 파티에서 모델이 되어주면 문제가 없을 것 같군."
"…네에?"
상미가 되묻고 말았다.
우벽진은 씨익 웃는 입꼬리에 장난기를 더하며 말했다.
"이번 명성공방의, 내 신제품 런칭 스프링 파티에 네가 서진이와 함께 모델을 서달란 말이지. 그 정도면 부담없이 물건에 합당한 보수가 되지 않겠나."
우두커니 선 상미의 시선이 본능처럼 도진에게로 향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판단을 바라는 시선이었다.
도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 같은데? 컨셉만 보면 누구보다 니가 더 어울릴 거 같거든, 나도."
"오, 오빠아……."
드물게도 귀여우면서 약한 소리를 내는 건 상미가 그런 화려하고도 조명이 집중되는 자리에 대한 미지의 불안감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서 도진은 더 강하게 말했다.
"나는 니가 충분히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이자 무인이라고 생각해. 음, 그게 일정이 어떻게 되죠?"
"6월 중순이야. 그때에 맞춰서 준비를 하고 있지."
우벽진의 대답에 도진이 시선을 다시 상미에게로 맞췄다.
눈을 마주하고, 신뢰를 담아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니가 그 정도면 자신감을 가지고, 무대를 씹어먹기에 충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믿어도 되지?"
도진의 물음에, 일렁이던 상미의 눈동자가 결심으로 굳어졌다.
"네! 오빠의 믿음에 꼭 보답할게요!"
"좋아."
그렇게 상미의 명성공방 주최로 열리는 명장 우벽진의 신제품 런칭 파티의 모델 데뷔가 확정되었다.
"아, 자네도 물론 참석해 줄 테지?"
우벽진의 물음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 명장님 행사인데 참석해야죠."
"암, 그래야지.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다 자네 때문이 아닌가."
"하하하."
명장이라 불리고 있음에도 오히려 더더욱 무섭게 발전하는 희대의 대장장이.
세상에서는 우벽진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눈 시리즈 이후 새로이 봄에 런칭하는 설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가 더더욱 큰 것이었고.
사람들은 늦은 나이에, 그리고 정점에 올랐음에도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해 했으나 우벽진은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될 일이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나는 미리 알고 있었지'라고 씨익 웃으며 말하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정이 명확히 잡히면 자네에게도 VIP 초대권 몇 장 줄 테니 초대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초대하도록 해."
"예, 그러도록 할게요."
그렇게 봄의 일정 하나가 잡혔다.
* * * *
우벽진의 신제품 런칭 행사에 참석하기로 하고 며칠 뒤.
도진의 잠룡문 개파식이 드디어 개최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개파되고 또 사라지는 게 문파라지만 잠룡문은 그런 '흔한 문파'가 아니었기에 수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언론이 모였다.
내부의 촬영은 허가가 나지 않았지만 포토타임, 개파 선언 등의 행사는 외부에서 진행되었고 그런 외부에서의 행사는 모두 촬영이 허가되었다.
도진과 오성아의 SNS를 통해서도 실시간 방송이 진행되었는데 채팅창이 폭발했다.
-와 ㄷㄷㄷ 게스트 면면보소 ㅋㅋㅋㅋ
-뭐죠? 대문파 분파식인가요?
-아닙니다. 고2가 문주인 문파의 개파식입니다.
-엌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세상 어떤 고2가 개파식하는데 매스컴이 몰려드냐고 ㅋㅋㅋ
-고2 문주 문파 개파식 축하 화환 리스트 : 금화, 오성, 명성공방, 정의검가, 웨일스 후작가, 성운, TJ 그룹…….
-화환 리스트 실화냐 ㅋㅋㅋㅋ 가슴이 웅장해진다..
개파식 자체는 요란하게 진행하지 않았다.
관심과 별개로 냉정하게 말해 잠룡문은 '검증되지 않은 어린 무인의 문파'였기에 그런 시선들까지 감안하여 규모를 조절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려하긴 했지만 규모는 적당한 호텔에서 지인들만을 초청하는 '조용한 개파식'이 되었는데 그 면면이 워낙 대단해 화제가 된 것이었다.
일단 금화의 영애인 한유아다.
한유아는 자신이 '소소하게'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로서 참석했는데 거기에 추가로 무려 금화의 부회장인 금군 한유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냈다.
여기에 심지어 오성에서도 오대용이 1차 협력사인 성운의 후계자, 주정아와 함께 참석했으며 사자군 오군성과 호군자 주대운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냈으니 커뮤니티가 뒤집어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요즘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국뽕마저 치사량으로 주입해준 우벽진이 있는 명성공방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명문가인 웨일스 후작가에서도 화환을 보냈다.
우벽진, 우서진에 웨일스 후작마저 자녀들과 직접 참석했으니 극단적으로 말해 애완견의 생일 파티였어도 커뮤티니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라인업이었다.
때문에 집중된 과도한 관심에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소담을 제외하고선 모조리 개파식 내내 굳어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머네."
"이제 점점 더 좋아질 거야."
소담의 한숨에 도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 해 주었다.
'사회화'라는 건 사실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습득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한 채 자란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그것이 지극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억지로 주입하기보다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하는 게 좋은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마침 잠룡문에는 그들의 사회화를 도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약 하나가 들어와 있었고, 도진은 개파식 이후 그 계약을 맺기 위해 의뢰인을 만났다.
"어서 와. 콜라?"
"응."
도진을 반갑게 맞아주는 건 다름 아닌 바른 엔터의 대표인 오대용이다.
"어서오세요."
"네에."
오대용은 주정아와 함께 있었는데 도진 또한 혼자가 아니었으니 오성아, 그리고 현재 남은 암산서가 제자들 중 맏이인 소여은과 함께 왔다.
이 자리에 소여은이 함께 온 건 지금껏 그랬듯 잠룡문의 행사에 가능하면 암산서가의 제자가 꼭 한 명은 동행하도록 했던 방침만이 아니라 더 큰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를 오성아가 잠룡문에서의 '부사수'로 낙점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도진에게로 기울었으나 오성아는 아직 오성의 사람이었다.
그 말은 곧 잠룡문의 일만이 아닌 오성에서 맡은 그녀 본연의 업무 또한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연말연초는 지났다지만 잠룡문의 일을 함께 처리해야 하는 그녀는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다간 일에 치여 죽는 도비가 되어 버릴 거야.'
제아무리 유능한 그녀라 해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내린 조치가 바로 그녀의 일을 도울 사람, 부사수를 뽑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낙점된 것이 바로 제자들 중 맏이인 소여은이었다.
"저,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