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나비 효과.
나비의 날갯짓에 의한 영향이 시간이 지나 증폭되어 토네이도에 해당하는 결과값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결과값은 꼭 커지는 것만이 아니라 작아질 수도, 아예 완전히 다른 결과값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세상의 온갖 '사건'은 그런 나비 효과가 꼭 들어맞는 형태로 일어난다.
무수한 톱니바퀴, 혹은 도미노가 상상도 못할 만큼 크거나 작은 것들로 구성 되어선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켜 이것이 어떻게 전개되고 또 영향을 미칠지 인간으로선 다 알 수가 없다.
여기에 그 구성 요소 중 극히 작은 것만 하나 바뀌어도 연쇄 작용하여 그 결과값이 또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 일개 인간이 어떤 한 행동으로 인한 변화를 완전히 예측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진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또 체험한 사람이었다.
회귀하여 스스로가 그 '변수'로서 작용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아주 큰 관점, 그러니까 지구의 단위로 보자면 도진으로 인한 변화는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반대로 그 관점을 좁히면 좁힐수록 도진으로 인한 변화는 도미노처럼 확장되어 펼쳐진다.
상미의 인생이 그러했고 강치환의 인생이 그러했다.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다.
소담과 암산서가는 물론이요 신풍회까지도 도진으로 인한 변화는 개인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나라 단위에서 생각해야 할 만큼 크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변화의 영향은 커져 어쩌면 지구 단위로까지 확장될지 모른다.
그 변화는 도진의 시야 내에서 지금까지 지극히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벌을 받아야 할 것들은 벌을 받았고 잘 되어야 할 사람들은 잘 되었다.
하지만 도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들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부정적인 변화를 지금.
마주하게 되었다.
"바보 같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건 알아요. 차라리 잘못했다고 하면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
전생에서 레드슈는 얼마 가지 못해 온갖 안 좋은 소문 속에서 해체되었다.
이은지는 아마도 그런 기사들을 접하며 차라리 떨어진 게 잘 된 것일지도 몰라,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보자,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소위 말하는 '떡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레드슈는 조금씩 반응과 지지를 얻고 있었다.
거기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조금씩이지만 성공의 발판을 쌓아 나가는 중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천운을 놓치지 않고 기필코 잡아낼 수 있는 발판을 말이다.
일반 대중에게야 아직 그렇고 그런 그룹으로 비칠지 몰라도 업계에서는 계기만 있다면 단번에 '1군'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그룹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레드슈의 현황을 연습생으로 있었던 이은지는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친척들의 시선과 날카로운 말에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오게 되었다.
섬세한 나이에 그것은 너무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요소들임을 도진은 이해하고 있었다.
'…잠깐만.'
거기에 한 가지 더.
-장호 스승님.
-그래.
-이 시기에 이은지는…… 작은 소속사에 있지 않았던가요?
-맞다. 위키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SSL 엔터테인먼트였지.
할 것은 없는데 시간이 남았을 때 도진은 위키를 뒤적이곤 했었고 길디 길었던 이은지의 문서 또한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 아닌 당시의 머리로는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기에 함께 보았을 장호에게 질문했고 바로 스승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이은지는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뒤 아르바이트와 트레이닝으로 상반기를 보내다 그다지 이름없는 회사에 스카우트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예쁜 알바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소문을 들은 회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 실물을 확인하고 권유했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본래는 지금 소속사 연습생 신분이어야 한다는 건데…….
'…진짜 세상이 좁다면 좁구나.'
그 소속사, SSL 엔터를 휴대폰으로 검색하니 관현 게이트 관련 기사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SSL 엔터 사장은 관현 게이트의 마약에 얽혀 잡혀 갔고 회사는 폐업했다는 근황을 알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소속사 연습생이기라도 했다면 정신적으로 소소한 버팀목이나마 되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이은지의 가출 이유 둘 모두가 도진에 의한 '악영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진의 멘탈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결론을 내린 이야기였으니까.
자신으로 인해 전생과는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걸 도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그 모두를 도진이 알아야 하고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본래 그렇다.
도진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전생과 완전히 같게 흘러갈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주 사소한 변화 하나만으로도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가 되듯 사건은 변화할 수 있었고 그 변화들이 모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령 도진으로 인해 변화한 것들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도진은 이방인이거나 이물질이 아니다.
그저 다시 살게 되었을 뿐 스스로가 어엿한 세상의 구성원 중 하나라 자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으로 인한 변화에 매몰되지 않는다.
다만.
"저는, 이 길을 포기하는 게 맞는 걸까요?"
눈앞에 부정적인 변화가 있고 그것이 손에 닿으며 바꿀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글쎄요."
도진은 그것을 바꿀 의향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혹시 따로 할 일이 있나요?"
"아뇨."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이었지만 술에 취한 이은지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그럼 잠시 저랑 어울려 주실래요?"
"……?"
도진은 이은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별채가 아닌 지하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은지 씨는 검을 썼었죠?"
"……네."
의도를 모를 상황에 이은지는 취기를 날리고서 작게 대답했다.
도진은 웃으며 이은지에게 훈련용 목검을 건네준 뒤 자신도 백설 대신 목검을 들었다.
"대련 한 번 하죠."
"갑자기요?"
"네, 갑자기요."
