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오성아의 틴트를 발라 더욱 돋보이는 입술에 깃든 오묘한 미소에서 도진은 그녀가 기분 나빠하거나 어려워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도진이 읽지 못한 부분의 감정은 꽤 의외의 것이었으니 도진이 오성아에게 꽤 커다란 점수를 땄다는 것이었다.
그래,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제안으로 도진은 오성아에게 큰 점수를 땄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제안 그 자체였다.
오성아가 자신에 대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기술이 뛰어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데,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이끄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이를테면 '내가 무언가를 할 건데 나를 믿고 따라와!' 같은 것이다.
그녀가 이런 것을 싫어하게 된 건 할아버지, 사자군 오군성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집안과 회사의 분위기가 사자군 오군성의 철저한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방침이 정해지면 싫든 좋든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다보니 오성아는 그런 가풍과 사풍을 숨막혀 했고 아주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성아는 도진이 마음에 들었고 호감이 갔다.
도진은 그녀의 할아버지처럼 당당하고 자신에 차 있으며 무언가를 함에 있어 거침이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인을 대하는 태도는 부드러우면서도 배려심이 빠지지 않는다.
당장 지금의 제안만 해도 그렇다.
그 성격과 태도라면 '내가 문파를 세울 건데 나를 믿고 함께 해 줘요!'라고 힘주어 말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당겨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무례라기보단 신뢰를 주는 리더다운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도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당기는 대신 그 자리에서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성아를 강하게 원한다.
하지만 힘있게 밀어붙이지 않고 그녀가 원할 때 스스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저 자신의 손을 내민 채 기다려 준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의 일에 대해선, 그리고 필요하다면 거침이 없고 적에게도 자비가 없는데 자신의 사람들을 대할 땐 결코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믿어 주고 지탱해 주며 기다려 준다.
그런 모습들이 꾸준하게 오성아가 호감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이번의 제안 또한 큰 호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때문에 오성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도진이 건넨 손을, 그 제안을 미소지으며 받아들였다.
"응! 좋아. 그 제안도 받아들이도록 할게."
"고마워요."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게 돼 기쁜 기색을 보이는 도진의 기분에 전염된 듯 오성아의 미소에도 기쁨이 깃들었다.
만약 도진이 과감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거나 장기적으로라도 지금 다니는 회사를 관두고 자신의 문파로 넘어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면 오성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길게 고민한 뒤에야 거절의 뜻을 보였겠지만 속으로는 그 즉시 거절을 결정했을 것이며 도진에 대한 감정도 상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터.
하지만 '외부 고문 의뢰'의 형태였기에 오성아는 반대로 그 즉시 수락으로 뜻이 기울었다.
지금 도진과의 사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사자군 오군성의 지시를 여전히 수행중이었다.
오성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도진과의 관계를 쌓아 나가라는 지시를 말이다.
사실 도진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성장하는 지금, 오성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공고한 의지까지 더해 머지 않아 그 계획은 폐지될 듯 보였다.
허나 지시를 내린 오군성의 말이 없는 한 '원만한 형태로' 지시는 계속 이행해야만 했다.
그녀의 상황과 오군성의 지시라는 현실적인 사안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것도 바로 외부 고문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형태였던 것이다.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어.'
더 나아가, 오성아는 스스로의 의지로 도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쪽으로 고민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나이 차이가 나는 언니와 오빠, 그리고 친척들까지도 요즘 들어 그녀에 대한 견제와 압박에 간섭까지 심해지고 있었으니 오대용이 정식으로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대용은 여전히 승계 의사가 없다고 공언했으며 실제로 순위 또한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에 비례하는 욕심과 반비례하는 시야를 가진 그들은 오대용에 대한 회유와 견제를 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오대용과 가까운 오성아에게도 회유와 압박 등 여러 형태로 접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채찍질 당하며 달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 온 그녀에게 있어 이것은 '사표를 던지고 싶은' 충동에마저 채찍질을 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진이 손을 내미니 오성아는 정말로 진지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도진 쪽에 올인해 볼까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의무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그런 생각에 의해 더욱 강하게 그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 * * *
교육을 받고 자격증 등을 따고, 매입한 꼬마 빌딩이 리모델링 되는 중에도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쳤으니 도진은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응, 검토해 봤는데 승인이 났어."
"오케이. 그럼 계약하자."
계약 이야기를 하는 건 도진과 서태주였다.
장소는 서태주의 어머니 이금주가 운영하는 TJ 푸드의 사무실로, 이번 계약은 다름 아닌 도진의 문파에 식사를 공급하는 내용이었다.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장원에서야 지금껏 하던 대로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문파 내에서는 다른 문파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식사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밥과 반찬 등을 하루에 한 번 배송해 주는데 그것을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원하는 시간에 무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도진은 그것을 일부러 최상위 등급으로 계약했다.
"조금 과한 지출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좋은 것을 알아야 나중에 여러분들이 독자적으로 암산서가를 운영하실 때 비교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당장의, 코앞의 것만 보는 게 아니라 미래까지도 생각한 결정.
소여은을 포함한 제자들에게 도진은 그렇게 말했고 그들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첫 대면에서 그들은 '아가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긴다'는 기색이 강했다.
