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생각지 못했던 우벽진의 말에 도진과 상미, 우서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우벽진은 들고 있던 와인을 마치 소주처럼 쓰게 한 모금 삼킨 뒤 말했다.
"…서진이가 아팠을 때, 나는 백방으로 무림병에 정통하다는 곳을 방문했었지."
그랬다.
이번 생에서는 미룡이라 불리는 후기지수가 되었지만 본래, 전생에서 우서진은 삼음지체의 저주에 이윽고 목숨을 잃는 끝을 맞이했었다.
우벽진은 자신이 무공을 가르쳤기 때문에 우서진의 저주가 발현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손자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러다 태양권가의 악랄한 계책에 빠지고 말았다.
의심가는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들 말고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곳이 없었기에 우벽진은 진창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까지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벽진을, 그리고 얼어붙어 이윽고 꺼질 것만 같던 우서진의 숨에 온기를 되찾아 준 것이 도진이었다.
도진은 기적보다 눈부시게 우벽진을 진창에서 꺼내 주었고 우서진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었다.
우벽진이 명장으로서 잃었던 영감과 열정을 다시 불사르게 해 주었으며 우서진이 도진을 구세주라 말하며 추종하는 건 그런 이유였다.
수작을 부렸던 태양권가는 크게 대가를 치렀다.
장남의 승계를 안정적으로 굳혀 주었던 회사 태양금속이 상장폐지 되었고 국뽕마저 채워주며 대한민국 최고의 공방이 된 명성공방이 아주 대놓고 적대하니 무슨 이유인지 궁금해하는 대중들의 시선도 그들을 쿡쿡 찌르는 바늘이 되었다.
평소 이미지가 좋았다면 오히려 명성공방에 독이 되었을 텐데 태양권가의 이미지가 결코 좋지 않았기에 그리 된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그들을 고발하거나 일을 공론화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의 무림세가이면서 대기업이기도 한 태양권가를 상대하기 위해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들이 필요했는데 태양권가와 우벽진 사이의 '거래'는 두루뭉술했으니까.
때문에 우벽진은, 그리고 명성공방은 '느낌적인 느낌'의 공격으로 태양권가를 괴롭혔고 켕기는 게 있는 태양권가는 그 괴롭힘을 일방적으로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여기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후계 구도의 분쟁으로 내홍을 앓고 있으니 제아무리 태양권가라 해도 까딱하다간 기둥뿌리가 흔들릴 만큼 위태로웠다.
요즘 태양권가가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뭐 그런 배경이었기에 우벽진이 우서진이 아팠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분위기가 크게 무거워지진 않았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일이었으니까.
다만 끝이 해피엔딩이었다고 해서 과정까지 모두 좋았던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무림병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곳은 두 곳이지."
의선약가와 태양권가다.
우벽진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가 먼저 선택한 곳은 평판이 좋지 않은 태양권가가 아닌 의선약가였다.
다만 그 방문은 평화롭지 못했다.
"알다시피 의선약가 본가의 진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야."
환자는 많지만 의선약가의 의사는 부족하다.
그 특성상 오로지 직계에게만 허락되는 의술들이 있었고 그 의술을 익히는 건 지난한 일이었기에 의선약가의 명의(名醫)는 희귀 무림병 환자 이상으로 희소했다.
때문에 본래는 예약을 잡고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우벽진은 그러지 못했다.
"힘으로 뚫고 들어가 버렸지. 내 손자를 봐달라고 말이야."
의선약가는 그런 환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용납해서도 안 됐다.
손자의 목숨이 걸려 있는 우벽진은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애끓는 마음으로는 납득하지 못한 채 소란을 부렸던 것이다.
"…결국 의선약가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
한 번 예외를 만들면 둑에 뚫린 구멍처럼 또다른 예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쏟아지게 된다.
맹호추 우벽진은 고수였지만 의선약가 또한 손꼽히는 무림세가.
여기에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식객들까지 손을 보탰기에 혼자였던 그는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압당한 우벽진에게 의선약가의 가주가 직접 찾아와 말했다.
-연명치료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차례를 기다려 주십시오.
절박한 건 그만이 아니다.
이곳에 찾아온 환자들이 다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우벽진은 그런 환자들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평생 짊어져야 하는 의선약가주를 대면한 뒤로 차례를 기다릴 만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의선약가에서도 서진이를 치료할 순 없었어."
무림병은 불치병이 많다.
근본적인 원인은 '기(氣)'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은 1+1이 2라는 결과가 나오는 걸 관측할 수 있게는 해준다.
허나 무림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1+1이 '왜' 2가 되는지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단계에 이르러야만 했다.
현대의 과학과 의사들은 그 증명을 하지 못했기에 무림병의 대부분이 불치병으로 남아 있다.
-아파! 하지 마! 못 고치잖아! 하지 마!
서진이의 외침을 기억한다.
의선약가는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고 우벽진은 몸을 돌려 떠났다.
그리고 이윽고 도달한 곳이 태양권가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냈고 우벽진은 그래서 그들에게 목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것이 의선약가는 선택하지 않았던, 우서진을 '모르모트' 삼아 낸 단기적인 성과라는 걸 모르고.
