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서로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거. 나는 너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
"가족……. 네!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할게요!"
멘탈 케어를 위한 대화에서 상미는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한 미소에 도진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미의 멘탈 케어를 마치고 일의 뒷처리에 착수했다.
-와, 진짜 힘들게 살았네.
-그러게. 자기 아버지가 방화범 공범인데 그걸 자기 손으로 잡으면 어떤 기분일까.
-부모도 부모 나름인데 그런 부모라면 차라리 손절한 게 백 번 잘한 일이라고 봄.
-ㄹㅇ.
-보호소서 살면서 알바에 무공도 익히고 진짜 열심히 살았더라.
-사람들 말로는 제일 일찍 일어나고 제일 늦게 잔다고 함. 자는 걸 못 봤다는 애들도 있던데 ㅋㅋㅋ
악질적인 기사들은 내렸지만 커뮤니티에서 상미에 대한 이야기가 도는 건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막아봐야 역효과만 날 것이었으니까.
여기에 대한 대처는 오성아에게 일임했고 다행히 반응은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근데 도대체 무공은 어디서 익힌 거지? 집안 환경 때문에 무림중학교도 못 갔다면서.
-그러게. 이게 말이 되는 성장인가?
다만 한 가지, 상미의 무공에 대한 강렬한 의문만큼은 해결이 나지 않아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도진이 직접 SNS에 답을 남겼다.
-스승님이 상미의 무재를 알아보시고 무공을 전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은 무맥(武脈)의 한 줄기를 익힌 거죠.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속보! 빙봉(氷鳳) 윤상미, 잠룡과 같은 무맥이었다!
-진창에 핀 연꽃은 잠룡과 동문!
막지 않았기에 도진의 발언과 연관한 기사가 폭발했고 사람들의 반응 또한 대폭발이었다.
-헐 ㅁㅊ 잠룡이랑 동문이라고?
-납득했다. 잠룡이랑 같은 무맥이면 이게 당연한 거지 ㅋㅋ
엄청난 여파가 일었지만 어차피 머지 않아 그렇게 될 일이었기에 도진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숨기려고 애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미가 스스로를 숭무고 수석이 될 때까지는 드러내지 않으려 했기에 그것을 존중하여 말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
상미는 도진이 동문이라 밝힌 것에 꽤 감동한 얼굴이었다.
무림에서 동문이란 가족에 버금가는 의미의 단어였으니 그녀에게 있어선 특별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근데 김도진 스승이 도대체 누구임?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자들을 키워낼 정도면 유명하지 않나?
-그게 오리무중임. 누군지 아무도 모름 ㅋㅋㅋ
-심지어 무공이 뭔지도 모름 ㅋㅋㅋ
-와, 요즘 시대에 그게 가능한가?
발언의 여파는 이윽고 도진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그리고 스승은 누구인지에 관한 의문으로 번졌지만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필사적으로 숨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천마신교의 규율이기에.
현대에 부활할 천마신교의 후계자로서 지존이자 교주가 되어야 할 도진은 그 규율을 존중하는 것이다.
스승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이은 무맥이 무엇인지 천명하는 건 천마심공의 5성에 이르러 천마의 후계자 소천마(小天魔)의 자격을 이루었을 때다.
그렇게 온갖 이슈와 도진에 대한 의문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숭무고의 관문 시험이 마무리 되었다.
올해 관문 시험 통과자는 273명으로 작년에 비해 조금 늘었다.
그중 선도 활동을 위해 돌아다녔던 도진의 눈에 띈 건 우서진과 상미, 그리고 약리지를 제외하면 세 명 정도였다.
그리고 며칠 뒤.
관문 시험을 통과한 273명의 응시생을 포함한 500여 명이 인천항으로 모였으니 다름 아닌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 탑승하기 위해서였다.
관문 시험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 다음 본 시험의 내용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인천항에 속속 모여드는 학생들은 그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으니 올해도 본 시험이 금화도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게 기정사실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관문 시험과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던 배틀로얄.
