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연말연초.
그 직업과 업계의 특성상 가장 바쁜 시기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스케쥴을 정신없이 소화하고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 오성아는 도진의 시간이 되면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비즈니스적인 이야기.
본래 그런 목적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누나동생하는 사이가 더욱 친숙한 관계였기에 쉬이 여길 수 없는 연락이었다.
때문에 오성아는 풀메이크업에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프로페셔널하면서도 매력적인 정장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도진과 소담, 암산서가의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서와요, 누나."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반겨주는 도진,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주고받게 된 소담.
여기에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경계의 빛을 숨기지 못하는 여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대한민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암산서가의 1대 제자 소여은이었다.
미리 암산서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녀의 존재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 관련한 도진의 이야기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파를 만들 거라고?"
"네."
문파.
이제 2월이니 해가 바뀌어 도진이 문파를 창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는 했다.
허나 송년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오대용에게서 도진의 목표에 관해 듣지 못한 오성아였기에 그것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음, 생각해 보면 어울릴 거 같기는 한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 문득 상상해 보니 긍정적인 의미로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들을 보여주던 도진이 문주가 된다면 꽤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이 제갈량처럼…….
'크흠.'
"암산서가와 관련된 일이지?"
오성아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고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파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소담과 소여은을 필두로 한 암산서가의 제자들이 원하는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문주인 서문호를 기다릴 동안 자신들이 안정적으로 '사회화'를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포함하여 깊게 생각할수록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도진은 여기서 오대용을 도와 주었을 때의 경험과 깨달음을 떠올렸다.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러기 힘든 것을 단번에, 단시간에 처리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차근차근 해나가면 될 일이다.
소담과 소담의 가문을 위해 그정도 노력을 할 용의가 도진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것을 시간을 들여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된다.
"여기서 떠올린 게 문파였어요."
문파라는 테두리 안에 모두를 들이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암산서가로 돌아가야 할 제자들을 도진이 만든 문파의 문도로 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암산서가의 제자분들을 제가 만든 문파의 '식객'으로 초청하는 방식을 생각했어요."
"식객."
"네."
식객은 무협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다.
그 가문, 혹은 문파에 '손님'으로 머물며 여러가지를 제공받고 대신 여러가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제가 문주로 있으면서 암산서가의 제자분들을 식객으로 받고, 그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문파로서의 일들을 해 나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제자분들은 무림과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여러가지 것들을 배우실 수 있을 테니 좋은 수라고 생각했어요."
"응, 그렇네. 좋은 생각 같아."
확실히 도진의 말대로였다.
단순히 옆에서 조언을 해 주는 것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허나 이런 식으로 '한솥밥을 먹는 환경'을 만들어 두고 함께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문도가 아닌 식객이라는 포지션을 취하게 함으로써 온갖 문제들 또한 사전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외부인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배격한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사회화를 거치지 않으며 자란 데다 신풍회라는 경험을 했으니 생각 이상으로 그 문제는 크다.
이 부분을 도진이 문주로서 전면에서 중재하고 완충하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
이러하니 오성아는 도진의 수를 묘수, 묘안이라 생각했다.
"누나도 좋은 생각이라 해 주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요."
"응?"
도진이 웃으며 오성아와 눈을 맞추었다.
"누나에게 컨설팅을 의뢰하고 싶어요."
"응?"
살짝 커지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며 도진이 말을 이었다.
"뭐 문파 등록만 하는 거면 저 혼자 해도 충분하겠지만 조금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이거든요. 암산서가의 제자분들이 투자를 좀 하기로 하기도 하셨구요.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게 좋을 테고 제가 아는 이런 분야의 전문가는 한유아 선배랑 성아 누나거든요. 여기서 업계의 프로페셔널은 누나니까, 누나에게 부탁하고 싶어서 연락한 거예요."
형식적으로만 문파를 만들고 식객으로 들일 계획이 아니었다.
하려면 본격적으로. 그래야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소담을 포함한 암산서가의 제자들이 어느 정도 투자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서문호의 딸이자 암산서가의 적통이면서 후계자인 소담이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면서 문파의 위기에서 도와준 도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독학으로, 어느 정도는 임기응변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던 도진은 생각을 바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고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도진의 말에 오성아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미소지었다.
"네가 부탁한 일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 알겠어. 그 컨설팅 의뢰, 내가 맡을게."
사실 이 분야는 오성아의 주력 분야는 아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주력 분야가 아니란 거지 '전문가'라고 할 만큼의 지식이 그녀에겐 있었다.
실제 학생들의 컨설팅을 맡았다가 문파의 창설이나 운영에까지 업무가 확장되었던 일도 몇 번 있었기에 실무 경험 또한 있다.
때문에 오성아는 자신 있게 도진의 의뢰를 수락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누나."
* * * *
오성아가 컨설팅 의뢰를 수락하면서 문파 창설에 관한 일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척척 진행되었다.
우선 문파의 외부 거점으로 사용할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꼬마 빌딩을 하나 샀다.