늦게나마 그 대가를 받아내고 있는 우벽진은 후우, 숨을 내쉬고선 말했다.
"그당시 가주의 곁에 꼭 붙어 있던 자그마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약리지였어."
"음."
벌써부터 윤곽이 보이는 도진이었다.
"서진이가 낫고 나서 나는 뒤늦게나마 의선약가에 사과하기 위해 몇 번이고 찾아갔지. 약가주는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어."
의선약가의 이번 대 가주의 인성과 됨됨이는 유명했다.
의선약가와 척을 지면 한국 무림의 절반을 적으로 돌려야 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만으로는 안 끝날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 '절반' 안에 우벽진도 포함되게 된 듯했다.
당장 의선약가가 필요로 하는 정밀한 도구들 다수를 명성공방에서 좋은 조건으로 납품하고 있었다.
"다만 그래, 약리지 그 아이만큼은 나를 완전히 용서해 주지 않았지."
'그렇게 된 거였구나.'
전생에서의 약리지가 환자들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고 날 선 반응을 보인 건 의선약가를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걸 참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의선약가주는 그러니까 '진상'들을 상대로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그들을 포용하려 했다.
그것은 분명히 의선약가가 성세를 구가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나 그 딸인 약리지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그 불만이 표출된 것이 '만만좌'였고 그 배경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기에 만만좌는 비난이 아닌 밈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약리지가 우서진을 적대하는 이유가 나온다.
역시나 어린 나이였던 우서진은 의선약가의 가주에게, 그리고 의사들에게 '못 고치잖아!'라고 소리쳤고 그것이 어린 약리지의 가슴에 짙게 남았다는 거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아픈 아이가 고통에 한 말이었으니 뒤틀린 사람이 아니고서야 충분히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일이다.
허나 그런 일들을 몇 번이고 보아 온, 그리고 아직도 어린 소녀가 우서진을 째릿 노려보기엔 충분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우서진의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우벽진은 다시 한 번 쓰다는 얼굴로 와인을 넘기고선 말했다.
"내가 다시 한 번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마."
"아뇨, 할아버지. 제가 이야기 해 볼게요."
"네가?"
"네."
고개를 끄덕이는 우서진은 자신있는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과 달리 사실 이렇다 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선 건 자신을 위해 많은 걸 희생했던 할아버지가 또 이런 일로 한 번 더 허리를 숙이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벽진은 그런 속내를 몰랐지만 깊이 고민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한 성장으로 몰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던 손자가 아닌가.
또 훌륭하게 일을 해결하리라 믿기로 한 것이다.
'도진이도 있으니.'
…훌륭한 보험도 곁에 있고 말이다.
그렇게 우벽진이 손자를 믿고서 자리를 떠난 뒤.
우서진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형! 뭐 좋은 방법 없어요?"
"……."
* * * *
우서진이 정말로 아무 생각없이 막 지른 건 아니었다.
자신으로선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에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구세주이자 완벽한 사람인 도진 형이 있지 않은가.
형이라면 분명히 대단한 방법을 찾아주리라 믿었고 그런 믿음을 그득 담아 도진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허허.'
도진으로선 피식 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어미새를 신뢰하는 눈동자로 바라보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내가 방법이 없으면 어쩌려고.'
누군가의 믿음이 온전히 부담으로 다가오던 전생과 다른 삶을 살고는 있다지만 이런 형태로 미래에서 온 로봇 고양이에게 문제 해결법을 바라는 듯한 시선을 받으니 느낌적인 느낌이다.
더 웃긴 건 딱 떠오르는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고.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뭐예요?"
진짜요, 도 아니고 뭐예요다.
정말로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지금껏 상미만이 '도진교 광신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우서진도 만만치 않음을 새삼 깨닫는 도진이었다.
"음, 확실한 건 아니고 아마 그럴 거 같다는 거니까 너무 믿지는 말고. 어쨌든 조금은 도움이 될 거 같긴 한데……."
그렇게 보험을 들어 두고서 도진은 자신이 떠올린 방법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쩌면 그걸로 될까요, 라면서 의심과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우서진은 이번에도 도진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얼굴로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로 해볼게요."
* * * *
다음날.
43기의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도진은 자신의 흔적이 묻어나는 입학식에 미소지었다.
1학년 때도 입학식 준비를 집행부원으로서 함께 하긴 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영향력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시야도 넓어져 그때는 다 담지 못했던 이 '로열 블러드'들이 그득한 행사장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세를 드러내고서야 행사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 도진은 로열 블러드들 사이에서도 돋보이고 있었다.
그런 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미는 수석으로서 입학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와……."
"음, 대단하구먼."
"이번 년도도 기대가 되는군요."
숭무고의 교복을 입고, 한천검공의 기세를 아낌없이 두르고 걷는 윤상미를 감히 폄하하려 드는 학생은 없었다.
보호소에서 지내던 천것.
그야말로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윤상미라는 무인은 고고했으며 선서의 목소리와 함께 행사장을 온전히 자신의 기세로 채우고 있었다.
"수고했어, 상미야."
"네, 오빠!"
그토록 고고했던 상미는 도진의 칭찬에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우서진은, 시선을 자주 약리지에게로 향하곤 했다.
도진이 말해준 '방법'을 시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