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도진의 하루는 보통 오전 4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연신극기공을 수련 후 천마심공으로 피로를 푼다.
그것이 끝나면 5시 즈음 어머니와 동생들의 연호신공을 함께 하며 가볍게 몸풀기를 했다.
이후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그날 해야 할 일들을 하는 식이었다.
대략 하루에 서너 시간을 자는 편인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낮잠을 포함하여 6시간 이상을 자 무림인들의 평균 수면 시간을 웃돌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에 더욱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수면 시간이 이렇게 줄은 건 이제 심상세계에서의 수련만큼이나 육체 수련이 중요해진 시기여서다.
심기체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기초 공사'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지금 위지혁과 장호는 도진의 육체 수련에 좀 더 비중을 두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줄여가며 매일매일 한계를 깨고 있는 도진은 연호신공의 수련이 끝난 뒤 어머니에게 이은지에 관해 말씀드렸다.
"어머니."
"응?"
"어제 제가 친구의 친구를 집에 데려왔는데요."
생판 모르는 여학생이 아니라 소진의 지인을 데려와 재우게 됐다고 간결히 도진은 사정을 설명드렸다.
아들을 누구보다 믿는 서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늦게 왔나 보네?"
"네. 그래서 어제 말씀 못 드렸어요."
"그래. 그 친구는 아침 먹고 갈 거지?"
"네."
자랑스럽고 듬직한 큰아들의 일이었으니 가타부타 말하거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서정원은 그저 웃으며 큰아들 친구의 몫까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고 도진은 샤워 후 별채로 향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네."
똑똑,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서 별채의 모습을 확인한 도진의 눈동자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집은 큰데 집안일을 하기엔 힘든 환경이다 보니 아무래도 미진한 부분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숭무동의 지정 업체에서 깔끔하게 청소를 해 주니 큰 부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소한 관리의 측면에선 아쉬운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별채의 경우엔 지금 사용을 하지 않다 보니 업체가 다녀간 뒤의 공백이 있다.
한데 그 부분들을 이은지가 말끔히 청소했다.
도진이 수련을 하는 사이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난 이은지가 별채 한 켠에 놓인 청소 도구를 이용해 청소를 한 것이다.
"그, 청소 도구가 있길래 제가 청소를 좀 했어요."
"네. 깨끗해졌네요."
그러고 보면 이은지는 이런 성격이었다.
책임감이 있고 어른스런 면도 있다.
그런 이은지를 도진은 아침 식사 자리로 데리고 갔다.
"아침 먹고 가요."
"아, 그…… 감사합니다."
사양하려던 이은지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도진을 따라 걸었다.
"어서와요. 도진이 친구의 친구라면서요?"
"네, 네에."
"차린 게 많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많이 먹어요."
"아니에요. 진수성찬인데요."
서정원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회사일로 바쁘다 보니 실력 발휘를 맘껏 하기 힘든지라 식탁이 좀 간결해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은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간결해진 식탁'이 국에 빛깔부터 남다른 반찬이 다섯 가지 이상이었으니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서정원은 진심이었고 이은지 또한 진심이었다.
"다녀오세요, 어머니."
"다녀오세요!"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어머니는 아들딸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했고 도진과 유진이, 호진이도 외출 준비를 했다.
"타세요."
도진이 슈킨팍시 로드런너를 가지고 나오자 호진이가 말했다.
"아, 응. 고마워."
이은지는 웃으며 인사하고선 보조석에 앉았다.
"시간이 아직 좀 남았으니까 얘들 레슨실에 데려다 주고 가려고 해요."
"네."
유진이와 호진이는 방학 동안 숭무동 내에 있는 교육 시설에서 각자 희망하는 과목의 레슨을 받고 있었다.
유진이는 보컬과 춤 트레이닝으로 도진의 응원에 정말로 아이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유진이가 정말로 이 길로 나아갈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많이 어린 나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진심으로 보낸 시간이라면 앞으로의 삶에 좋은 양분이 되어줄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호진이는 무려 수학 심화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수학에 흥미가 생겼다는 말이다.
'응, 그렇지.'
잘하는 건 웬만하면 즐거운 법이다. 여기에 호진이는 여러가지 공식을 대입하거나 실마리부터 시작하여 명확하게 존재하는 답을 찾아내는 수학이 즐겁다고 말했었다.
도진은 그것을 '이론적으론'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저 웃으며 호진이를 응원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의 호진이는 공부를 정말 잘했었다.
다만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공장에 나가야만 했었다.
도진은 그런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에선 무엇이 되었든 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줄 생각이다.
"형아 친구의 친구면 누나도 형아랑 친구인 거예요?"
"친구의 친구니까 친구 비슷한 거 아닐까?"
"음……."
이은지 대신 도진이 대답했고 아직 많이 어린 호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이은지가 난처하지 않도록 도진이 조율을 하며 동생들을 레슨실에 내려다 준 뒤 어제의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이은지의 얼굴에는 불안이 짙어졌는데, 그 불안은 틀리지 않아서 공사 현장의 숙소에 도착하자 분노한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이 정신나간 새끼들아!!"
굵고 거친 목소리다.
