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기에 역으로 지독하게도 비현실적인 광경이 되었다.
친선 비무.
본래 비무부터가 목숨을 노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친선 비무쯤 되면 서로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교류를 목적으로 함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한데 바로 그 친선 비무에서, 숭무고를 대표하는 잠룡 김도진이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1학년 대표 오오후미 카이토의 목을.
푸욱-
찔러 버렸다.
"헉!"
"……!!"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손꼽히는 무림학교 학생들임에도 한 발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스릉!
채채챙!!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챙기며 흉흉한 기세를 피워 올렸고 그에 대항하여 숭무고의 학생들 또한 각자의 무기를 챙겼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그것은 또 허무하리만치 쉽게 해소되고 말았으니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백설을 오오후미 카이토의 목에서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
"뭐, 뭐야?"
"저게 뭐야?"
숨 쉬는 것마저 잊은 듯 굳어 있던 참관자들이 웅성거렸다.
믿을 수 없게도, 목을 찔렸던 오오후미 카이토는 칼이 뽑혔음에도 피를 뿜지 않을 뿐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껌뻑였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오오후미 카이토가 가장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오오후미 카이토를 보며 도진이 옅게 웃고선 말했다.
"이건 제 승리로 봐도 될까요?"
"아, 예.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넋이 나가 중얼거리듯 오오후미 카이토는 패배를 인정했고 도진이 비무의 승자가 되었다.
-껄껄. 배를 째달라고 하면 째줘야지.
비무의 결과에 위지혁은 심상세계에서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오후미 카이토의 수작은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었다.
일부러 빈틈을 드러내고 그곳으로 공격을 유도하는 건 차라리 정석이라고 할 정도의 수법이었다.
어디로 공격이 올지 알면 더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이는 후발선제(後發先制), 늦게 출수하여 오히려 상대의 수를 앞서 제압하는 묘리로까지 이어진다.
허나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하는 법이다.
오오후미 카이토는 더욱 가소롭게도 빈틈 중 하나를 '목'으로 설정했다.
그러니까 도진이 쉽사리 목을 노리지 못할 거라 예상했으며 설령 노린다 해도 망설임으로 틈을 보여줄 거라 짐작했다는 말이다.
위지혁과 장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그야말로 드러누워 배를 째라는 것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도기(道器)로서의 성정을 지닌 도진이 함부로, 쉽사리 목숨을 취하지 않는 건 맞다.
허나 그것이 천마의 성정은 물론이요 이번 비무에 지장을 줄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과감한 결단을 할 수 있는 도진은 그러나 이번 비무에서는 애초에 결단조차 필요없을 만큼 카이토는 도진의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드러낸 틈? 일부러든 어쨌든 틈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도진은 카이토가 무얼 어찌하기도 전에 그 틈을 찔러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도진은 목숨을 취할 수 있는 틈을 '목숨을 취하지 않으며 찌를 수 있는 능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도진은 위지혁과 함께 장호를 스승으로 두었으니 장호는 살수의 정점에 올라 '사신(死神)'으로 불렸던,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신의 영역에 이른 존재다.
그것은 반대로 말해 어떻게 하면 사람을 안 죽일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통달했다는 것이니 이런 지식과 기술을 장호는 도진에게 조금씩 전수하고 있었다.
그런 사신의 가르침을 흡수한 도진에게 있어 한참 하수의 목을 별다른 상처없이 찌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도진에게나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어서 유지은은 물론이요 카자카미 히로토마저 동요를 보일 만큼 경악스런 재주였다.
까득-
그래서 오오후미 카이토는 패배를 인정했으나 동시에 그 이상의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당했다.'
목을 파고드는 이물감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몸을 멈추고 말았다.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생명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한데 그것은 '진짜 위협'이 아니었으니 그는 김도진의 수법에 겁을 집어먹고 패배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다."
그의 주군인 도련님은 단순히 그 말만을 던져 주었다.
실패했으나 책망하지 않는 건 그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참작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능력의 부족을 통감하게 만드는 일이어서 더욱 분했다.
허나 이 자리에서 실패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고 그는 침묵해야만 했다.
그 뒤로도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비봉 서소담이 비무를 거절하는 건 예상했다.
어차피 한 번 괴롭히는 게 목적이었기에 두 번 권유하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아까의 장면에서 뭔가 깨달은 게 있어서요. 저도 비무를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최중요 인물인 검봉이 비무를 거절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이유가 오오후미 카이토가 낭패를 보았던 비무를 이유로 들어서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인이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다는데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카자카미 히로토는 결국 금봉 한유아를 지목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포권을 하고 비무를 치른 카자카미 히로토는 그리고 또 한 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불쾌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금봉 한유아는 당연하게도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았다.
카자카미 히로토가 의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유아 또한 그를 염탐하고 파헤치려는 데 집중할 뿐 승패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비무는 피곤하면서도 불쾌한 수의 교환의 연속이었고.
찰싹-!
또한 그것을 배가하는 기분나쁜 초식의 교환이었다.
