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이은지의 미래는 이제 도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이 이은지의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을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는 건 그만큼의 가능성과 재능이 이은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연예계의 성공은 운칠기삼이다.
그 실력이 분명하게 필요하지만 실력이 있다 해도 운이 없으면 결코 뜰 수 없는 세계.
물론 요즘은 자본과 그 자본으로 인한 팬의 구축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팬덤을 만들 투자를 할 수 없는 곳에 있다면 결국 '운칠기삼'을 벗어날 수 없다.
이은지는 그 운칠기삼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이은지는 기삼(三)을 기팔(八)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가수로서의 독보적인 재능을 가졌다.
작은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었으나 빛을 보지 못했고 이후 역시 두어 개의 중소기획사를 거쳐 겨우 냈던 앨범 또한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결국 이은지는 포기하려 했고 그러나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경연 대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곡을 받아 그것으로 대회를 평정,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노래'로 성공을 이끌어낸 것이 이은지였기에 도진은 설령 여러가지가 바뀌었다 해도, 이은지가 전력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런 변수 따위로는 그녀의 성공을 바꿀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도진이 아주 조금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남은 이(二), 운에 해당하는 부분에 개입하는 거다.
변화하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고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눈을 감는 건 도진의 방식이 아니다.
손이 닿는 영역에 있다면, 그리고 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손을 뻗는다.
이은지를 돕기로 했으니 그렇게 손을 뻗어야 할 곳을 생각하고 계획을 정리하며 잠에 들었던 도진은, 그리고 다음날 오전 마주한 이은지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것이었다.
"음……. 고용을 해달라구요?"
"네. 오늘 보니까 업체 분들이 청소를 하시더라구요."
"아, 맞아요."
일주일에 두 번.
도진의 집은 숭무동의 지정 업체에서 세 시간 정도 청소를 포함한 관리를 받고 있다.
내부 청소, 잔디 관리 등 종합 서비스를 받는데 사실 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집의 이용에 불편이 있는 게 사실이고 내 집의 내부까지 생판 남에게 맡긴다는 게 아무래도 도진의 성격상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다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지금껏 이 방식을 고수해 오고 있었다.
"제가 다른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청소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업체 대신 제가 여기 머물면서 식모 역할을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식모요?"
"네."
식모. 요즘 시대에는 듣기 힘든 말이었다.
식모(食母)는 수십 년전엔 흔하게 볼 수 있던 사람이다.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리고 인권이란 개념마저 희미하던 시절에 밥숟가락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숙식의 제공을 약속받고 어린 여자 아이를 보내던 것이 바로 식모다.
가는 집안에 따라 수양딸처럼 살 수도 있으나 반대로 노예나 다름없는 처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식모'라는 단어가 이은지의 입에서 나왔다는 거다.
"그, 식모는 좀……."
어감부터가 좋은 단어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요즘 시대에 '식모를 받았다'고 하면 무슨 눈초리를 받게 될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괜히 도진이 드물게도 되물은 게 아니었다.
'은지 씨는 그러고 보면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다고 했었지.'
집안이 어렵다 보니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야 했고 할아버지 또한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가 도맡아 키웠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식모란 단어가 나왔을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으며 그 생각대로였다.
도진의 그런 기색을 읽은 이은지가 아, 하고 말했다.
"단어 선택이 좀 그랬네요. 그냥 저는 가능하다면 여기 머무는 동안 집안일 알바라도 할 수 없을까 해서 말씀드린 거였어요."
"음……."
식모란 단어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그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점점 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방학동안 도진은 집에만 있었던 날이 며칠 정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업체가 방문하는 날과 겹쳐 타의로 바깥에 있어야 했던 경험을 하게 됐다.
'내 것'에 대한 의식이 생각보다 강했던 도진은 그게 조금 내키지 않았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 대청소를 한다 해도 나머지 날들에 결국 '해야 할 집안일'들이 생기는 법이었다.
지금껏 어머니와 동생들이 분담을 했다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상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맡아줄 사람이 있다면?
잔디 등이야 어쩔 수 없지만 집 내부의 청소 같은 건 매일 관리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야 외부인을 들여 대청소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평범한 소녀에게 그걸 맡기는 건 어렵겠지만 이은지는 숭무고 관문 시험마저 이미 작년에 통과했을 만큼의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건 그리 가혹한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 말고 걸리는 부분 중 하나는 그녀 또래의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인데…….
천생 연예인인 그녀는 오히려 생긋 웃으며 그런 생각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 이것도 자라 온 환경의 영향이겠지.'
일단 도진의 생각으로는 나쁠 게 없었다.
나쁠 게 없는 걸 넘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은지의 경우 숙식이 해결되는 데다 적지 않은 페이까지 받을 수 있으니까.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을 거 같아요. 부모님이랑 의논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네!"
이은지는 활짝 웃으며 구직 활동을 나갔고 그날 저녁 도진은 어머니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가사도우미를 하고 싶어 한다고?"