느껴지는 기질 또한 강성한 것이 꽤 덩치가 크고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 업계 종사자라면 으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육체 노동을 하려면 그만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숙식 알바'들을 다루려면 또 그만큼의 성격을 보여 주어야만 하니까.
"내가 니들 행사에 사사건건 간섭하든?"
"…아뇨."
"그래, 씨발. 니들이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뭘 해도 상관없댔잖아. 그러니까 서로가 지킬 것만 지키면 되는데 왜 니들은 그걸 못 하냐고 이 새끼들아!!"
손찌검을 하지만 않을 뿐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으르렁거리는 태도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아직 조용한 아침이었기에 그 고함소리는 숙소 여기저기는 물론이요 바깥까지도 들리고 있었고 그것을 들은 이은지의 얼굴에서 불안이 더욱 짙어지며 크게 요동쳤다.
도진은 그런 이은지의 앞에 서며 망설임없이 현장 안에 들어섰다.
"뭐야?"
성큼성큼 안에 들어서는 도진의 기척을 느낀 반장이 늘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모자를 쓴 낯선 놈, 그리고 그 뒤에서 어물어물 따라오고 있는 이은지에게까지 시선이 향하자 반장의 입이 다시 불을 뿜었다.
"이은지!!"
공사 현장에 무단으로 들어가 술판을 벌이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이쪽 바닥도 '레드오션'이다.
때문에 노동자의 행실이나 평판이 중요한데 그딴 짓거리를 자신이 관리하는 학생놈들이 벌였으니 관리자인 그의 기분이 결코 좋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다른 놈들과 달리 이은지는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동안 보던 모습과 달리 두려움에 책임감없이 도망간 건가 생각했던 반장이었다.
그런 이은지가 나타났으니 더욱 화가 치밀은 반장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삿대질을 했다.
"외박을 하고 이제서야 기어들어 와? 간댕이가 부었지?!"
"죄, 죄송합니다."
어찌되었든 잘못이 명백했기에 이은지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더욱 반장의 화를 부채질했고, 이내 불길은 이은지의 옆에 선 도진에게로 향했다.
모자를 쓴, 애들의 말에 따르면 문월고 학생으로 생각되는 놈.
상황을 봐선 이놈이 이은지를 데리고 갔던 거 같다.
'애새끼가 벌써부터…….'
어디 모텔 같은 데서 하루를 보내고 어차피 짤릴 거 돈이라도 같이 받으러 온 건가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열이 차올랐다.
"넌 뭔데 입을 꾹 다물고!"
쿠웅-!
기세 좋게, 불을 뿜듯 소리를 치던 반장의 입이 중간에 턱! 닫혀 버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의 입을 닫게 만든 건 조용히 서 있던 도진의 진각(震脚)이었다.
단순히 땅을 강하게 밟는 게 아닌, 내공을 실은 무공으로서의 '진각'이다.
퍼져 나가는 힘의 여파는 그저 타고난 육체 능력과 미미한 내공이 전부인 반장에게 있어 도진이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고수'라는 걸 자각하게 만든 것이다.
도진은 반장 같은 타입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업계에서는 저런 성격이 분명히 필요하니까.
하물며 불량 학생들을 다루기 위해선 이런 모습과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허나 그걸 아무런 경계없이, 아무에게나 풀어내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러지 말아야 할 때 그렇게 남을 윽박질러 놓고 '어, 아니네? 미안.'하고 뒤늦게 사과한다.
그렇게 끝내서는 안 될 일인데 말이다.
한데 피해자는 '사과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속이려 든다.
전생의 도진은, 그런 합리화를 해야만 하는 약자였고 그래서 이런 상황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의 도진은 그런 '가해자'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해야 하는 약자가 아닌 잘못된 윽박지름을 정면에서 다물게 만들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러니까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입을 다문 반장을 올려다 보며 도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선 저부터 상황을 좀 설명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반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
촬영한 동영상이 있었기에 이야기를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 반장 또한 경찰을 부르는 등 사건이 커지면 오히려 큰 손해를 보기에 일은 그렇게 불문에 부쳐졌다.
다만 내부적으로도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탈을 눈감는 건 안 그래도 규율을 쉽게 여기는 이 바닥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선례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장은 이은지를 포함한 여섯 명을 바로 해고해 버렸다.
전날까지의 일당을 바로 계산한 뒤 가차없이 내보내 버린 것이다.
대체할 노동자를 구하는 등 그로서도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어차피 레드오션인 바닥.
그가 조금만 손해를 보고 부지런히 움직이면 대체자를 구할 수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다.
도진은 그 자리에서 해고된 이은지와 함께 공사 현장을 나오게 되었다.
조금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도진이 말했다.
"새로 일자리를 구하실 때까진 별채에서 머무셔도 돼요. 어차피 안쓰던 곳이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도진의 말에 이은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현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도진은 그녀에게 정말로 인사만으론 갚을 수 없는 여러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또한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혐오와 무력감이 지울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있었다.
"어디 가야 할 곳 있으세요? 데려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야 하니까 저는 따로 갈게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은지를 두고 도진은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도진은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이은지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