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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78화 (278/741)
  • 277화

    사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약리지와 우서진의 비무는 약리지가 승리할 확률이 높았다.

    우서진의 강점은 삼음지체의 저주를 내공으로 치환하며 얻을 수 있었던 강력한 내공인데 이 강점이 약리지를 상대론 그리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여기에 저주에 시달리며 잃었던 시간도 모두 상쇄할 수는 없었으니 삼음지체의 저주가 동시에 가져다주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마찬가지로 천재라 할 수 있는 약리지와의 무공 숙련도에서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 숙련도의 차이는 무공 그 자체에서는 아무래도 열세를 보인다는 의선약가의 무공으로도 약리지가 우서진의 우위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였다.

    때문에 평범하게 싸웠다면 숙련도의 우위를 바탕으로 점접공까지 사용할 수 있는 약리지는 상성의 유리함마저 이용하여 우서진에게서 승리를 가져왔을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우서진이 승부수를 띄웠으니 바로 그 특이 체질이다.

    도진은 우서진의 삼음지체를 치료해 주기 위해 몸 내부를 '리모델링'해 주었다.

    그러니까 혈도, 기운이 흐르는 길을 삼음지체에 맞춰 다르게 이어 버린 것이다.

    이러하니 약리지가 제대로 혈을 짚었음에도 점접공으로 의도한 효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것이 찰나의, 그러나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 우서진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만들었다.

    우서진이 승리 후 '모두 형 덕분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게 도진교 열혈신도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어진 8강의 빅매치.

    윤상미와 벽태웅의 대결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에 관해서도 치열한 장외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윤상미가 이기겠지. 김도진이랑 같은 무맥이라는데.

    -정확히는 같은 무공은 아니래. 근데 어쨌든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함.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좀 흔들린다.

    -이건 거의 세계 외공 대회 챔피언이랑 여고생쟝이 마주보고 있는 수준인데 ㅋㅋㅋㅋ

    불곰이 일어선 듯한 벽태웅과 난초 같은 윤상미가 비무대 위에서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은 과연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 세계에 '무공'이라는 게 없었다면 상미가 수십 명이 있어도 벽태웅과의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체급 차는 컸다.

    그리고 '학생 리그'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체급이 크게 작용한다.

    때문에 다시금 벽태웅이 이기지 않을까하는 의견이 우세해지는 가운데 도진은 상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분석 이전에 말이다.

    "약속?"

    한유아가 어쩐지 감정이 묻어나는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에 도진을 담으며 물었다.

    도진은 그 눈을 마주하는 대신 비무대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공이란 건 그런 거거든요. 더 강렬한 감정이 담길수록 더 강해지니까."

    상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

    그 노력이 재능과 함께 한천검공을 개화했다.

    여기에 도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공(神功)에 마음을 담았으니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도진이는 낭만파구나?"

    "네. 사실은 아주 섬세한 남자거든요, 제가."

    반 장난의 농담을 하면서 도진은 속으로 객관적인 분석을 해 보았다.

    한천검공은 이 현대에 비할 무공이 없을 만큼 대단한 무공이며 상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익혀 나가고 있다.

    허나 압도적인 재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내공이다.

    한천검공은 상승무공답게 빠른 축기(蓄氣), 그러니까 적공 효율을 자랑하지만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그 축기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두웅-!

    -헐 ㅁㅊ

    -와, 개쩐다 ㄷㄷㄷ

    -난 다시 빙봉 쪽에 걸겠음.

    비무의 시작과 동시에 상미는 내공을 폭발시키며 검에 깃들였다.

    검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담긴 내공의 기세는 지켜보는 사람마저 짓누를 만큼 대단했다.

    부족한 내공량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이렇게 '급발진'을 하는 건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소리였다.

    그 경지를 따라오지 못하는 내공량 때문에 출력은 높지만 용량이 적은 상미다.

    그런 상미를 상대로 하는 것이 호협남가의 남사현마저 그 압도적인 '힘'으로 떨어뜨리고 올라온 벽태웅이다.

    체급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상미는 더 많은 내공을 써야 했고 그것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상미가 불리해진다는 뜻이었기에.

    상미는 아예 처음부터 전력으로 끝내겠다는 의도였다.

