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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51화 (251/741)
  • 250화

    부산의 십여 호의 가구가 모여사는 존재하되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허름한 달동네에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방문했다.

    달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심지어 일본인 노신사가 방문하는 건 특별하다 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볼 사람이 없었기에 이 일은 외부에 드러날 일이 없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

    노신사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귀신같이 나타난 굵은 턱선이 인상적인 중년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나 중년인은 거기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노신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 그 뒤를 따라가 중년인의 허름한 집 거실에 들어섰다.

    손님의 방문에도 차 한 잔 내놓지 않는 중년인과 마주앉은 노신사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중년인은 서류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 확인했고 그 굵은 눈썹이 슬쩍 흔들렸다.

    중년인의 반응에 노신사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도련님께선 이번 행사에서 약속을 이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인가?"

    그답지 않게 확인을 요구하는 발언에 노신사는 미소를 한층 더 진하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흔들림없는 진실입니다."

    "…알겠다. 틀림없이 실행하도록 하겠다."

    "예.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용건이 끝나자 노신사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달동네를 떠났다.

    그리고 중년인은 동네 전체의 인원을 소집했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가 여덟, 그리고 30대의 남녀가 다섯, 10대와 20대의 젊은 아이가 일곱으로 딱 스무 명이다.

    그들 모두가 굳은 얼굴로 마을의 대표, 아니 '문파의 문주'인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중년인이 말했다.

    "빚을 갚을 때가 왔다."

    "……!"

    "삼촌!"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담담하지만 힘있는 말에 벌떡 일어나 외쳤던 10대의 젊은 아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물론이요 모두가 동요를 쉽사리 숨기지 못했다.

    중년인은 그들의 흔들림을 중심이 되어 붙잡듯 힘있는, 그러나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세월 우리를 얽매고 있던 것들을 놓을 때가 온 것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목표가 어떻게 되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건 다름 아닌 중년인의 아내다.

    문파의 안주인다운 태도에 중년인은 속으로 용서를 구하며 서류 봉투를 꺼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이윽고 여덟 명의 중년인 중 막내인 남자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놈들이군요. 유감없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겠어요."

    "그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말했듯 드디어 빚을 갚을 때가 온 것이다. 눈물을 보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중년인의 시선은 10대의 고개를 푹 숙인 아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유약한 성격이라 유독 엄하게 대하던 아이를, 그 옆에 앉은 아이가 토닥여 주고 있었다.

    주마등처럼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스쳐갔다.

    기댈 곳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키웠다.

    최소한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나뒹구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아빠'라 부르지 말라며 회초리를 들었고 아이는 서럽게 울었었다.

    그런 못난 '삼촌'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보여주는 것이 고마웠고, 그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또 속으로만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 죄책감을 원동력 삼아, 그리고 딸을 생각하며 중년인은 다짐했다.

    '너희에게 진 죄를 갚을 수 있도록 가진 모든 힘을 다하겠다.'

    * * * *

    부산 외곽의 어느 호텔.

    상호를 검색하면 흔해 빠진 광고글이 나오는 것이 전부인, 그야말로 배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특색없는 그 호텔 주위로 험악한 인상의 흑도 무인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뒷골목이 아닌 호텔 주위를 벌건 대낮에 흑도 무인, 아니 조폭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부라리는 눈동자에 괜히 불똥이 튈라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주변의 시선들을 물리며 조폭들이 속속 모여드는 이 호텔이 바로 오늘 HK 항공과 일원 해운의 협업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들 조폭이 바로 오늘 협업식의 경호를 포함한 보안 담당으로 고용된 '문파'였고 말이다.

    그들 해부파(海斧派) 중 한 명이 목을 죄는 답답함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며 말했다.

    "형님. 이거 정말 괜찮을까요?"

    "왜?"

    "아니 뭐 우리가 막장 인생은 맞는데, 야쿠자 새끼들은 수틀리면 그냥 쑤셔 버린다잖아요."

    "씨팔. 그거 걱정하면 이 바닥에서 못 해먹지. 까짓거 우리도 그런 깡다구를 배우면 되지 않겠냐. 그럼 오히려 우리가 부산을 먹을 수도 있지 않겠냐."

    "뭐, 그건 그렇긴 한데요."

