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스윽-
낯선 천장 아래에서 도슬구는 눈을 떴다.
주르륵-
"어, 어? 야! 왜 우냐? 어디 아파?"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또르르 눈물을 흘리는 도슬구의 모습에 옆에 앉아 있던 삼수생, 조의 리더인 태진헌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도슬구는 아무 지장없이 움직이는 팔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꿈을 꿔서요."
"꿈?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꾼 거야?"
"아뇨. 이뤄져선 안 되는 꿈이요."
"음, 뭐, 꿈이라서 다행이네."
무슨 소린지 모를 도슬구의 말에, 태진헌은 뭔 소리냐고 타박하는 대신 그렇게 말 해 주었다.
26대 숭무고 도전자들의 모임 대표, 그러니까 숭무고에 도전하는 재수생과 삼수생들이 모이는 카페의 26대 대표다운 배려였다.
전통적으로 삼수생이 맡는, 그래서 1년 임기의 대표라곤 하지만 그래도 숭무고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모임의 대표인 만큼 최소한의 무언가는 필요한 자리였다.
즉흥적이고 자질이 아쉬운 등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있는 태진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런 인간적으로는 꽤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의 장점이 컸다.
"몸은 괜찮아?"
"예."
기절할 만큼 당했는데 마치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쌩쌩하다.
도슬구는 그만큼 김도진이 놀라울 정도로 힘조절을 잘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도슬구의 물음에 태진헌과 다른 삼수생, 허삼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러면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일단 응시생들 삼분의 이가 사라졌어."
"예? 제가 그만큼 오래 기절해 있었나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시험이 그만큼 템포가 빨랐던 거야. 그리고…… 잠룡이 거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
응시생들 중 다수는 태진헌의 조와 비슷한 판단을 했다.
압도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던 그들은 자연스레 자신감이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해도 그 자신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때문에 그들은 주최측의 예상대로 여러가지 제약을 덕지덕지 달고 있어 2학년들이 가장 약한 시험 초반에 공략하여 점수를 따려 했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성공했다.
"당연한 일이었지. 아무리 2학년이라고 해도 제일 중요한 내공부터가 제한된 데다가 온갖 제약까지 덕지덕지 붙은 상황에서 일 대 삼을 어떻게 이기겠어. 어떻게 한 번은 버텨도 두 번, 세 번 두들기면 지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거지."
'평범한 2학년'들은 물론이고 나름 이름 높던 주정아와 오대용 같은 에이스들마저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아오, 근데 잠룡은 그런 상식이 안 통했다는 거야."
잠룡은 무려 여섯 개 조, 열여덟 명의 목숨을 한 번씩 날려 버렸다.
그러니까 여섯 번을 두들겼는데 넘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두들겼던 도끼들이 작살났다는 소리다.
"한 조 시험당 2학년은 열다섯 명이 배치되잖아. 그중 열네 명이 다 잡혔고 그 뒤로는 응시생들끼리 싸우느라 박이 터졌지. 그리고 이제 우리 포함해서 일곱 조가 남았어."
"……."
지금이 3페이즈라고 했다.
그러니까 배틀로얄 때처럼 이번 데스매치도 활동 구역, 그러니까 '맵'이 점점 줄어든다.
구역은 이제 겨우 두 번 줄어들었는데 응시생의 2/3가 사라졌으니 인구 밀도가 엄청 옅어졌다는 소리다.
"나름 에이스들이라 할 만한 녀석들은 벌써 점수 다 모아서 나갔거나 탈락하거나 너덜너덜해진 상황이란 말이지. 우리는 목숨 하나 잃었지만 그래도 탈락한 건 아니잖아? 거기에 체력도 쌩쌩하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태진헌의 장점 중 하나는 이런 긍정적이면서 으쌰으쌰하며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도슬구가 오래 기절해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 보자!"
도슬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
1조의 시험이 중반에 접어들었다.
두 번 구역이 줄어들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인원이 줄어 어느새 일곱 조밖에 남지 않았다.
주최측의 예상보다 빠른 페이스였지만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시행되는 형태의 시험이었고 수많은 변수가 생기도록 의도했으니 오히려 의도한 바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다.
첫 합격 팀은 약봉 약리지의 팀이었다.
그들은 2학년을 습격하는 대신 빠르게 구슬을 모으는 조금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을 택했고 오히려 가장 빠르게 합격하게 되었다.
'팀 데스매치'라 부른 건 응시생들의 성향상 당연히 데스매치의 양상을 띨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 외의 방법으로 첫 합격 팀이 나온 것이었다.