    '문제는…….'

    과연 거기에 벽태웅이 무너질까다.

    소거인 강거혁은 말 그대로 작은 체구임에도 거인 같은 힘과 '방어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어쩔 수 없는 피지컬의 한계로 '선'을 넘지 못한 비운의 무인으로 남았다.

    그 한을 풀기 위해 찾은 제자가 벽태웅이라고 했는데 과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벽태웅은 견고했다.

    단순히 견고하기만 한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단단한데 쉽게 공격을 맞아 주지도 않았다.

    최대한 영악하게 비무를 이끌어 나갔고 상대가 공격을 맞추기 위해 무리를 한 순간 역공을 가해 단 한 방에 상대를 무너뜨리는 등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에 비춰 보면 벽태웅은 일부러 상미의 전력을 받아주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판을 짤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으나 벽태웅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틀었다.

    콰앙!!

    시작부터 상미의 검격을 정면에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

    상미는 그 일격에 검을 놓쳤다.

    허공에서 상미의 검이 빙글, 돌았다.

    상미가 상대의 힘을 잘못 가늠한 게 아니었다.

    금화도에서 그랬듯 벽태웅이 예의 '공이에 의해 총알의 화약이 폭발한 듯한' 수법을 쓴 것이었다.

    안 그래도 비할 데 없는 힘을 자랑하는 벽태웅이다.

    그런 벽태웅의 힘을 순간적으로 증폭시키는 비기(秘技)가 바로 저 수법이었다.

    우서진이 자신의 특이 체질로 승부수를 던졌듯 벽태웅 또한 그 수법으로 첫 수부터 승부를 건 것이다.

    벽태웅의 저 수법은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까 그날 본 시험에서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상미는 벽태웅의 수법을 몰랐다는 말이다.

    후웅-!

    검을 놓치고 훤히 드러난, 몸통까지 이어진 길을 벽태웅의 주먹이 가로지른다.

    그 한 방에는 상미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힘이 담겨 있었다.

    만약, 도진이 말을 해 주었다면 상미는 이 수법에 대해서도 대비를 했을 것이고 더 쉽게 비무를 가져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강호의 도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상미는 그런 승리의 빛이 다 바래 버릴 도움을 바라지 않았고 그런 것 없이도 이길 수 있는 무인이었다.

    콰악!

    손바닥을 벗어나 빙글 도는 검의 손잡이를 상미가 붙잡았다.

    그러나 검날이 자신의 방향으로, 그러니까 뒤를 향해 있는 상황인 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미 검을 휘두를 수 없을 만큼 가까웠기에 검을 붙잡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없는 것처럼 보였다.

    "……."

    뚝.

    마치 그런 소리가 난 것처럼 벽태웅의 주먹이 멈췄다.

    비무에서 승리를 결정지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거리가 아직 모자랐다.

    그러니까 주먹이 멈춘 것은 다른 이유였는데, 벽태웅의 두꺼운 목에 시리게 빛나는 뾰족한 서리가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서리는.

    한천검공(翰天劍功) 상첨(霜尖)

    사아아-

    상미가 쥔 검의 자루 부분에서부터 뻗어 있었다.

    -헐.

    -저, 저거 ㄷㄷㄷ;;;

    -와 미쳤다;;;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속성'이 깃든 내공은 변수 창출에 유리하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의 명문 중 하나인 태양권가가 그러했다.

    그 인성과는 별개로 재능을 타고난 권민국은 태양권가 특유의 양강지기로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것으로 상대를 위협하곤 했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깨달음이 경지에 이르러 내공을 외부로 분출할 수 있을 만큼의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속성은 커녕 그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의 구사조차 불가능하다.

    중요한 건, 지금 윤상미가 그런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서리의 검날을 만들어내 승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한 발 늦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입학 시험 비무 최고의 빅매치가 찰나에 끝났지만 거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찰나의 승부가 너무나 강렬했기에.

    초 근접 거리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서리 칼날로 승부를 결정지은 상미의 한 수는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단하네."

    "너도."

    벽태웅과 상미는 유감없이 서로를 칭찬하고서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비무대를 내려오며 상미는 도진에게로 시선을 향했고 도진은 미소와 함께 엄지를 들어 주었다.

