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사실 늦은 시간의 문월동과 인근은 돌아다니기에 좋은 곳이 못되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죄를 짓게 만드는 치명적인 이유 중 하나다.
그런 가난이 짙게 눌어붙은 동네에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다니는 무림학교가 세 곳이나 있는 게 문월동 인근이다.
그리고 공공연한 비밀로 이 무림학교들은 '흑도 조직 양성소'처럼 기능하고 있으니 치안이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싹이 노란 것들, 그리고 환경에 따라 노랗게 변색되어 버린 것들이 인적이 드물어진 늦은 밤거리를 활보하니 감상에 젖어 거닐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평소 이상으로 무흔잠영의 묘리를 더 짙게 운용하여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했던 것이고.
지독했던 전생의 인생을 보냈던 곳이지만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었고 그 안에 한 줌의 행복이나마 있었기에 그것을 걸음마다 반추하는 시간이었다.
그 추억을 방해받지 않도록 존재감을 지웠던 것인데…….
떵그렁!
"아이 씨벌, 이게 장난하나."
그 추억을 방해하는 소음이 끼어들고 말았다.
사실 가림막 너머,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물 안에 있는 게 어떤 부류의 인간일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으며 이 동네엔 흔한 부류였기에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 했는데 저쪽에서 이렇게 존재감을 강력하게 피로해 버리면 결국 신경이 향하고 만다.
평소 불필요한 것들마저 보고 듣고 느끼지 않도록 어느 정도 감각의 범위를 통제하곤 하는데 그렇게 통제했던 감각이 일어나 내부를 훑었고.
'왜 여기에?'
그렇게 알게 된 것들에 도진은 우뚝 멈춰 서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하! 진짜 존나게 어이털리네. 야. 이제와서 순진한 척 하냐?"
"이 시간에 술 먹으러 왔다는 거 자체가 너도 다 알고,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거잖아. 근데 씨발 이제와서 빼?"
"너 문방구 엔터였잖아. 할 거 다 했을 텐데 뭔 지랄이야."
-사람에겐 '기질(氣質)'이라는 게 있다.
장호는 그렇게 말하며 눈으로 보지 않고도 사람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감각이 민감한 고수는 기척이나 느껴지는 기(氣)의 성질만으로도 정확하게 사람을 구분해낼 수 있는데 장호는 자신만의 방법을 도진에게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도진은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대번에 건물 안에서 핍박받고 있는 것이 전(前) 레드슈 멤버, 입학 시험에서 탈락하고 말았던 이은지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고 그녀를 핍박하는 것이 '양아치'들이란 것도 사전에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망설임없이, CCTV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림막을 넘어 대화를 들으며 안으로 진입했고 곧 술파티가 벌어지고 있던 내부를 보게 되었다.
"뭐야, 이건?"
난잡하게 벌어진 술판은 비행청소년이란 단어, 혹은 선입견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신문지를 깐 바닥에 늘어진 싸디싼 과자에 오징어, 종이컵, 소주와 맥주 정도.
그 술판을 둘러싸고 있는 건 나이를 속이려는 듯 진한 화장을 한 여학생 두 명과 도진을 노려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남학생 세 명이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했던가.
사실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만약 본인이 타인을 속일 생각이 없다는 전제를 둔다면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설득력을 가지는 말이 된다.
사람의 인상이란 평소의 생각과 가치관, 표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여기에 기질에 의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관상만으로도 그 사람을 얼추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두 명은 누가 봐도 '양아치 관상'이다.
이미 감각을 통해 느껴지던 기질로 알고 있었던 것이기에 도진은 그들을 슬쩍 훑는 것으로 파악을 끝내고 동떨어져 있는, 겁을 먹고 떨고 있는 이은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음…….'
정리되지 않은 머리에 성의없이 세탁한 듯 관리되지 않은 옷.
몸과 마음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데 거기에 더해 가출 청소년 같은 모습이다.
"아니 씨발 뭐냐고 새꺄."
생각할 부분이 많았던 도진은 그러나 우선 다가오는 기척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는데 거기에 도진은 동영상 녹화 모드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뭐, 뭐야."
"진짜 돌았나 이 새끼."
경험과 연륜으로 도진은 가림막을 넘는 그 순간부터 동영상 녹화 모드를 실행시켜 두었다.
그것으로 증거를 충분히 수집한 뒤 자세를 잡았는데.
스윽-
"하?"
그 자세, 그러니까 기수식(起手式)을 보고선 양아치들이 코웃음을 쳤다.
복서처럼 두 주먹을 들고 오른 다리를 앞에 둔 그 자세는, 다름 아닌 킥복싱을 베이스로 한 문월중과 문월고의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무림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일반적인 학생'들은 당연하게도 이렇다 할 고유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한 무공을 무림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보유하고 있으니 구사하는 무공을 보고 출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곳 문월동 학생들 사이에선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는데 문월중고와 상월중고, 그리고 다른 한 곳까지 세 학교 사이에 알력이 심한 것이 배경이었다.
"햐, 이 씹새끼 문월고 따라지네."
"뭐냐. 영웅놀이라도 하냐?"
킬킬거리며 비웃는 그들의 모습에 지켜보던 위지혁도 허허 웃었다.
-무공을 알아보는 안목은 있으면서 그 무공을 사용하는 게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하니 헛똑똑이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지금 도진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여기에 특색없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으니 그리 밝지 않은 조명에 도진을 못 알아보는 걸 탓하는 건 조금 가혹할 수 있었다.