한유아는 자신의 손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 카자카미 히로토의 손을 철썩 때리니 그야말로 이만큼 기분 나쁜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카자카미 히로토는 적당한 선에서 염탐을 포기하고 패배를 선언했다.
이대로는 소득이 없을 뿐더러, 더 했다가는 '진심'을 발휘할 것만 같았기에.
그리하여 비무는 종료되었으나 그의 불쾌한 경험은 끝나지 않았으니 비무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반추회(反芻會)'에서의 도진 때문이었다.
"아, 이건 실례될 수도 있는 질문인데요. 이게 교류를 위한 행사니까 조심스레 해볼까 합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비무에서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학생분들은 일부러 틈을 드러내는 수법을 즐겨 사용하시는 거 같더라구요. 그건 역시 실전에서 단련된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원하는 형태의 공격을 유도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요."
카자카미 히로토의 대답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다만 좀, 예. 실례되는 생각이긴 한데 제 입장에서는 너무 위험한 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조심스레 말하지만 그 발언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오후미 카이토의 목을 찔러 본인은 물론이요 후쿠오카 사관학교 학생 전체를 놀라게 했던 도진이다 보니 카자카미 히로토의 입장에선 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도진은 장호에게 배운 바를 적극 활용하여 은근히 기분 나쁘도록 억양과 행동을 컨트롤 했고 말이다.
그러니까 '니들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빠드득-!
덕분에, 일정을 다 마치고 숭무고를 떠나는 카자카미 히로토는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결국 이를 갈고 말았다.
화내면 지는 것이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기에 더더욱, 패배감에 쉽사리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카자카미 히로토였다.
* * * *
-ㅋㅋㅋㅋㅋ 여윽시 잠룡이다.
-ㄹㅇㅋㅋㅋ 모가지 찔렸을 때 표정 봤냐? ㅋㅋㅋㅋㅋ
-아 거기서 질질 쌌어야 되는데... ㄲㅂ...
후쿠오카 사관학교와의 교류 행사에서 있었던 비무는 과연 화제가 되었다.
이번에도 도진이 상상 이상의 명장면을 만들어 냈으니 학생들은 그것을 주제로 삼아 신나게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학생들을 씹으며 기말고사 준비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기말고사
-니말고사
-디소고사
-리소노오
-미친놈들아 정신차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이윽고 와야 할 것, 기말고사가 도래했고 학생들은 1년의 마지막 시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 화난다."
"이게 재능의 불합리인가?"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기말고사에서도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친구들은 장난스레 한탄하며 그것을 축하해 주었다.
"아. 나도 1등이야, 후배."
"축하해요, 선배."
그리고 유지은 또한 압도적인 천재답게 무공은 물론이요 이론마저 정복해 2학년 전교 1등을 차지해 버렸다.
그렇게 전교 1등 듀오가 된 도진과 유지은이, 어느 카페의 프라이빗룸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때요. 진척은 좀 있어요?"
도진의 물음에 유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전히 지지부진한 편."
물음은 다름 아닌 개미굴과 연관되어 있던 흑도에 관한 조사다.
그 사건 이후로 무림맹은 물론이요 무림 전담 수사 기관까지 힘을 합쳐 뒤를 캐고 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아직 없었다.
"너는 어때?"
"심증은 확실하게 잡았어요."
한데, 놀랍게도 도진은 그 사건에 관해 확실한 심증 하나를 굳혔으니 기말고사 전 있었던 후쿠오카 사관학교와의 교류회 덕분이었다.
"카자카미 히로토. 그놈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요."
개미굴에서 마주쳤던 흑도의 간부는 스미하라가의 무인들과 원류가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미하라를 가신으로 둔, 신풍회의 직계인 카자카미 히로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지자면 원류에 가장 가까운 것이 카자카미일 것이고 가신 가문인 스미하라의 무인들이 뿌리가 같은 건 당연한 일이다.
허나 여기서 중요한 건 개미굴에서 본 흑도 간부의 '원류'가 스미하라가 아닌 카자카미까지 이어진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생포한 흑도의 간부는 스미하라에서 그치지 않고 신풍회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는 거다.
문제는 이 확신이 물증이 되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단 말이죠."
"응, 그러게."
도진은 그 뿌리가 같다는 걸 알아보았음을 넘어 흑도 간부의 무공 연원이 신풍회까지 이어졌다는 것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격이 다른 천재인 유지은 또한 도진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1 더하기 1이 2라는 것을 타인에게 굳이 증명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들어 보여줘도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명확한 실물로 증명해야 하는데 그 실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카자카미 히로토까지 보고서 확신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뭐야?"
"그날 봤던 간부도 그렇지만 귀신가면을 썼던 조직원들까지. 신풍회만이 아니라 다른 곳의 무공이 섞여 있었어요."
"그건……."
유지은은 뒤에 나올 내용을 대번에 깨닫고 말을 흐렸다.
도진은 그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완전히 다른 세력이 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