의도를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은지가 도진이 건넨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준 건, 이런 도진의 행동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대용 등의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몰래 챙겨 보았던 바른 엔터 TV에서의 안티체리와 레드슈가 그러했기에.
이은지는 지금 도진이 무언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는 걸 알았고 목검을 들었다.
"무공 수련을 계속 하셨나 보네요."
"네."
마주한 이은지의 실력은 입학 시험 때보다 많이 늘어 있었다.
물론 숭무고 학생들의 발전 속도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었다.
관문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재능이었음을 고려하면 아주 많이 아쉽다고 해야 할 정도다.
허나 더 나아가, '그런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수련은 계속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악-!
당시의 실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힘과 속도로 휘두른 도진의 목검을 이은지는 힘겹게 막아냈다.
도진은 탄력적으로 회수하는 목검에 조금의 틈을 일부러 만들었으나 이은지는 그것을 읽고도 공세로 전환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불안한 상황이기에 최소한의 도피처를 만들기 위해 무공을 끊지 않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따닥!
하물며 지금 이은지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마저 없으니 그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무공에서 드러난다.
따다다닥!
어찌되었든 이은지 또한 무인. 그렇기에 연속해서 부딪치는 목검을 통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딱!
연속되는 부딪침 속에서 한 번 강한 충격이 가해지자 이은지는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럴 만한 충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이은지의 손아귀에 투지가 담기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은지 씨……는 무공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 같네요."
조만간 호칭 정리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며 도진은 말했다.
이은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하는 거였으니까요.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을 수 있었구요."
하지만 즐길 수 있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재능이었다.
그러니까 걸그룹 제의에 마치 운명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이끌렸고 그 길을 선택하려 했다.
이은지의 대답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마, 노래를 더 잘하실 거예요."
"……."
시선이 마주한다.
이은지는 도진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렇잖아요? 레드슈에서도 메인 보컬이었죠. 사람들도 노래는 정말 잘한다고 댓글이 달려 있었고."
"…찾아 보셨던 거예요?"
"뭐, 그랬죠. 관심이 있었으니까."
사실이지만 미묘하게 거짓이었다.
도진이 그 댓글이 달린, 팬이 아니라면 결코 볼 일이 없었을 영상을 찾아봤던 건 이은지가 '젊은 여왕'이라 불리던 전생에서의 이야기였으니까.
어쨌든 이은지가 무공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는 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경지에 이른 무림인이라면 어쨌든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게 된다.
춤은 물론이고 노래까지 말이다.
때문에 이은지는 춤은 물론이요 노래도 잘했는데 개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가창력을 자랑했었다.
무림인이기에 잘할 수 있는 것도 어느 수준까지인데 이은지의 가창력은 명백히 그보다 위에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 이은지 씨는 작사랑 작곡에도 어느 정도는 소질이 있을 테고 어쩌면 연기도 잘할지 몰라요."
"……."
그것은 신기하게도 마력을 가진 것만 같은 말이어서.
"은지 씨는 미래에 가수로 엄청나게 대성공을 거둘 거고, 그걸로 그치지 않고 연기에도 도전해서 잠깐은 욕을 먹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것마저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서 연예계의 젊은 여왕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이은지는 그것이 마치 사실처럼 느껴졌다.
이은지에게 꿈 속의 노랫소리 같은 말을 읊조리던 도진이 이은지의 눈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는 이야기겠죠. 미래가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 설령 회귀한 도진이라 해도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지 씨는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 번 실패했다.
사실, 마음 속으로는 외면했지만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은지는 실패가 괴로웠다.
"한 번 전력을 다 해 보는 건 어때요? 물론 실패가 두렵긴 할 거예요. 하지만 은지 씨는 성공이 약속된 무공에 대한 재능보다 뛰어난, 무공보다 좋아하는 재능이 있잖아요? 그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제가 보증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은지 씨를 믿는 저를 믿으라는 말은 못하겠네요.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래요. 은지 씨가 가진 무공보다 좋아하는 재능이, 그 재능이 은지 씨의 무공보다 뛰어난 재능이라는 것만큼은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무공으로는 제가 보여준 '틈'을 찌를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테지만 은지 씨가 좋아하는 재능이라면, 그 재능을 갈고 닦는다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걸로 어떤 일이든, 누구 앞에서든 주눅들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은지 씨는 아직 어리니까 괜찮을 거예요. 까짓거 눈 딱 감고 2년 정도는 어때요? 그때가 되어도 아직 은지 씨는 스무 살이에요. 스무 살이면, 그때부터 죽어라 무공 수련해서 어엿한 대기업에 들어가도 늦지 않을 거예요. 아예 숭무고 야간반에 입학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졸업하면 스물셋이니까 아직 앞날이 창창한 파릇파릇한 사회초년생이겠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인재 욕심이 조금 있거든요. 뭐 조금은…… 몸값이 낮을 때 제가 투자를 하고 싶은 의향도 있구요?"
그것은 귀에 콕콕 박혔으나 꿈 속에서 듣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은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갈래길에서, 하려면 하나의 길을 정하고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 했어야 했는데 발만 걸치고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등을, 힘있게 밀어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지지 못했던 그녀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따스한 온기에 담아서.
지금 이 순간.
이은지는 처음으로 마음 속 한 걸음을 분명하게 내딛었음을 스스로 자각했다.
* * * *
다음날.
도진을 마주한 이은지가 말했다.
"도진 씨."
"네?"
"저를 고용해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