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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67화 (267/741)
  • 266화

    새로운 대한민국의 후기지수를 받아들이기 위한 숭무고의 '관문 시험'은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3년 연속 동일한 시험을 준비했다.

    일반적으로 명문 무림학교의 입학 시험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며 예상치 못한 것들을 준비하는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의문을 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나 그럴 필요가 없으니 이유는 숭무고 관문 시험의 난이도에 있다.

    이를테면 그런 거다.

    시험이 100미터 달리기인데 이것을 미리 알려준다고 해 보자.

    당연하게도 미리 알고 연습하여 준비한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허나 그 시험의 합격선이 9초대라면?

    어느 정도야 준비하고 연습하여 기록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합격의 기준이 9초라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숭무고 관문 시험은 바로 이 '100미터 달리기 9초의 영역'과 비슷했다.

    제아무리 알고 있어도, 연습을 해도.

    그것만으론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을 수 있어야 비로소 '경쟁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요령을 피울 수도 없도록 무공의 전반적인, 그리고 기초적인 능력을 확인하니 어느 한 곳에만 특화되어서도 안 됐다.

    그런 사정으로 2학년이 된 도진은 작년과 똑같은 관문 시험장을 보게 되었지만 그 의미와 위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생의 도진은, 숭무고의 관문 시험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었다.

    아니. 같은 세상이었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시궁창에 처박혀 있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이번 생은 달랐다.

    기적과도 같은 기회를 잡은 도진은 선택받은 천재들의 세계에서도 천재라 불리던 후기지수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경쟁하고, 이윽고 앞서 나가 어느새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최고라 인정받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 도진은 멈추지 않고 더욱 높은 곳을 향해 가 있었다.

    작년의 도진은 이곳 관문 시험에서 그저 주어진 무대에 도전할 뿐인 무명(無名)이었다.

    하지만 이번 년도의 도진은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무대 자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무어라고 해야 할까.

    그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똑같은 무대이지만 보여주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무대 전체를 조율하고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와, 잠룡이다."

    "대박! 진짜네."

    그렇게 관여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관문 시험을 위해 개방된 학교를, 집행부의 선도 활동을 위해 걷는 도진을 관람을 위해 찾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선망의 눈길과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도진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의 도전자에서 관문 시험의 무대 완성과 운영에 주체적으로 관여한 집행부의 일원이자 전년도 최고의 후기지수로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주변의 눈길과 목소리에서 도진은 새삼 자신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관문 시험을 준비하며 느꼈던 것이 사람들의 반응으로 더욱 실체화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달라진 위치, 경험과 앎으로 인해 높아지고 넓어졌으며 깊어지기까지 한 시야까지.

    스스로 자부할 수 있을 만큼 밀도 높았던 1년은 그만큼이나 자신과 삶을 바꿔 놓았다.

    그것이 기분 좋은 울림으로 가슴을 채우지만, 도진은 물론 만족하지 않았다.

    저 아래의 풍경이 멋드러지게 펼쳐져 있지만 아직 정상에 오른 게 아니다.

    아직 도진의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정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그리고 도진은, 그 정상마저 넘어 하늘을 보고 있었기에.

    그 기쁨을 원동력 삼아 더 나아가려 했다.

    "도진아!"

    그런 도진을 호의를 가득 담아 부르는 건 다름 아닌 소담이다.

    암산서가의 후예라는 게 온 세상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비봉으로 불리는 그녀는 오늘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한눈에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은은히, 그러나 결코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신비로운 매력을 자랑하는 그녀는 등장과 함께 도진으로 향하던 시선마저 빼앗아 가 버린다.

    남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소담아."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웃는 얼굴로 소담과의 거리를 좁혔다.

    소담은 도진과 마찬가지로 관문 시험 기간 중의 선도 활동과 치안 유지를 위해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다가 도진과 만난 것이었다.

    굳이 따로 다닐 만큼 빡빡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잠시 함께 다니기로 했다.

    더욱 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모였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어색할 것은 없었다.

    "이렇게 2학년이 돼서 너랑 다니니까 뭔가 좀 간질간질한 거 같아."

    소담의 말에 도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응, 그렇네."

    "사실 그때는 생각도 너무 많고 불안한 것도 있어서 제대로 주변을 돌아볼 수도 없었어."

    그래, 그때의 소담은 '이방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도진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그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미모까지 더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졌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네가 보였거든."

    "내가?"

    "응. 사실 그때 처음 널 봤을 때, 나랑 똑같은 신비 가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났을 때의 동질감? 반가움? 그런 걸 느꼈거든. 그래서 용기내서 다가갔던 거야."

    "그랬구나."

    그때 도진은 소담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평범한 무인이 아니라는 걸 바로 읽어냈다.

    한데 소담도 어느 정도는 도진이 '특별하다'는 걸 읽어냈던 것이다.

    "내가 원래 낯을 좀 가리잖아. 그런데 너는 신기하게도 편했어."

    웃으며 먼저 인사했지만 사실 그때 소담은 표정과 반비례하여 더더욱 긴장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도진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으며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소담의 이야기에 도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성격도 좀 달랐지.'

