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50화 (250/741)

249화

암살자라는 건 의외로 대중에 친숙한 '직업'이다.

서양에선 어쌔신이란 이름으로, 동양에선 서양에도 유명한 닌자란 이름으로 만화나 게임 등에서 단골처럼 등장하곤 하니까.

다만 암살을 업으로 하는 만큼 현실에서는 결코 농담처럼 말할 수 없는 직업이기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만,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했다.

윤리와 법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다는 걸 제외하면 암살은 어떤 일을 달성하는 데 있어 아주 손쉽고도 확실한 수단 중 하나였고, 때문에 윤리와 법을 극복할 수 있는 자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은밀하게 암살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 선(善)이든 악(惡)이든.

"한국도 다르지 않았어. 아직 왕실이 남아 있던 한국에도 그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던 가문들이 있었지."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마지막 활동은 근현대 혼란기에 있었던 매국노의 척살이었다.

"음지의 가문은 혼란기에 특히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어."

무림 르네상스 시대에는 낭만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현대와 무림의 공존이 이루어지기 전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한국은 특히나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니 왕실이 무너지고 심지어 정부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처단자 가문들은 더욱 혹독한 시련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웃나라 일본은 '닌자'를 '막부'가 흡수하는 형태가 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오히려 양지에 나서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는 많이 다른 형태로 현대 사회의 기틀이 갖춰졌고 그 사회의 양지에 '암살자'의 자리는 없었다.

"양반, 귀족 가문이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단은 없었고 증명해줄 왕실이나 정부도 없었어. 심지어 특성상 양지에서의 기반 또한 없었지. 현대 사회의 기틀이 갖춰지면서 '암살'을 업으로 삼기도 힘들어졌어. 그 길로 빠지면 흑도 안에서도 더욱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양반 가문으로서 그 길을 택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지."

양지에 드러나 있던 재산으로는 가문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언가 다른 것을 시작할 만큼 '사회성'이 좋지도 못했다.

남은 건 가문의 자연스러운 해체였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더더욱 얻기 힘들게 되었다고 나지윤은 설명했다.

"그렇게 잊혀진 가문 중 멸문하지 않았던 가문의 출신이 소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카자카미 히로토의 발언 때문이었어."

카자카미 히로토는 소담에게 농담이랍시고 '약혼자'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거기서 단서를 얻어 나지윤은 마찬가지로 피해자 가문이었던 처단자 가문에까지 닿을 수 있었고 그곳이 소담의 출신이라는 것까지 밝혀냈다.

"소담이의 가문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우리와 마찬가지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 다만, 그래. 우리처럼 속았던 거야."

신풍회라는 걸 숨기고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

당연히 의심을 받았으나 그들은 스스로를 '일본의 지식인'으로 포장했다.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매국노, 침략자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고 활동비를 지원하면서 신뢰를 쌓은 거야. 사실은 자신들의 걸림돌이 되는 자들만 골라서 지목한 거라는 걸 숨기고."

그 과정에서 소담의 가문은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발을 들이고 말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고 나지윤은 설명했다.

"완전히 신풍회의 손아귀에 넘어간 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소담이가 이렇게 '가출'을 해서 숭무고에 입학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응, 그렇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도진의 기색은 고요했다.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 당연하지만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장호에게 배웠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풍회에 거스를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을 거야."

"예전 네가 살던 동네의 산에 소담이가 칼을 묻어 두었었지. 그 칼을 회수한 뒤에 그 흔적을 확인한 정체 모를 무인들이 있었어. 이미 소담이가 가출을 한 순간부터 놈들은 은밀히 감시를 붙여 두었던 거지."

"……."

이 부분만큼은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음에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숭무고에 입학한 뒤로 소담은 도진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숭무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많은 시간을 신안을 뜨고 장호가 함께 하는 도진이 곁에 있었으니 그들이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도진이 신안을 뜨기 전, 그리고 소담이 숭무고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이들이 은밀하게 소담의 뒤를 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래 10년동안 '매국노 의원 습격 사건'이 있었잖아."

매국노 의원 습격 사건.

혼란기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전적이 있는 의원들, 혹은 그 의원의 자손으로 그 못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던 의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몇 건 있었다.

처음엔 무림이 얽힌 단순한 습격 사건인가 했는데 파고드니 그런 전적이 있는 자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음지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암살자들이 정의구현을 이룩했다는 반응이 인터넷에서 강하게 퍼져 나갔었다.

그런 대세였던 반응에 깊이 공감하고 통쾌하게 생각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진 또한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암살을 실행한 게 소담이의 가문이었어. 이제서야 드러난 일이지만 모두 신풍회가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의원들을 소담이의 가문을 움직여서 처리한 거였지. 명목상 거절할 수 없는 자들만 골라서 말야."