"네.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도진의 집 청소 서비스 비용은 여전히 명성공방에서 맡고 있었다.
그때야 호의로 받아들이긴 했는데, 이걸 언제까지고 계속 호의란 이름으로 받는 건 문제가 있다고 도진의 부모님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친구만 괜찮다면 나도 괜찮을 거 같긴 하네."
이은지가 언제까지고 가사도우미로 일하진 않을 거다.
당분간 알바 형태로 그 일을 맡을 거고 여기에 대한 보수는 도진의 집안에서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후 이은지가 그만두고서도 자연스레 이 부분에 대한 비용은 도진네에서 해결하게 만들 생각을 서정원은 하고 있었다.
"단."
"네, 어머니."
진지한 얼굴로 조건을 다는 어머니를 도진은 마주했다.
서정원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친구네 보호자분들한테 무조건 동의를 받아야 해."
"알겠어요, 어머니."
세 아이의 어머니인 서정원이 이은지의 지금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이었고 도진 또한 그 부분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원의 조건을 들은 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할머니께 말씀드릴게요."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가 먼저 나왔다는 부분에서 이은지가 심적으로 의지하고, 또 이은지를 가장 지지해 주는 것이 외할머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도진은 전화가 아닌, 이은지를 데리고 직접 그녀의 본가를 찾아갔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던 그녀의 외할머니가 도진과 이은지를 맞이해 주었다.
"손녀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외할머니는 그렇게 이은지를 부탁했다.
이은지의 외할머니는 도진의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도진을 신뢰하며 그런 부탁을 한 것이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님."
그 부탁에 도진은 그녀의 외할머니가 최대한 걱정을 덜 수 있도록 힘주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퇴근하여 돌아온 이은지의 부모님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미래가 불안정한 선택을 걱정하며, 가능하면 안정된 직업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려는 감정이 느껴졌었다.
마지막으로 신세를 졌던 친척집에도 따로 취직해 지낼 곳을 구했다는 연락을 이은지가 직접 사죄와 함께 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를 한 뒤에야 우벽진 명장을 통하여 소개받은 전문가를 대동한 자리에서 근로계약서를 씀으로써 일이 마무리 되었다.
"열심히 할게요!"
"네. 잘 부탁해요."
"가르쳐 주시면 요리도 배워서 제가 맡을게요!"
싹싹하고 의욕이 넘치는 이은지를 어머니는 썩 마음에 들어하시는 눈치였다.
"자, 이건 이렇게 분리해서 버리는 거야. 알겠지?"
"네, 누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공사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능숙하게 관계를 만들어 간다.
타고난 천성으로 동생들과도 이은지는 첫 단추를 잘 꿰는 모습을 보여 주어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날 도진의 아주 약간의 도움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이은지는 과하게 주눅들어 있던 모습을 버리고 생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새벽 상하차랑 학원 새로 등록 했어요."
"많이 일찍 일어나셔야겠네요."
"네! 근데 뭐 저도 반쯤은 무림인이잖아요."
"그래요. 힘내요."
상하차는 그 유명한 택배 상하차다. 그것도 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새벽 타임을 신청했단다.
그리고 학원 또한 아주 빠른 오전반.
일반인이라면 며칠 버티지 못할 무리한 일정이지만 그녀의 말대로 반쯤은, 그것도 꽤나 높은 수준의 무림인인 그녀라면 소화할 수 있었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응원하며, 이번 일에 대해 저녁을 함께 먹으며 오성아에게 상담했다.
"아이돌, 아니 이젠 다시 지망생이네. 어쨌든 그런 소녀를 가사도우미로 들이다니, 무시무시한 이야기네."
"아하하……."
오성아의 말에 도진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들으니 정말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악질 기자들이 환장해서 달려들 만한 이야기다.
"어휴, 어쩌겠어. 내가 더 열심히 뛰어야지."
"고마워요, 누나. 내가 누나 믿는 거 알죠?"
"…어휴, 진짜. 넌 사람 부려먹는 데에도 재능이 있단 말이야."
오성아는 그렇게 말했고 여기에 대해 위지혁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게 지존의 미덕이니라.
라고.
어쨌든, 생각해 보니 까딱 잘못하면 핵폭탄에 버금가는 악성 기사들이 쏟아질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 부분도 오성아가 잘 대처해 주기로 했다.
-인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지존은 아주 편해지는 법이니라.
스승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렇게 미처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던 부분을 오성아가 메꿔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도진은 생각해 두었던 일을 진행하기 위해 답청문의 나지윤을 만났다.
"사람을 한 명 찾고 싶어."
"사람?"
"응. 아마 지금 무명 작곡가일 거 같은데 권이솔이란 이름의 여자분이야."
"오케이. 찾아볼게."
업계의 불문율에 따라, 그리고 신뢰하는 친구였기에 나지윤은 가타부타 질문하는 대신 바로 의뢰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도진은 다음날 바로 그녀의 소재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잘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