    도진이 들은 '비봉'의 성격은 밝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었는데 사실은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어쩌면 전생에선 낯설고 기댈 곳 없는 환경이어서 일부러 그렇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이번 생에선 도진이 있었지만 저번 생에선 마음을 터놓거나 기댈 사람이 없었으니 아예 가면을 쓴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당시를 떠올렸던 소담은 많은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란히 걷는 그녀의 예쁜 눈동자를 마주하지 않더라도, 도진은 그 많은 감정들의 귀결이 환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이 전염된 듯한 얼굴로 도진은 소담과 함께 걸었고 익숙한 관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개방되어 내부가 훤히 보이는 체육관은 관문 시험 중 하나인 '장애물 달리기'가 설치된 곳이었다.

    "아! 네 이름이야."

    그리고 커다란 전광판에는 도진의 이름이 크게 표시되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역대 기록 갱신자의 기록을 도전자의 기록 옆에 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전자를 자극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다.

    소담은 그 무엇보다 먼저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추억을 떠올렸다.

    "작년에 네가 여기서 신기록을 세웠었지."

    "뭐, 그랬지."

    도진의 입장에서는 '치기 어린 시절'이라 할 만한 일이어서 조금 머쓱했다.

    그래, 겨우 일 년 전 일이지만 도진의 입장에서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어린 시절' 같다.

    그때 아주 조금은,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에 취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천마기를 폭발시키고 해방감에 질주했겠지.

    다른 학생들은 모두 그 뒤를 대비하여 드러낼 실력을 조절하고 눈치보느라 바빴는데 말이다.

    물론 후회할 만한 일은 아니었고 어리석은 짓도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은 '최선'이었지만 당시의 도진은 매일매일 무섭도록 한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뭐 이렇게 보니 스스로의 성장을 실감할 수 있어 또 뿌듯하기도 하다.

    흘끔.

    그렇게 뿌듯한 와중에 다가와 꽂히는 시선의 밀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느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그 유명한 잠룡과 비봉이 함께 있다.

    한데 그 잠룡은 이곳 관문 시험 역대 1위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니 관람자와 도전자 모두 더욱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더더욱.

    삐이이이이-!

    [26:59]

    와아아아아-!

    "오, 26초!"

    함성과 함께 나온 26초대의 기록은 이번 시험 응시자들 중 1위였다.

    심지어 남은 날동안 1초라도 단축한 기록이 나오면 대단한 일일 만큼 준수한 성적.

    한데 그런 준수한 기록을 무려 6초 이상 단축한 것이 역대 1위인 도진의 기록이라는 것이었다.

    무림에서 1초란 메울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내는 간격인데 그 여섯 배에 해당하는 기록이 도진의 기록이었으니 도전자와 관람자들은 새삼 '잠룡'이 세운 기록의 의미를 깨닫고서는 다시 흘끔거리는 것이다.

    단순한 6초도 아니고 '마의 벽'이었던 20초의 벽마저 깬 전년도 최고의 후기지수.

    그 후기지수를 보며 사람들은 과연 이번 년도에도 대단한 후기지수가 나올까 생각했다.

    작년과 재작년은 그야말로 무림 르네상스 시절을 떠올릴 만큼 엄청난 후기지수가 등장했었다.

    또래 후기지수들만이 아니라 선배들마저 '씹어 먹었던' 압도적인 천재 유지은이 바로 재작년에 등장하여 무림을 뒤흔들었다.

    과연 100년 이내 이런 천재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라는 말마저 나왔던 게 재작년이었는데, 그 말을 바보로 만들며 또 한 명의 규격 외 천재가 등장했으니 잠룡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학생 리그'에 있는 게 반칙이라는 말이 과언이 될 수 없는 후기지수가 연속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년도는 어떨까.

    올해 유독 언급되는 후기지수는 둘이었다.

    한 명은 명성공방의 후계자 우서진이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로, 무림의 불치병에 걸려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던 불행아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찬란하게 인생을 꽃피운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후기지수.

    무림 르네상스에서 이름을 떨친 무인이자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명장의 후예 우서진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몇 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던 아이가 짧은 기간 실력을 키워봐야 얼마나 키웠겠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이번에 숭무고 관문 시험에 응시한 우서진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우연처럼 도진과 소담이 마주치게 된 소녀였다.

    까만 머리카락에 첫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소녀다.

    작은 체구이지만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와 비율 좋은 몸이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듯한 예술 작품처럼 보이게 한다.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조금 처진 눈매는 거기에 부드러운 인상을 더해야겠지만 그러나, 첫눈이 내리는 겨울보다 시린 표정과 분위기가 부드러움을 지우고 있었다.

    앳됨이 묻어나는 얼굴과 작은 체구는 아직 중학생의 태를 벗지 못했으나 차가운 표정과 분위기가 쉽사리 타인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

    "의선약가(醫宣藥家)다."

    "쟤가 걔구나."

    새하얀 두루마기를 닮은 옷으로 겉옷을 통일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역시나 피부만큼이나 새하얀 옷을 두른 소녀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의선약가.

    무림의 의가(醫家)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세가(世家)'다.

    현대 의학으로는 규명되지 못한 '무림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다수 보유한 곳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힘 있는 무림세가.

    허나 순수한 무력으로는 부족함이 있다는 평가를 받던 그곳에서 '무투파 천재'가 한 명 태어났으니 소문과 함께 그녀는 성미 급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벌써 약봉(藥鳳)이라 불리고 있었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와 또래를 압도하는 무공 실력을 보여주던 그녀가, 과연 숭무고 관문 시험에서 모두에게 의봉이란 별호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안녕하세요."

    그 기대받는 신예가 냉막한 얼굴로 인사했고, 아마도 앞으로 선배가 될 도진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응, 안녕."

    그리고 속으로 스승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강아지 같은 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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