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오빠가 전에 말씀해 주셨잖아요. 비싸 보여도 제대로 된 거 하나를 사는 게 싸구려 몇 개를 사는 거 보다 낫다고. 그래서 산 신발이에요.'
'오빠 말씀대로였어요. 예쁘기도 훨씬 예쁘고 더 오래 신을 수 있었어요.'
상미는 이게 뭐야, 라고 묻기도 전에 시선만 주어도 그렇게 도진에게 이야기를 하는 아이였다.
상미의 도진에 대한 태도는 굳이 비유하자면 '반려견'과 닮아 있었다.
무조건적이면서 맹목적이다.
조금은 걱정스런 부분도 있었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이의 소녀, 그것도 큰 시련을 겪었던 아이니 성숙할 때까지는 그렇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에 도진은 그런 상미의 마음을 받아 주고 있었다.
한데 오늘.
처음으로 상미가 미묘하게 도진에게 벽을 친 것이다.
평소의 상미였다면 뭐냐고 묻기도 전에 이건 무어고 이런 생각으로 샀는데 어떠어떠했다 같은 식으로 내용물과 함께 'TMI'를 풀어 놓았을 텐데 지금은 혹시라도 도진이 관심을 가질까 가방을 뒤로 멘다.
그런 상미의 태도에.
피식-
도진은 삼촌미소를 지었다.
상미는 혹여 도진의 마음이 상하는 건 아닐까 벽을 치면서도 강아지처럼 끙끙 앓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담긴 미소였다.
'상미도 그맘때지.'
열일곱.
사춘기가 오고 낫지 않은 중2병이 심각해지기도 하는 시기다.
감추고 있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여럿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한 나이.
도진은 상미가 혹여 풀릴까 꼭꼭 묶은 커다란 가방이 그런 시기의 무언가를 담은 거라 생각했기에 그런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비밀을 만든다는 게 어쩌면 조금 서운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런 비밀이 있다 해도 상미의 도진에 대한 마음이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오히려 긍정적인 성장의 단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들어줄게."
"네, 오빠."
남은 다른 짐을 도진이 들고 슈킨팍시의 트렁크에 실었다.
뒷좌석을 접으면 봉고 못지 않은 공간을 자랑하는 대형 SUV는 정말로 편리했다.
혹자는 우벽진과의 취미로 공구나 자재를 서슴없이 싣기도 하는 그 '슈퍼카' 활용법에 탄식을 내뱉기도 했지만 도진은 마인드가 달랐다.
애지중지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의 편의를 위해 활용하는 것.
슈킨팍시를 그렇게 생각했기에 설령 흠집이 좀 나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마저 '빈티지한 멋'이라 SNS에서 말할 정도였다.
상미의 짐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뒷좌석을 접을 것도 없이 간단히 싣고 숭무고의 기숙사로 향했다.
이미 인사마저 다 나눴기에 바로 보호소를 떠났는데, 상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호소 생활이 나빴던 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특출나게 좋았던 기억도 없었기에 상미는 미련을 남겨두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학생증까지 나오고 대부분의 서류 절차도 마쳐 두었기에 도진과 상미는 학생증을 이용하여 바로 기숙사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며칠 뒤가 입학식이었기에 기숙사는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 그리고 본가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조금은 북적였다.
"저기가 남자 기숙사, 여기가 여자 기숙사야."
"네."
짐을 나눠들고 도진은 상미와 나란히 걸으며 학교를 소개해 주었다.
상미의 시선은 그런 도진의 안내에 따라 학교를 훑으면서도 중심은 도진에게 머물러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와 도진을 수없이 스쳐감에도 일말의 자극조차 주지 못했다.
상미에게 있어 이렇게 도진과 숭무고를 함께 걷는 건 그만큼이나, 도진교 경전의 한 권을 가득 채워 기록해야 할 만큼 의미 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도진의 손을 잡고 걸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유일신의 손을 잡는 불경을 저지르기엔 아직 상미의 용기가 모자랐다.
그래서 그저 아주 조금씩, 수줍게, 미미하게 거리를 세 번이나 좁혀 걷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이 기숙사에 들어서게 됐다.
이미 이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허락을 받아 두었기에 도진은 상미와 함께 여자 기숙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세탁기나 건조기 같은 게 기능이 워낙 많더라. 나는 처음에 설명서 정독하느라 시간 좀 썼었지. 너는 그래도 좀 익숙한가 보네."
"네. 보호소에 있을 때 당번으로 좀 써 봤거든요."
"그랬구나."
"설명서까지 읽으면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똑 부러지는 게 좀 안심이 되네."
도진의 칭찬에 상미가 수줍게 웃었다.
"아직 정식 입주가 아니어도 이름을 올렸으니까 저녁에 외출할 땐 서류를 작성해야 할 거야."
"네."
오늘 저녁에는 도진네 식구들과 서진이네 식구들, 여기에 웨일스 후작 부부와 상미까지 함께 파티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우서진네 집에서 열리는 작은 파티로 상미와 서진이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였다.
"저녁에 여기 앞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
"네, 오빠."
"그리고 짐 정리는 어떻게 할 거야?"
"제가 하나씩 천천히 하도록 할게요."
"응, 그럴래? 그럼 저녁에 다시 보자."
여자아이의 짐을 도진이 함께 정리해 주는 건 뭐한 일이고 예의 가방도 있었기에 도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고마워요."
도진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상미는 가슴께에 두 손을 꼬옥 모았다가 철저하게 묶어 두었던 가방을 풀었다.