하지만 도진이 마음 먹고 기세를 일으킨 채 대화한 뒤로는 그런 기색이 많이 사라졌다.
힘으로 억누른 게 아니다.
도진이 '그런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님을, 순수하게 그들을 도와주려 하는 사람이며 '큰 사람(大人)'이라는 걸 그 흉포하면서도 정정당당한 기세로 본능의 단계에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들까지 더해 이제 그들은 도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다.
무언가를 할 때 그냥 하거나 대충 설명하지 않고 몇 번이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동의를 구했으며 그들이 싫다 해도 몇 명은 꼭 데려가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진심을 보여주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방학 내내 바쁘게 지내며 소담과 오성아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많아졌다.
그리고 소담이 암산서가의 일 때문에 오성아와 둘이서 밥을 먹게 되었던 날이었다.
"도진아."
"네, 누나."
"문파 이름을 잠룡문(潛龍門)이라고 한 건 별호랑 연관 지은 거야?"
"네. 일단은 그게 무난하다 생각했거든요."
자연스러운 물음과 대답.
그러나 그 대답에 오성아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언뜻 보면 함께 밥을 먹으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오성아의, 도진의 문파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한 심중을 살펴보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도진은 언제나 그랬듯 문파에 관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진심이었으며 모든 것에 관해 진지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도진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문파의 이름을 정함에 있어 '일단은'이나 '무난하다' 같은 생각을 했다고?
오성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거쳐가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떠오른 가능성 중 하나는 그런 것이었다.
지금 세운 문파는 개인적으로 도진이 모아 온 돈 일부에 암산서가의 제자들이 대부분의 투자를 하는 형태로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주는 도진이지만 따져보면 많은 부분은 '암산서가의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빌딩을 포함하여 대부분은 도진의 것이 되며 암산서가는 투자에 대한 '대가'를 받는,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나눠가질 수 있도록 계약서를 썼다.
만약 투자한 만큼의 원금 회수가 불가할 경우엔 빌딩을 포함한 현물들을 암산서가에 넘기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오성아는 생각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도울 것이며 다른 사람도 아닌 도진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게 될 문파였다.
낙관적인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확률은 제로라고 오성아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 본래 계획했던 형태가 아니라 암산서가의 투자를 받아 세운 문파니까 거쳐가는 문파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허나 이건 오성아가 겪어 온 도진의 성격과 됨됨이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계약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맞춰 한 것이지 실제는 계약서에 담길 수 없는 신뢰와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도진은 그런 오성아의 속내를 언뜻 읽을 수 있었기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성의없이 지은 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본래 써야 할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지금은 제가 쓸 자격이 없어서 그래요."
"지금은, 이라는 건……."
"네. 그런 거 있잖아요. 자격이 있어야만 이름을 쓸 수 있는 그런 거."
조금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오성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협 소설로 치자면 그래, 그런 거다.
-일정 경지에 올라야만 너는 무림으로 나갈 수 있다.
-이 무공을 대성하지 않고서는 후계자라 이름을 대서는 안 된다.
같은 그런 거 말이다.
"네가 익힌 무공도 그런 제약이 있었던 거구나."
사실 무협 소설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의외로 이런 제약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오성아는 도진에게도 그런 제약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직은 제가 그 이름을 쓸 수 없으니까, 임시로 잠룡문이라고 하기로 했어요. 뭐, 의미적으로도 딱 맞잖아요?"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물 속에 숨어 있는 용.
스스로 말하긴 뭣하지만 의미적으로는 딱 맞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본래 써야 할 문파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마신교(天魔神敎)'다.
뭐 거창한 문파명이지만 현실적인 면에서는 제도적으로든 뭣으로든 못 쓸 이유가 없었다.
천마신교란 이름을 쓴다고 이교도나 사교도로 몰리는 것도 아니고 이 현대에 그걸로 박해받을 일도 없다.
실제로 세계적으로도 마교, 천마신교는 물론이요 무당파, 화산파 운운하며 등록한 문파가 가볍게 수천은 넘는다.
다만 정식으로 인정받는 곳이 없다시피 할 뿐.
그러니 쓰고자 한다면 천마신교로 등록할 수도 있다.
허나 '천마가 되어야 하는' 도진은 아직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
-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네가 정식으로 '천마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다. 너는 '위지혁의 제자'이지만 아직 천마의 제자는 아니란 말이니라.
위지혁은 말했다.
천마는 '천마(天魔)'여야만 한다고.
그것은 거창하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느니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느니 형식적이면서 '쎈 말'로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천마는 천마여야 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만큼 천마는 특별한 이름이었으며 그렇기에 천마를 입에 담기 위해선 그 자격이 필요했다.
-천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천마기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자격이란 천마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즉, 천마심공의 5성에 다다라야 함을 의미했다.
천마심공의 5성에 다다른 자는 '천마의 제자'라 당당히 스스로를 칭할 수 있었다.
천마의 제자, 소천마(小天魔)라고.
도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소천마라 칭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만이 천마신교의 개파를 선언할 자격이 생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게다.
위지혁은 그렇게 확신했고 도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었고 그렇기에 도진은 조급해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꾸준히 나아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