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이번 년도 기대받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인 약봉.
그녀를 도진은 알고 있었다.
도진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녀는 전생에서 유명했으며 또 트러블메이커였기 때문이다.
만만좌. 혹은 치와와.
이게 바로 지금 약봉이라 불리며 후기지수로 기대를 받고 있는 그녀의 별명이었으며.
-만만좌는 참지않긔.
…가 바로 그녀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말이었다.
분류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게 사람이니 당연히 대한민국의 무림에도 그렇게 세력을 분류하고 줄 세우는 평이 있다.
거기서 수위를 다투는 혈족으로 이루어진 세력, 그러니까 무림의 '세가(世家)' 중 하나가 의선약가다.
무공이 현실이 되면서 동시에 짙어진 그늘이 있었으니 '무림병(武林病)'이다.
현대 과학으로 아직 규명하지 못한 무공과 관련된 병.
우서진이 앓았던 삼음지체 같은 병이 그런 분류였는데, 그런 병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집단 중 특히 명성을 쌓은 곳이 의선약가였다.
그 의술을 바탕으로 무력이 열세임에도 의선약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떨치는 것이다.
말을 다르게 해 나쁘게 평하자면, 의선약가는 손꼽히는 세가들 사이에서는 명백히 열세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세가에서 나온 '변종'이 바로 약리지였다.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며 의술도 대단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단한 무공 실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세가의 화합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세가의 아이들을 속된 말로 줘패 버리기까지 해 그 자리의 어른들이 입을 쩌억 벌리게 만들었다.
그때의 일을 계기로 약리지의 이름이 퍼졌고 이내 '약봉'이라 불리며 숭무고에 원서를 내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미래인, 이제는 도진만이 알고 있는 과거의 전생에서 그녀는 '쌈닭 의사'가 되었다.
본래 의선약가는 그 독보적인 의술로 무림에 영향력을 끼치는 세가다.
대체할 수 없는 의술을 가진 세가.
그러나 의료 업계가 으레 그렇듯 환자와의 마찰이나 갈등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하물며 고객이 무림인임에야 말이다.
가진 무력이 의술에 미치지 못하는 약선의가는 그래서 더더욱 절묘한 처세술이 필요했는데 그녀는 좀 달랐다.
의술만큼이나, 혹은 의술 이상의 무공 실력을 가진 그녀는 처세술 대신 무공을 더 선호했다.
-치료에 불만이 있으면 내 앞에서 씨부리세요.
아니. '키보드'를 더 선호했다.
작은 체구와 달리 카리스마 있는 냉미녀의 이미지가 있던 그녀는 SNS 스타였는데 그 SNS로 마찰이 있을 때마다 키보드를 털어댔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그것은 이슈를 원하는 '기레기'들이 환장하는 먹이였고 의선약가 입장에서는 돌아 버릴 일들이 뻥뻥 터졌다.
환자와 SNS에서 키보드로 싸우고 여차하면 '현피'마저 뜨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치와와였다.
-내가 만만하냐?
그리고 불후의 명대사가 터지며 만만좌라는 별호(?)가 붙고 만 것이다.
이러했으니 그녀, 약리지를 도진은 명확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차갑고 도도한 냉미녀인데 까고 보니 참지 않는 치와와.
도진이 기억하는 약리지는 그러했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의 그녀를 직접 대면하고 보니 이미지가 또 다르다.
-강아지 같은 아이네요.
그래서 도진은 스승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개는 개인데 종이 다른 개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좀 뭐한데 이미지가 일단 그랬다.
장호에게 배운 사람 보는 법으로 마주한 약리지는 차라리 골든 리트리버 같았다.
그 옐로 카드가 100장 있는데 99장을 써도 자고 일어나면 모조리 회복되는 그 천사견 말이다.
바로 그 천사견의 강아지가 무엇 때문인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릉, 거리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그 드러낸 이에 집중하겠지만 도진은 뒤에 완전히 감춰 버린 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재밌었다.