    그 도진의 엄지와, 엄지에 피어나듯 활짝 웃는 상미가 포털의 1페이지를 장식했다.

    * * * *

    손꼽히던 다섯 명 중 약봉과 황룡, 그리고 남사현이 떨어지고 우승 후보는 둘로 좁혀졌다.

    빙봉 윤상미와 미룡 우서진.

    4강에 오른 두 사람은 그런 예측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압도적인 실력으로 4강에서 이겼고 이내 결승전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아 ㅋㅋ 진짜 잠룡 패밀리가 다 해먹어 버렸네

    -ㄹㅇㅋㅋㅋ 결승전에서 패밀리 대전이라니.

    -잠룡이 숭무고를 다 해먹음ㅋㅋ ㄹㅇ

    지켜보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팝콘을 뜯는 자세로 결승전을 관람했다.

    두 사람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건 확정적이었으며 '잠룡 패밀리'라는 공통점까지 있으니 편안한 기분으로 오감이 즐거운 결승전을 즐기는 것이다.

    두웅-!

    두 사람이 포권하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공이 닮은 두 사람의 기세가 외부에 영향을 미치며 한기가 깔리고 상미의 주변에는 이내 서리마저 내려앉았다.

    도진교의 열혈신도이자 동맹 관계인 두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부딪치는 기세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안 봐 줄 거야."

    "누가 할 소릴."

    한 마디씩 주고받는 두 사람은 미소짓고 있었으나 기세는 더욱 강렬해지고만 있었다.

    항상 그랬다.

    경쟁하며 성장했으나 선의만이 담겨 있었기에 유감은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런 걱정없이, 순수하게 이 비무대 위에서 또 한 번의 경쟁을 할 수 있었다.

    차아앙-!

    서리꽃이 내리는 결승전은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승자! 윤상미!"

    상미는 도진과의 약속을 지켰다.

    * * * *

    "우승! 윤상미!"

    폐회식에서 상미는 상장과 부상을 손에 든 우승자가 되었다.

    "모두…… 오빠가 있었기에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었어요."

    촉촉하게 눈가를 적시며 말한 상미 덕분에 도진은 비무도 치르지 않았음에도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형은 그러니까 뭐……. 구세주죠, 구세주. 여러분. 잠룡 믿으세요."

    -엌ㅋㅋㅋㅋㅋ

    -미친ㅋㅋㅋㅋ

    -아니 여기서 포교 활동을 한다고?ㅋㅋㅋㅋㅋ

    여기다 차석 우서진 덕분에 정말로 '잠룡교'가 공식 종교(?)가 되고 말았다.

    그런 화제 속에서 폐회식이 끝나고 도진은 상미를 만났다.

    "필요한 절차는 성아 누나랑 유아 선배가 도와줄 거야."

    "네."

    도진과의 약속을 지켜 입학 수석을 차지한 상미는 기숙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그 말은 곧 1년 동안 머물던 보호소를 떠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오늘 도진이 상미를 만난 건 그 이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미용실은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그만 두었고 그 외 필요한 정리도 모두 해 두었으며 서류 관련 부분은 오성아가 맡아 주었기에 짐만 싣고 가면 되었다.

    함께 보호소에 갔는데 옷가지 등 필수적인 짐을 제외하고는 들고 갈 것이 없었기에 과장 좀 보태 몸만 떠나면 될 정도로 보였다.

    '응?'

    이삿짐이 중간 크기의 가방에 상자 하나뿐이어서 얘가 정말로 열심히, 그러나 건조하게 살았구나 싶었던 도진은 갑자기 상미가 안쪽 깊은 곳에서 꺼낸 더플백에 절로 시선이 갔다.

    자물쇠로 철저하게 잠가 둔 사물함에서 꺼낸 그것은 무슨 완전 군장을 해도 될 법한 커다란 가방이었는데 결코 열려선 안 된다는 듯 꽁꽁 싸매놨다.

    그 부자연스런 포장에 도진이 상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건 뭐야, 상미야?"

    "짐이에요."

    "짐?"

    "네."

    놀랍게도, 상미가 처음으로 도진에게 벽을 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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