허나 단신으로 나타나 말없이 기수식을 취하는 도진을 보고도 일말의 경계도 하지 않는 건, 과연 흑도(黑道)라 부르기도 과분한 그야말로 뒷골목 양아치다운 허술한 모습이다.
"야."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한 놈의 면상에 도진은 굳이 말을 섞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빡!
짧게 끊어지는 주먹은 대번에 놈의 면상에 쌍코피를 터뜨려 주었다.
"끅!"
"새끼가!"
꼴에 무림고등학교 학생이랍시고 당황하면서도 나머지 둘이 양쪽에서 덤벼들었다.
면상을 얻어맞은 놈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중에 양쪽에서 주먹을 휘둘러 온다.
…인지부조화가 올 정도로 허접한 수준이요 합공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너무 수준 높은 것들만 보아왔다.
숭무고에 다니는 도진에겐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학생들의 수준이 일상이었고 심지어 그것을 넘어 무림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무인들마저 상대했었다.
사실 이게 비정상이고 도진의 '또래'라고 하면 이게 평범한 것이다.
추억을 곱씹던 상황이었다 보니 변덕으로 기억에 남아 있던 문월고에서 어설프게 배웠고 제대로 기억에 남지도 않은 문월공(紋月功)의 기수식을 취해봤던 건데 이게 딱인 상황이란 생각이 들었다.
슥-
도진은 가볍게 왼발을 뒤로 빼며 몸을 돌리는 것으로 양쪽에서 날아든 주먹을 동시에 피해 버렸다.
겉으로는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한 회피였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격차였다.
그렇게 공격을 피해낸 도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으며 오른 주먹을 뻗었다.
뻑!
"꺽."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맞은 놈이 격통에 입을 쩌억 벌렸다.
꽈각!
이어 그 반탄력을 고스란히 담은 팔꿈치에 마찬가지로 갈비뼈를 가격 당한 뒤의 놈 역시 머리가 새햐얘지는 고통에 쓰러져 부들거렸다.
두 놈은 쓰러져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고통에 소리없는 절규를 내지를 뿐이었다.
"씨발!"
어어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쌍코피를 흘리는 놈이 욕을 했지만 도진은 이어 그놈의 갈비뼈 아래에도 주먹을 먹여줌으로써 사이 좋은 모습을 연출해 주었다.
삽시간에 남학생 세 명이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게 되자 남은 여학생 두 명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치려 들었다.
"동작 그만."
"히익!"
"사, 살려주세요!"
양아치들의 세계는 흑도의 음습한 곳 못지 않게 잔인하다.
두 여학생은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렇기에 어찌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어 벌벌 떨었는데, 도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담담하게 말했다.
"얘들 곧 일어날 테니까 그러면 먹은 거 정리하고 경찰서 가자. 오케이?"
"네, 네!"
도진의 말에 두 사람은 오히려 살았다는 듯 화색을 띠었다.
어쩌면 무자비하게, 정말로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처벌은 커녕 '보호 조치'를 받게 될 경찰서에 가자니 구사일생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여학생은 남학생들이 일어나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우선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봉지에 구분없이 때려박는 수준이었지만 도진은 굳이 거기에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잔소리는 그럴 만한 가치와 인연이 지속될 때나 할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두 여학생에겐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의 연장으로 이들을 경찰서에 넘기는 것으로 일을 끝내려 한 것이었는데…….
"자, 잠깐만요."
그런 도진을 만류하듯 부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은지였다.
도진의 시선이 향하자 이은지가 주눅든 얼굴로 말했다.
"그, 진짜 죄송한데요. 시, 신고는 하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요?"
'…….'
의도를 잘 모르겠다.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마찬가지로 처벌 받을 걸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혹시, 이은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던 이유와 연관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그러도록 하죠. 다만 이유를 좀 듣고 싶은데요?"
"네, 네. 제가 말씀 드릴게요."
그리하여 양아치 다섯은 술자리를 정리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도진은 이은지와 함께 24시간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의 꼭대기층에 마주앉게 되었다.
"아……."
그리고 밝은 장소에서 모자를 벗은 도진을 마주한 이은지는 자신의 앞에 앉은 것이 '잠룡 김도진'이란 것을 뒤늦게 알게 돼 두 눈을 크게 떴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가져왔네요."
"네, 네. 저 이거 좋아해요."
도진이 건네는 캐러멜 마끼아또를 받아든 이은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음.'
마찬가지로 캐러멜 마끼아또를 앞에 둔 도진은 그 모습에 또 생각이 많아졌다.
'그땐 좀 힘들었어요.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었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꿈을 이루고 싶었어요.'
입학 시험에 떨어지면서 빚도 지고 레드슈에서도 탈퇴하게 된 이은지는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뷰나 인터넷의 글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도진도 여럿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 그런 글을 몇 번이고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이은지는 전생의 미래에서 대단한 스타가 되었으니까.
다만, 그렇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본다 해도 지금의 이은지는 과하게 주눅이 들어 있다.
하물며 그당시 '방황했다'는 이야기는 듣거나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늦은 시간에 그런 양아치들의 술자리에 끼어 있었다는 것도 많이 걸리는 부분이다.
때문에 도진은 미래의 대스타인 그녀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렇게 마주앉은 것이었는데…….
"그, 사실은 제가 가출을 했는데요……."
이은지의 첫 마디부터가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