전생에서는 무림의 이야기가 구름 위의, 아예 지구 바깥의 우주에서 일어난 현실감 없는 이야기와 같았다.
한데 지금 도진은 구름 위이자 우주의 이야기를 당사자가 되어 두 눈으로, 온몸으로 보고 느끼며 판단할 수 있었다.
그 일부만이, 그나마도 왜곡된 것이었던 정보가 틀렸던 것임을 알고 소소하게 즐거워할 수 있었다.
"…기쁜 일 있어?"
그렇게 기쁨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함께 걷던 소담이 도진이 아니고서는 눈치채기 힘들 만큼 미미하게 뾰로통함을 담은 얼굴로 묻는다.
도진은 아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좀 출세한 거 같아서."
"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담은 눈을 깜빡였다.
도진이 다시 웃고선 말했다.
"그냥 뭐 개인적인 감상이야. 별 뜻은 없고."
"그렇구나아."
소담은 불만을 흩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숭무고 관문 시험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빅이슈였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만큼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방문했으며 중계되는 채널에서의 채팅 또한 활발했다.
거기서 소담은 보았던 것이다.
-와.. 약리지다.
-겁나 예쁘네.
-눈나..
-? 님 몇 살인데 약리지가 누나임?
-원래 예쁘고 카리스마 있으면 무조건 누나임.
-음. 반박할 수가 없군.
어떤 채널에서 약리지를 비추고 있었다.
이번 년도 주목받는 후기지수인 만큼 하나가 아닌 여러 채널이 약리지를 비추고 있었는데, 여기에 도진과 소담이 포함되니 채팅이 몇 배로 빨라졌다.
근데 그 내용이.
-와! 잠룡!
-잠룡에 비봉에 약봉.. 개쩐다...
-이것이 숭무고의 클라스..
-아, 안돼!
-?
-잠룡 저거 화화공룡이자너 ㅡㅡ
-Aㅏ.
-도망쳐 약봉! 너마저 화화공룡의 마수에 걸려선 안 돼!
이러한 가운데 인사만 간략히 나누고 헤어진 뒤로도 도진이 왜인지 웃고 있으니 소담은 자기도 모를 불만을 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도진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미소가 약리지와는 상관없는 듯하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이라 불만이 흩어졌다.
그렇게 소담이 혼자만의 매듭을 맺고 풀며 걷다 보니 어디선가 '와!'하는 함성이 터져 나와 시선이 갔다.
뭔가 싶어 보니 일격(一擊) 시험장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었다.
일격 시험.
말 그대로 한 번의 공격을 시험받는 관문으로 가장 자신 있는 일격을 준비된 합금석에 가하여 테스트를 받는 간단하지만 명백하게 결과가 나오는 방식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합금석은 도진이 1학년 1학기 검공 입문 시험에서 사용되었던 합금석과 이름은 같지만 그 성질이 다른 물건이었다.
단단함보다는 그 질김과 탄력에 집중해 충격 흡수에 뛰어나고 웬만한 수준으로는 자를 수 없으며 충격으로 변형이 생겨도 조금 지나면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합금석을 작은 동산만 한 크기로 준비하고 온갖 장치를 연결하여 수험생들이 가한 일격을 정밀 분석한 결과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
약간은 다르지만 한 마디로 하자면 '펀치 머신' 느낌이다.
충격량, 담긴 내공은 물론이요 거기에 담긴 무리(武理)까지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점수를 매기는데 엄청난 점수가 나와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른 것이었다.
역대 기록 5위를 갈아치웠는데 그 기록을 달성한 것이.
"오, 서진이네."
다름 아닌 우서진이었다.