    그들은 스스로가 말하는 대로 막장 인생이었기에 마약을 유통한다거나 사람을 '담그는' 것 자체에 대한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았다.

    허나 그런 막장 인생이라도 자신의 목숨은 소중한 법이었기에 그 유명한 일본 야쿠자와 앞으로 한솥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불안감을 내비친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겉보기엔 그들과 같은 양복 차림이지만 생김새에서 바로 알 수 있는 일본인인 그는 다름 아닌 일본에서 건너온 야쿠자였다.

    "행사 시작하니 다 들어오라고 하신다."

    "어, 그래. 지금 간다."

    발음은 어쩔 수 없이 어색하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듯 언어의 구사에는 막힘이 없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한국어에 능숙한 야쿠자들이 많이 늘었으니 모두가 한국에 진출하려는 신풍회의 영향이었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고 안에 들어섰던 해부파는.

    "허, 허억?!"

    "뭐, 뭐야?!"

    경악하여 입을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으니, 오늘의 주빈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모조리 싸늘한 시체가 되어 피웅덩이에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

    '10년만 지나면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협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HK 항공의 비행기에 탑승한 장하직은 그렇게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장하직을 지는 해로 분석했다.

    삼선 의원이라지만 아들 장영준의 영향까지 더해 그에 대한 여론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기에 사선에 성공하지 못하고 참패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굳이 아들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뒤를 대비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신풍회였다.

    신풍회는 부산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했고 거기에 장하직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아니, 단순히 보태는 게 아니라 '올인'을 했다.

    그를 위해 HK 항공도 내놓기로 했고 각오를 증명하기 위해 심지어 아들마저 후쿠오카 사관학교로 보낸 것이다.

    그 올인은 성공적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잠룡으로 인한 관현 게이트가 터져 핵심 인물들이 갈려 나가며 그가 중심에 설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잭팟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풍회는 서서히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부산을 잠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의 중심에는 장하직이 앉게 될 것이었다.

    여러가지를 고려했을 때 신풍회는 대리인을 내세워야 했고 거기에 가장 유력하며 자연스러운 것이 장하직이 되었으니까.

    벌써부터 협업하던 의원들은 장하직에게 잘보이기 위해 꼬리를 치고 있었으니 경쟁자조차 없는 상황에서 미래에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장하직은.

    "당신들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카자카미 히로토의 단언과 함께 나타난 얼굴과 체형을 가린 의문의 무인들에 의해 목이 베여 다른 의원들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이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카자카미 히로토는 의원들을 숙청한 무인들에게 웃는 얼굴로 치하했다.

    그런 카자카미 히로토에게, 무인들의 대표인 중년인이 피묻은 칼을 뻗었다.

    "빚은 갚았다."

    "그래요. 당신들은 빚을 다 갚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쓸모가 없어졌군요?"

    칼을 뻗는 그들의 모습에 카자카미 히로토는 약속된 전개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 처단자 가문인 암산서가(巖山徐家)는 꽤 쓸 만한 패였다.

    허나 슬슬 그들을 부리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칼날이 언제고 자신에게 향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카자카미 히로토였다.

    그래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들을 '폐기처분'하기로 했는데 우습게도 그들 또한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중년인, 암산서가의 가주 서문호가 말했다.

    "빚을 다 갚았으니 이제 해야 할 도리를 하겠다. 우리는 너희를 제압하여 만인의 앞에서 우리와 너희의 죄를 고하고 그 처분을 청할 것이다."

    쿠구궁-!

    선포하는 서문호와 주위의 무인들에게서 강대한 기세가 퍼져 나갔다.

    암산서가는 처단자 가문이었으나 엄밀히 말해 '암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은신과 기습을 통한 암살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공을 바탕으로 암살을 성공시키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 열두 명의 기운이 이 자리에 모인 카자카미 히로토를 포함한 신풍회의 무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리고 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 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해부파의 조폭들이 우왕좌왕했다.

    서문호가 그들에게 일갈했다.

    "조금이라도 죄를 줄이고 싶다면 신풍회에 맞서 싸우도록!"

    웅혼한 내공이 담긴 일갈에 해부파가 움찔했다.

    허나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신풍회의 무인들이 그들을 베어 버렸다.

    "으아아악!"