허나 배틀로얄은 매 시험 그 양상과 대상이 달랐으니 똑같은 시험이되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더더욱, 작년에 치러진 배틀로얄이 고착화되었던 형식을 비틀어 수많은 학생들이 낭패를 보도록 만들었기에 학생들은 전혀 방심하지 않고 시험에 대비하며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 올랐다.
"짐을 맡기시겠습니까?"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저번 배틀로얄에 관한 정보를 응시생들은 모두 숙지하고 있었기에 누구 하나 짐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짐을 담은 가방은 행군을 위해 준비한 군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용량이 넉넉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넉넉한 용량의 가방을 준비한 응시생들을 보며 집행부원이자 진행 요원으로서 올해도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 탑승한 도진은 슬쩍 웃었다.
저번의 시험을 얼마나 철저하게 대비했는지 전투적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바로 먹을 것, 그나마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 등을 아주 전문적으로 포장해서 가방에 담고 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과연 엘리트답긴 한데 그 모습이 모습이라 도진은 실례되지 않게 입가를 가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긴장하고 있었다.
저번 시험에 있었던 습격 사건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었다.
학생들을 완전히 속여 넘겼던 그것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숭무고이기에 가능한 스케일의 '말도 안 되는 몰래 카메라'였기에 통했던 것으로 이미 한 번 써먹은 이상 웬만큼 비틀어서는 학생들을 테스트할 수 없으니까.
또 무슨 상상을 초월할 일이 일어날까 머리를 팽팽 굴리며 응시생들은 도진을, 그리고 우정한과 강정민을 흘끔거리기 바빴다.
2학년 중 도진과 우정한, 그리고 강정민만이 이곳 식당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잠룡 김도진과 유룡 우정한, 여기에 랭킹전에서 김도진을 상대로 인상 깊은 실력을 보여준 '무관의 제왕' 강정민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그런 시선에 도진은 씨익 웃었고 우정한은 불제자스러운 미소를 띄우고만 있다.
강정민만이 왜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아 더더욱 응시생들의 수상한 시선을 증폭시켰다.
그런 시선 속에서 도진은 따로 움직여 우서진과 윤상미가 식사하고 있는 식탁에 합류했다.
"형."
"오빠."
"배는 든든하게 채웠어?"
자리에 앉는 그를 반겨주는 동생들에게 도진이 웃으며 물었다.
"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식욕 없어도 든든하게 먹어 둬야죠."
둘은 여타 응시생들보단 여유가 묻어나는 얼굴로 시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동생들의 모습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약리지를 중심으로 한 무리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약리지였으나 배틀로얄에서는 무리를 만드는 게 정석이었기에 어영부영 모인, 그러나 명문의 학생들이 모인 아주 강력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개중에 약리지에게 유독 친한 척을 하는 남학생이 있었으니 치근덕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소꿉친구였다.
'어릴 적 약리지가 줘팼다는 그 친구였지.'
세가들의 모임에서 약리지를 도발했다가 줘 터지고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로 유명한 남학생이다.
호협남가의 남사현.
이야기만 들으면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대사를 할 것 같은 캐릭터인데 아니었다.
훤칠한 키와 외모에 호감가는 분위기가 그야말로 '인싸 소협'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데 실제로도 그런 성격이라 약리지도 귀찮아할지언정 필요 이상으로 소꿉친구를 밀어내지는 않고 있다.
약리지에 후기지수 후보인, 도진의 눈에 띌 정도였던 남사현. 여기에 인싸 남사현의 친구들인 명문의 자제들까지.
아주 강력한 우승 후보 조합이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건 도진만이 아니라 여기에 모인 모든 학생들이 한 번씩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곰, 아니 학생이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음에도 무리처럼 보이는 거대한 존재감.
불곰이 사람으로 변장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만드는 그는 도진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곰 같다'고 할 때의 뉘앙스의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그 몸은 동면을 위해 살을 잔뜩 찌운 곰처럼 거대하다.