"다만 이번엔 성질이 좀 달라. 한둘도 아니고 기사조차 나지 않는 협업식이라지만 그런 자리에서 장하직 같은 삼선의원까지 포함해 여럿을 죽이겠다니. 심지어 그들 중엔 처단자 가문이 나설 만한 명분이 충족되지 않는 자들도 있었어. 그리고 이 자리엔 카자카미 히로토가 직접 참석할 예정이야."

"그렇구나."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졌다.

나지윤은 이 협업식을 덮칠 계획이다.

그를 위한 준비를 이미 착착 진행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굳이 마지막이 되어서야 소담과 소담의 가문이 연관되어 있음을 한 번에 설명해 주었다.

"…소담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야."

친구의 뒷조사를 한 꼴이 되었고 또 그것을 도진이 듣게 된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가문이 얽힌 사건에 자신의 목적을 우선하여 개입하려 한다.

때문에 나지윤은 좋지 못한 얼굴이었는데 거기에 도진은 망설임없이 이렇게 말했다.

"도와줄게."

"……괜찮은 거야?"

"응."

* * * *

이야기가 끝나고 짧은 해가 져 벌써부터 어두워진 저녁에 도진은 유지은과 카페의 프라이빗룸에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유지은은 레몬티를 빨대로 느릿하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네."

"뭐가요?"

"나는 네가 그렇게 쉽게 지윤이를 도와준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도진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택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땐 여기에 집중하면 답이 나오거든요."

"거기에?"

유지은은 도진의 가슴팍에 시선을 주었으나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의 본능이랑 양심은 생각보다 더 대단해서 뭐가 옳은지, 뭐가 답인지 대번에 답을 내 주거든요. 다만 사람의 이성이 거기에 살을 붙이다 보니 어려워지는 거죠."

유지은의 깊은 눈동자에 신묘한 빛이 담겼다.

도진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답은 나와 있어요. 거기에 개입해서 지윤이와 지윤이의 문파를, 소담이와 소담이의 가문에 더러운 손을 뻗은 신풍회를 치는 거죠. 그리고 소담이와 소담이의 가문을 최선의 결과로 이끄는 것. 이것저것 재느라 고민해도 상황은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니까. 물론 고민 자체는 계속 해야겠지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만큼은 이미 답이 나온 일이에요."

"…응, 그렇네."

때로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유지은은 그 말을 떠올리며 도진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시선을 유지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도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거길 봐야겠네."

"아니, 선배 거 놔두고 왜 제 걸 봐요?"

"네가 내 목표잖아."

"음, 반박하기 힘든 논리네요."

"히히."

조금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억지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허나 그걸로 문제를 가릴 순 없었다.

도진이 내놓은 답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 유지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에 도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으론 답이 될 수 없겠죠. 그래서 열심히 답을 구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노력은, 일상이자 당연한 풍경이 되어 버린 벚꽃길에서의 만남이었다.

* * * *

"안녕."

"응, 안녕."

눈이 많이 내렸다.

벚꽃 대신 밤새 내린 눈으로 채워진 벚꽃길을 도진은 소담과 함께 걸었다.

"오늘은 뭐 먹을까?"

"돈가스."

도진의 물음에 소담은 그렇게 말했고 두 사람은 근처의 적당해 보이는 돈가스집에 들어가 앉았다.

흘긋거리는 시선을 담담하게 넘기며 도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치즈고구마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소담의 것과 바꿔 주었다.

그리고 도진의 앞에 놓인 돈가스 역시 소담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 먹기 좋게 잘려 있었다.

도진이 씨익 웃었다.

"고마워."

나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소담은 도진의 웃는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잊혀진 '신비 가문'의 후예인 줄 알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접근을 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사이가 되었다.

호기심으로 애써 덮었지만 낯섦과 두려움을 지우지 못했었고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미지에 준비없이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그런 소담을 지탱해주고 기댈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눈앞에 있다.

시린 바람과 끝 모를 어둠에게서 지켜주는 햇살처럼 그녀를 감싸주는 사람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리광을 부리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믿어주고 여전히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갔음에도 그 문을 두드리지 않고 울타리 너머에서 변함없이 기다려 주는 사람.

그 모습이 이윽고, 소담이 걸었던 빗장을 풀고 손을 내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도진아."

"응, 소담아."

"나, 한 번 더…… 도와달라고 해도 돼?"

그 조심스럽고 간절한 물음에.

"당연하지."

도진은 그녀의 내민 손을 굳게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도진의 전생.

비봉 서소담은 밝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다고 알려졌다.

비봉의 무림출도 후 1년, 겨울.

비봉은 한국의 조폭과 야쿠자 세력 사이의 싸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심장을 찔러 자살, 그 후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

많은 것들이 전생에서 들었던 것과는 달라져 있었다.

진실이 묻히고 그런 내용만이 흘러 나왔는지, 혹은 자신에 의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도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건 지금 다시 사는 삶에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런 '사소한 변화'가 아닌, 도진이 원하는 '아주 큰 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쌓아온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미래를 바꿀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