가방 안에는 유리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중 포장을 한 빈 일회용 컵 등이 들어 있었다.
상미가 도진과 함께 했던 시간의 물건들이었다.
제아무리 유일신님이라 해도 이건 보여줄 수가 없었기에 가슴을 옥죄는 고통을 참으며 숨겨야만 했다.
'빨리 장식장을 만들어야겠어.'
동맹 관계에 있는 우서진은 자신의 방에 타인의 시선에서 이런 물건을 숨길 수 있는 장식장을 우벽진에게 배워 직접 만들었다.
상미의 경우 지금까진 사물함에 불편하게 숨겼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 공간에 맞춰 우서진이 장식장을 함께 만들어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 파티에서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상미는 처음 갖게 된 자신만의 공간에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갖게 된 온전히 자신만의, 그것도 호화롭고 넓은 공간에 한 줌밖에 안 되는 물건을 채우는 건 생소하고도 간질간질한 경험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기간이 다 되면 떠나야 하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타인의 시선도 손길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그 '기간'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유일신이 그녀에게 말 해 주었다.
'내가 아는 선배에게도 말했던 건데, 걱정은 대출 받아서까지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미래를 생각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에 따라오는 걱정을 대출까지 받아서 할 필요는 없다고.
상미는 그 말에 충실했다.
물론 되는 대로 살겠다는 건 아니다.
충실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설계하고는 있다.
이상적인 건 이렇게 성적을 유지해서 숭무고를 졸업했을 때 유일신의 곁에 자신이 있는 그림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상미는 결코 멈추지 않고 걸어나갈 각오를 또 한 번 다졌다.
* * * *
저녁.
도진은 상미를 태우고 약속 장소인 우서진의 집으로 향했다.
파티는 별채 내부에서 열렸는데, 테이블에 출장 뷔페 음식들을 두고 담소를 나누는 파티치고는 잔잔한 형식이었다.
"피곤한 큰 파티는 이미 했거든."
이 파티에 관해 우벽진은 그렇게 말했는데, 실제로 우서진의 숭무고 차석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이미 명성 공방의 이름으로 크게 치러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명성 공방이었기에 그 후계자의 숭무고 차석은 각계의 인사들을 초청하고 인맥을 쌓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연히 꽤 심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었고 명성 공방 최고의 명장인 우벽진 또한 그 파티의 중심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친분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자리가 된 것이었다.
"축하합니다. 상미 학생."
"축하해, 서진아."
"감사합니다."
우벽진의 친우인 웨일스 후작 부부가 상미와 우서진에게 축하를 건넸다.
웨일스 후작 부부는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본래 한국은 웨일스 후작이 아내 정여원을 위해 일 년에 한 달 가량 머무는 정도였는데 명성 공방의 영국 지점을 내는 등의 협업 관계가 되면서 자주 오가게 되었다.
덕분에 릴리와 윌리엄도 자주 유진이와 호진이를 보러 올 수 있었다.
도진네 식구들, 웨일스 후작 부부네 식구들, 그리고 우벽진네 식구들만의 파티는 담소로 인해 잔잔한 온기처럼 무르익어 갔다.
무엇보다 이 파티엔 성수기가 끝나 오랜만에 야근을 하지 않은 아버지, 김서우도 함께 해 도진의 미소가 더욱 짙었다.
"음."
파티 중 알콜이 조금 들어간 우벽진이 도진의 곁에 있던 상미에게 다가왔다.
"수석을 차지했으니 내가 검을 하나 만들어 줘야 했지."
"네."
이번 수석에게 주어지는 부상 중에는 작년과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명장 우벽진이 무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작년엔 강제였지만 이번엔 순수하게 우벽진의 의지였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숭무고와 명성 공방 사이의 계약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우벽진은 우서진이나 상미가 우승하리라 믿었기에 진행한 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시간날 때 공방에 찾아오도록 해."
"네, 그럴게요."
"근데 우 명장님. 요즘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다크 서클이 감춰지지가 않는데요."
도진의 말에 우벽진이 피식 웃었다.
편한 차림으로 모인 파티라고는 해도 최소한으로 꾸미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벽진의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분명하게 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으니 실제로 우벽진은 조금 스스로를 혹사하고 있었다.
"본래 창작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지 않나."
"하하. 그렇긴 하죠."
무언가 나쁜 일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 이번 봄 시즌에 새로 런칭할 무구들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이렇게나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 나도 가만 있을 순 없지."
우벽진은 약속을 했다.
하늘에 오를 도진을 분명히 따라가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진하는 우벽진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피로따위로 결코 가려질 수 없었다.
때문에 도진 또한 일말의 걱정도 묻어나지 않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마 이번 봄 이후로 명장 우벽진의 이름은 좀 더 높은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함께 후식을 즐기던 우서진과의 대화에서 약리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휴, 걔는 왜 그렇게 절 싫어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잘 생각해 봐. 정말로 어릴 적에 뭔가 없었어? 혹시 결혼 약속을 했는데 홀랑 까먹고 있는 거라든가."
"아니, 형. 일본 만화 좋아하세요? 형은 그런 거 안 보는 걸로 아는데."
이번 생은 안 봤지만 저번 생에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느라 꽤 봤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에 도진은 그저 하하 웃었다.
어차피 본인에게 묻지 않는 이상 답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 반 농담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돌연 우벽진이 다가왔다.
도진과 상미, 우서진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기에 무언가 이유가 있는 접근이었고 그 이유는 꽤 놀라운 것이었다.
"음, 그 아이의 이야기 말인데."
"네."
"나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