일부 필로티 구조로 지하 1층과 1층 일부를 주차장으로 쓰고 나머지 1층의 공간은 사무실, 2층부터는 문파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사에 들어갔다.
그와 별개로 오성아의 도움을 받아 암산서가의 제자들은 서울 외곽에 숙식과 수련이 가능한 공간을 포함한 '장원'을 한 채 구매하여 거기서 머물게 되었다.
부산 외곽의 달동네에 머물다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었는데 이제 번듯한 거처가 생긴 것이다.
그 사이 도진은 오성아의 도움을 받아 문파를 창설, 등록하고 필요한 여러가지 수속을 밟았다.
"이름을 등록하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정말로 무림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꽤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해."
한국은 물론이요 세계 전체로 따지면 등록된 문파의 수는 세계 인구를 따라잡을 만큼 많다.
하지만 그중에 제대로 된, '무림의 문파'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문파의 수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그 한 줌의 조건은 무림에서 문파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할 수 있는가다.
그러니까 최소한 '초식 의뢰', 단적인 예로 연예인 경호 의뢰라도 받을 수 있을 만한 실적과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정부와 무림맹이 공인하는 '면허'는 시작선에 서기 위한 기본이고 관련 자격증 여럿은 스펙에 한 줄 추가 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적어도 이름 있는 비무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 정도는 있어야 명함이라도 건넬 수 있다.
레드오션인 초식계가 이러하고 육식계로 가면 여긴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육식계는 오히려 '블루오션'이다.
허나 그건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업계이기에 그렇다.
또한 그렇기에 결코 아무나 입성할 수 없으며 경험과 실적이 없다면 끼워주지도 않을 만큼 배타적이다.
이런 배경으로 만성 인재부족이기에 자격과 실력만 갖춘다면 바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넌 출발이 정말 좋아."
오성아는 설탕을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말했다.
"잠룡 김도진은 이미 업계에서도 인정할 만큼의 명성이 있잖아?"
1학년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개미굴에서의 토벌에서 훌륭하게 활약했으며 심지어 답청문 사건을 넘어 신풍회의 카자카미 히로토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그 전으로 가면 '관현 게이트'에서도 중심에 있었으니 이미 학생의 영역이 아니라 무림의 영역에서도 명성을 날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적이다.
그뿐인가.
명성공방과 끈끈한 사이이며 무림 전담 타격대의 고위 대원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정의검가 또한 아군이다.
여기에 한유아에다 자신까지 등등등…….
이건 거의 '2회차'라고 해야 할 만큼 압도적인 조건이 아닌가 말이다.
오성아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빨리 문파를 세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죠."
송년회에서 앞으로의 계획으로 문파를 세우겠다 말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멀리 보고 한 이야기였다.
문파를 세우는 것 자체야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문파를 운영하고 키우는 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으니까.
당장 문파를 세워봐야 문도를 모집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공고를 내고 생면부지의 사람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정말로 문파가 커지면 모르겠지만 시작은 울타리 내에 들인 사람들로만 시작하고 싶었으니까.
한데 그렇게 되면 정말로 들일 사람이 없다.
바로 떠오르는 건 상미 정도일까.
유지은은 도진의 울타리 내에 들어온 특별한 관계의 사람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정의검가의 사람이지 출가외인이 아니다.
오대용도 오성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일이 있고 소담 역시 나중은 몰라도 일단은 암산서가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문파를 세워봐야 유명무실할 상황이었기에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후, 방학이라 다행이네요."
"그렇지. 뭐든 시작할 때가 가장 바쁜 법이니까."
일단 결정이 났다면 미루지 않는 도진이었기에 바로 일에 착수를 했는데 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교육을 받아야 할 것도 있었고 필수로 따야 할 수료증이나 자격증도 있었다.
여기에 거점이 될 빌딩의 물색과 답사, 구매에 필요한 여러가지 절차들과 또 그 안에 들일 여러 비품들의 구매까지.
일부러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암산서가의 제자들을 대동했는데 그들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될 정도였다.
도진이야 하나씩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물리적으로 학교를 다니면서는 쳐내기 힘든 스케쥴이었다.
그리고 그런 스케쥴의 연속이었기에, 새삼 함께 하는 오성아가 강하게 탐나는 도진이었다.
'탐난다.'
그것은 무리의 수장이 으레 가질 수밖에 없는 인재욕이었다.
함께 일을 해 보니 오성아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도진은 본격적으로 문파를 운영하려는 시점에서 오성아가 강하게 탐나게 되었다.
때문에 도진은 며칠의 생각 끝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누나."
"응?"
"이번 일로 누나가 얼마나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거든요."
"고마운 칭찬이네."
싱긋 미소지으며 순수하게 칭찬을 받아들이고 오성아는 본론을 기다린다.
도진은 조심스럽지만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단순히 컨설팅에서 끝내지 않고 누나가 제 문파의 외부 고문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도진의 제안에 오성아의 미소에 오묘함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