다만 구슬을 모은 것만으로 합격한 것은 아니었으니 구슬을 잔뜩 모은 그들의 팀을 습격한 다른 응시생 팀이 있었고 그들을 격파함으로써 더 큰 점수를 얻었던 게 컸다.
그리고 또 하나 주최측이 의도하지 않았던 그림을, 그러나 예상했던 그림을 도진이 만들어냈다.
2학년을 습격하여 얻을 수 있는 점수는 작년 등수에 따라 차등으로 지급하도록 했는데 이번 1조에는 가장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수석, 그러니까 잠룡 김도진을 배치했고 응시생들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처럼 김도진을 습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 훌륭하게 목숨 하나씩을 날렸다.
"…허허허. 정말로 압도적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약이 아무 소용이 없네요."
관람자들은 모두 허허 웃을 뿐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잠룡 김도진은 제약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응시생들을 '양민학살'해 버렸다.
처음 덤벼들었던 재수생과 삼수생 파티가 아무것도 못하고 순식간에 목숨 하나를 잃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 뒤 덤볐던 응시생들 또한 다르지 않은 그림이었다.
이후의 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검조차 뽑지 않고 그들을 보내 버렸으니 잠룡의 '어나더 클래스'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무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또 한 팀이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지쳤을 거라며! 지쳤을 거라며어어어!"
팀원 중 한 명의 절규에 잠룡 습격을 제안했던 응시생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시발 열여덟 명을 상대했으면 이제는 좀 지쳐야 되는 거 아니냐? 진짜 양심 어디?'
인이어를 통해 탈락자의 이름과 탈락시킨 자들의 이름이 안내된다.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였고 도진에게 여러 조가 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팀이 도진에게 탈락당했다는 안내는 오히려 도진이 지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불나방'을 양산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니겠지, 이제는 지칠 때도 됐다 생각하며 도진을 노렸던 일곱 번째 조는 앞서의 조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목숨을 헌납하며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조를 처리한 도진은 전혀 지친 기색없이, 오히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구역을 걸었다.
-고마워, 도진아. 내 복수를 해 줬구나?
그런 도진의 귀에 들리는 건 다름 아닌 게임 오버 돼 퇴장한 주정아의 목소리였다.
주정아는 온갖 제약 속에서도 훌륭하게 버텼으나 세 번째 습격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주정아가 약했다거나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세 번이나 버텼으니 과연 이제는 2학년이 된 42기 중에서도 훌륭한 편이었다.
다만, 그래.
-뒤, 뒤를 부탁해. 대용아…….
-정아야!!
탈락하면서 벌였던 오대용과의 인위적인 신파극은 좀 그랬다.
-친구 사이에 이런 말하는 건 좀 뭐하지만…….
-응, 좀 그렇네.
도진은 당시 나지윤이 흐리며 삼킨 말이 무엇인지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다.
커플끼리 꼴깝을 한다, 같은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학년 중 상위권이었던 주정아를 쓰러뜨렸던 그들은 이제 구슬만 좀 모았으면 됐을 텐데 굳이 체력을 회복하고 도진에게 덤벼들었다가 합격이 조금 미뤄지게 되었다.
'엘리트라면 쪼잔하게 구슬을 모을 게 아니라 선배들에게 도전해야죠!'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기세를 높이 사서 열심히 상대해 주었던 도진이었다.
그렇게 일곱 번째 조를 보내고 나니 도진을 습격하려는 응시생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구 밀도도 낮아졌지만 슬슬 파악되기 시작한 도진의 구역을 응시생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 구역이 좁혀지고 제약이 풀리며 도진의 영역 또한 넓어지면 마주치겠지만 아마 이번 시험은 그 전에 끝날 듯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힘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런 도진의 예상을 깨고 나타난 응시생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마주한 도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형."
"오빠."
도진의 눈앞에 나타난 응시생은 다름 아닌 우서진과 윤상미, 그리고 벽태웅 조였다.
평범하게 진행했다면 애초에 합격했어야 할 그들이 나타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도전하러 왔어요."
"그래."
우서진과 윤상미가, 지금껏 쌓아 온 자신들의 노력을 도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도진의 앞에 선 우서진과 상미가 내공을 일으켰다.
휘이이이이잉-!
차가웠던 금화도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며 마치 북극으로 변한 듯한 한기가 퍼져 나갔다.
삼음지체의 기운이 서린 우서진의 내공, 그리고 한천검공을 익힌 상미의 내공이 기세에 녹아들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기세에 내공을 실을 수 있는 경지.