    "미, 미친 새끼들이!!"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부파는 목숨을 노리는 신풍회 무인들에 맞서 무기를 휘두르며 생존하기 위해 발악했다.

    카자카미 히로토는 그 비명을 배경 삼아 입꼬리를 올리고선 서문호를 마주했다.

    "……."

    "왜? 의외인가? 저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게?"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순 없다.

    그러나 압도적인 한 명의 고수는 열이 아니라 스물의 하수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 무림이다.

    내보이는 기세로 보건대 암산서가의 열두 명은 카자카미 히로토가 데려온 정예 무사 열다섯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머릿수에서 앞서는 일반 무인들 다수를 다짜고짜 해부파를 공격하는데 돌렸으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 암산서가를 쳐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카자카미 히로토는 큭큭거리며 말했다.

    "그냥 주는 사료를 받아 먹으며 살았으면 편하고 윤택한 삶을 살았을 것을……."

    "사람으로 태어나 가축이 될 생각은 없다."

    "대쪽 같은 절개가 있는 것마냥 지껄이는구나. 그래봐야 사람잡는 인간 백정이 아니더냐, 너희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자들을 베기 위해 우리는 살아왔다."

    "우리의 명령에 따라 쓰였던 칼따위가 자부심은 높구나."

    "…저런 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이런 모욕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아버지."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카자카미 히로토와 서문호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 자리에 있어선 결코 안 될, 그러나 있어야만 했던 암산서가의 후계자 서소담이 있었다.

    카자카미 히로토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고 서문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대상이 어찌되었든 약속은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서문호의 말에 소담은 입술을 깨물었으나 더 말을 이어나가지 않고 검을 뽑았다.

    "카자카미 히로토.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큭큭큭. 몰락 귀족년이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하는구나. 귀엽게 굴었다면 내 옆자리가 허락되었을 것을……. 이제는 첩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카자카미 히로토는 숭무고의 교류 행사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진심'을 내보였다.

    쿠웅-!

    "……!"

    서문호가 두 눈을 부릅떴다.

    느껴지던 카자카미 히로토의 경지가 두 단계는 뛰어 버린 것 같았다.

    명경지수가 깨질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피부를 자극하는 강렬한 존재감이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때려박았다.

    "삼초(招). 그 안에 내 밑에서 개처럼 기게 될 것이다."

    꽝!

    단언과 동시에 카자카미 히로토가 진각을 밟으며 쇄도했다.

    정면에서의 쇄도임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속도에 소담은 그 움직임을 일순 놓쳤고, 그래서 카자카미 히로토의 주먹을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꽈아앙!!

    검을 내밀고 팔뚝으로 받쳤으나 충격을 반도 해소하지 못한 소담은 포탄처럼 튕겨나가고 말았다.

    무언가를 할 틈도 없었다.

    카자카미 히로토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 강렬한 기세가 오기조차 부리지 못하게 현실을 때려박았다.

    실력을 상당 부분 숨기고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나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단 한 수를 막지 못하고 소담은 벽에 처박힐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몇 군데나 되는 골절을 입어 무력화될 것이었다.

    카자카미 히로토는 그렇게 무력화된 소담을 짓밟을 생각이었다.

    허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스윽-

    소담은 딱딱한 벽 대신 단단하지만 동시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게 되었다.

    그 품에, 소담은 이미 한 번 안긴 적이 있었다.

    "괜찮아?"

    햇살처럼 파고드는 목소리에 소담은 저도 모르게 힘을 풀고 안심한 미소를 지으면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네노"

    빠아악!

    무언가를 말하며 거기에 끼어들려던 카자카미 히로토가 거짓말처럼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일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카자카미 히로토는 격통과 함께 뒤늦게 그것이 유형화된 내공을 이용한 원거리 타격, '권풍(拳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분노했다.

    콰광!

    "감히!"

    땅을 박차며 일어서는 카자카미 히로토.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턱까지 치밀었던 말을 저도 모르게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오오오오오오오-!!

    무언가, 무언가 정말 말도 안 되게 흉흉하고 거대한 기세가 포효하고 있었다.

    미증유의 괴물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의 근원은, 도진이었다.

    "카자카미 히로토."

    조용히 그 이름을 부른 도진이 주먹을 쥐었다.

    콰드득-

    "좀 쳐맞자, 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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