한데 그런 거대한 덩치를 구성하는 게 살이 아니라 죄다 '근육'이니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살아 숨쉬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왕년의 탁탑마왕이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로구나.
인상은 선한데 몸은 결코 선하지 않았던 게 탁탑마왕이었다.
마주치는 상대의 분노조절장애를 단번에 낫게 만들던 그 수하를 위지혁이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남학생의 몸은 대단했다.
관문 시험 중 공굴리기라고,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공을 최대한 선에서 벗어나지 않게 굴려야 하는 시험이 있었다.
이 곰같은 응시생은 거기서 신기록을 세웠다.
-? 저거 혹시 스펀지로 만들었냐?
-아님. 속이 꽉 찬 철공임. 아무튼 맞음.
-ㅋㅋㅋㅋ 시발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ㅋㅋㅋㅋㅋ
중계를 지켜보던 네티즌들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만큼 그는 자기 몸의 두 배는 되는 크기의 철공을 편안하고 정확하게 굴렸었다.
-저정도면 레알 사람이 아니라 곰 아니냐?
-아니 곰도 저정도는 안 될듯.
-차라리 곤충이라고 해라. 개미 같은 애들은 자기 몸무게의 몇 백배도 든다면서.
-곤충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 백배는 아니고 20배 정도이긴 한데 20배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거긴 하지.
-그럼 앞으로 헤라클레스 장수풍뎅이라고 부르자.
-미친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로 후기지수로 인정받는다면 웅룡(熊龍), 혹은 황룡(蟥龍)이라 불리게 될 그는 응시생들의 한손에 꼽히는 경계 대상이었다.
'학생 리그'에서 외공은 빠른 성취를 상징하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진이 흘끔 시선을 준 게 도슬구였다.
눈에 띄던 세 명 중 마지막 한 명으로, 그 실력이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기대를 훌쩍 넘어야 감탄하는 법이다.
허나 반대로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면 조금만 의외여도 시선이 가곤 한다.
도슬구는 딱 후자의 케이스였다.
일 년 전 그 한심했던 도슬구는 무려 숭무고의 관문 시험을 통과하고 본 시험을 치르기 위해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에 오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뭐, 딱 그 정도가 끝이었지만 어쨌든 한심한 양아치였던 인간이 1년 만에 숭무고 관문 시험을 통과할 만큼 성장한 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긴 했다.
그는 재수생, 삼수생 등의 숭무고 입학에 재도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수능이 으레 그렇듯 무림학교 입학 시험에도 재수생이나 삼수생들이 있다.
그것도 숭무고 정도 되면 재수생이나 삼수생을 보는 건 그렇게까지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이렇게 경험자들끼리 무리를 짓곤 했다.
도슬구는 재수생이면서도 배틀로얄을 겪은 적이 없었지만 그런 재수생과 삼수생도 드물지 않았기에 무난하게 그 그룹에 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부류의 응시생들을 태운 크래들 오브 블루 웨일은, 그들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아무 일 없이 금화도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김이 샌 얼굴을 했다가 이내 이렇게 방심시키고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유지하며 금화도에 내려섰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교사가 나섰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험의 총 지휘를 맡은 삼재인 정도수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금화도에 온 것을 환영한다. 43기 응시생들."
평소 수업 때의 이미지와 달리 교관처럼 굳은 얼굴과 말투로 정도수는 응시생들을 대했다.
"평범하게 가려나 본데."
"그러게."
응시생들 중 일부가 섭음술로 수군거렸다.
아직 고등부 입학도 안한 나이로 섭음술을 쓸 수 있다는 데서 그들이 과연 관문 시험을 통과할 만큼의 실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출중한 실력의 유망주들에게 정도수가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이번 본 시험은 응시생과 2학년 간의 팀 데스매치다."
응시생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근처에 있던 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진은 씨익 웃으며 의도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백설을 쓰다듬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