그러니까 숭무고라 해도 1학년 중에서는 손꼽히는 수준의 천재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를 우서진과 상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겨우 두 개의 제약을 풀었기에 여전히 많은 제약을 안고 있는 도진을 상대로 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전혀 거리낌없이 전력을 다할 기세였고 그래서 도진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우서진과 윤상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여러 제약을 안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아는 '김도진'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그 절대적인 믿음은 과거의 도진이었다면 결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오히려 무서운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도진은 달랐다.
그 믿음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스르릉-
도진은 백설을 뽑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뽑지 않았던 백설을.
두웅-!
그리고 일어나는 기세는 지금껏 적대했던 자들을 예외없이 무릎 꿇렸던 천마기의 기세다.
비록 이번엔 적대감을 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압도적인 기세를 우서진과 상미는 버텨냈고 그래서 도진은 또 흐뭇하게 웃었다.
"하앗!"
우서진은 천마기의 압박을 떨쳐내며 묵직한 목추(木鎚)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시험이기에 본래의 무기인 통짜 쇠로 만든 특수 망치 대신 나무로 만든 망치를 들었으나 그 기세만큼은 변함이 없다.
정석대로 한다면 피해야 할 그 공격을 도진은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꽈아앙!
그 외형과 달리 상남자 그 자체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도진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받아냈다.
고도의 무리(武理)에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된 말도 안 되는 육체가 더해진 결과였다.
오히려 여력이 남아 우서진을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우서진은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날렸고 비어 버린 자리를 상미가 노리고 들어왔다.
사아아-!
검날에 깃든 한천검공의 기운이 서리를 만든다.
마치 새하얀 명주실을 자아내는 듯 신비로운 검격을 도진은 이번에도 정면에서 받아냈다.
쩌저저적-!
검에 깃든 한천검기가 도진의 백설에 담긴 내공과 격돌하며 서리꽃을 피웠다.
본래는 그 서리가 맞닿은 상대의 검을 타고 올라가야 했지만 천마기에 완벽하게 막혀 허공에 서리꽃을 피운 것이었다.
차아앙-!
그렇게 시야가 가려졌으나 순간이었고 다음 순간 서리꽃이 부서지며 비산했다.
상미는 약속대로 차륜전을 펼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쿵쿵쿵!
다음은 벽태웅이었다.
우서진과 상미의 고집에 어울려 주기로 한, 외형과 달리 착한 성격의 동기는 기습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불곰 같은 기세로 도진에게 덤벼들었다.
'오.'
도진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기세에 내심 감탄했다.
아마도 선천적으로 타고났을 엄청난 피지컬을 극대화한 듯한데 설령 2학년이라 해도 웬만해서는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도진은 이번에도 정면에서 받아줄 생각이었고 격돌했다.
그리고.
쾅-!
'……어?'
다음 순간 하늘을 훨훨 날았다.
그래, 놀랍게도 '그 김도진'이 힘에서 밀린 것이었다.
-허허.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구나.
'곤충?'
도진은 얼마 전 보았던 인터넷에서의 그 댓글을 떠올렸다.
겉으로 보이는 근육, 그리고 느껴지는 내공량을 가늠하여 대처했다.
한데 정말 드물게도 도진의 예측이 어긋났던 것이다.
부딪치는 순간 예상 이상의 충격이 덮쳤고 하늘을 날았다.
그래서, 한 바퀴 멋드러지게 돌며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한 도진은 씨익 웃었다.
"너, 대단하네?"
대부분의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등 수많은 제약이 있었다는 건 핑계다.
도진은 그저 가만히 서서 공격을 받아냈지만 벽태웅은 전력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들이박았다는 것도 핑계고.
훨훨 날았지만 앞서 우서진이 그랬듯 그 다음의 공격을 대비할 겸 충격을 흘리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날렸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핑계다.
그의 특수 제작된 무복에 기록된 충격량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 등의 모든 것을 떠나 벽태웅은 어쨌든, 놀랍게도 이 한 번의 격돌에서 잠룡을 밀어낸 것이다.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했던 위업이었다.
도진은 그런 위업을 달성한 후배의 등장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다시 백설을 들었다.
스으으…….
두르고 있던 분위기가 일변한 그것은 마치, 잠에 취해 있던 거대한 맹수가 눈을 뜬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천천히 걷는 것 뿐인데 쿠웅, 쿠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키는 도진을 상대로 벽태웅은.
"아. 저희 합격입니다."
당당히 마주 섰던 몸을 돌려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구슬 하나를 주워 들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엉?"
도진은 또 한 번 드물게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도진의 모습에 위지혁이 웃었다.
-큭큭큭. 이게 그 유명한 이기고 도망가긴가 하는 그건가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