합금석이 워낙 커서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보이는 우서진의 주먹은, 그 절벽이 크게 움푹 들어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웬만하면 극한의 탄력으로 금방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오는 합금석이 쉽사리 복원되지 않았고 그것은 그만큼 우서진의 주먹에 담긴 파괴력이, 그러니까 내공이 엄청났다는 것을 결과지를 볼 것도 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후기지수로 기대받던, 그러나 동시에 따라붙던 의문과 불신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일격이었고 도진은 당연히 그래야지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과 불신의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의 생각대로 분명히 우서진은 몇 년의 시간을 잃어야만 했다.
허나 그 저주는 오롯이 축복이 되었으니 그것은 저주로서 기능했던 삼음지체의 기운이 모두 우서진의 내공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삼음지체란 감당할 수 없는 음기가 계속해서 늘어나며 이윽고 육체를 얼려 버리는 것이다.
한데 그 음기를 우서진은 도진 덕분에 내공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곧 우서진이 내공 보유량에 있어서는 또래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잃어 버린 세월에 대한 보상이 될 만큼.
-와 ㄷㄷㄷㄷ 저게 뭐냐ㄷㄷㄷ
-겉모습과는 다른 개쩌는 주먹..
-존나 매력있어.. 눈나.. 아니 형아..
관문 시험에서 사용되는 합금석은 요 3년간 명물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그 악명이 자자했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아기가 탱탱볼을 눌렀을 때 볼 수 있는 수준 정도의 흔적밖에 남길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극악의 탄력과 복원력을 자랑하는데 이 합금석은 부피와 밀도가 커질수록 그 성질이 강해진다.
그걸 작은 동산만 한 크기로 갖다 놨으니 얼마나 그 특성이 무시무시하겠느냔 말이다.
심지어 이건 그 특성상 필연적으로 '펀치 머신'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을 건 시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험만이 아니라 자존심을 건 일격으로 수험생들은 최선을 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은 흔적을 남기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멋드러지게 점프하여 칼을 내리치고도 그 탄력에 튕겨나가 바닥을 구르는,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를 남기게 되는 참사도 일어나곤 하는 무시무시한 시험인 것이다.
바로 그런 합금석에 우서진은 축복이 된 어마어마한 내공으로 누구나가 감탄성을 발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흔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을 증명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그 증명을 사람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그것은 곧 우서진의 명성이 실시간으로 폭증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선이 집중된 우서진은 대번에 사람들 사이에서 도진을 발견하고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으니 도진 또한 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서진이 김도진을 그렇게 존경한다며.
-ㅇㅇ 거의 도진교 열혈신도임.
우서진은 공공연히 자신의 우상이 도진임을 말하고, 아니 아예 광고하고 다녔다.
-와, 진짜 잠룡 패밀리 멤버들 화려강산인거 보소;;
-후기지수 정도 되지 않으면 입구컷이네 ㅋㅋㅋ
-아니, 근데 화화공룡 또 너야?
-봉들로도 모자라서 이제 용에까지 그 마수를 ㅡㅡ
우서진은 그 외견으로 인해 미룡(美龍)으로 불리고 있었다.
-잠룡이 우서진 이웃사촌인데 가끔씩 무공 과외를 해줬다고 함.
-ㅎㄷㄷㄷㄷ 1:1 무공 과외.
-..이건 귀한 소재로군요. 1:1 과외.. 헤으응..
-;;; 위엣놈 누가 좀 잡아가샘;;
사람들은 반 장난으로 도진이 미룡에게도 마수를 뻗친다며 채팅창을 불태웠다.
그렇게 우서진과 도진에게로 모든 관심이 쏠려 있던 바로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저적-!!
"……?"
"뭐, 뭐야?!"
돌연, 안 그래도 차가웠던 공기가 더더욱 차가워졌다.
원인은 둘로 갈라진 합금석의 단면에 내린 서리 때문이었다.
그래.
금강불괴라고까지 불리던 그 합금석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합금석을 가른 것은 겨울에 피어 은은하면서도 분명한 향기를 퍼뜨리는 것만 같은 미모에 시선이 끌린 일부만이 지켜보고 있었던.
이번 숭무고 관문 시험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의 수험생.
윤상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