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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46화 (246/741)
  • 245화

    소담과 젊은 남자의 대화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건 그저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젊은 남자가 의도한 것이었다.

    그저 '서른둘 중의 한 명'이었던 젊은 남자는 소담에게 말을 거는 순간 오롯이 한 명의 강자가 되었다.

    특별히 위협하거나 무공을 과시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존재만으로도 누구나가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강자였기에 숨기고 있던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환영회에 참석했던 숭무고의 학생들은 그 존재감에 경악하면서도 억지로 태연함을 가장했다.

    같은 숭무고 학생도 아니고 외국의, 근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신풍회의 영향 하에 있는 후쿠오카 사관학교 학생의 존재감에 긴장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서야 깨달았다는 건 무림인으로서 상대의 역량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수치에 다름 아닌 일이었기에.

    허나 그 존재감의 주인인 학생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환영회장 전체를 강타한 것이었다.

    '약혼자라니.'

    "비봉이 약혼을 했었어?"

    "신풍회 사람이랑 비봉이 약혼한 사이라고?"

    웅성거림이 퍼져 나간다.

    다른 곳도 아닌 무림학교, 그것도 숭무고에서 말을 잘못 들을 리가 없었기에 그것은 틀림없이 말로서 완성된 정보였고 그 정보의 진위를 따지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소담에게로 집중되었다.

    "무슨 소리야, 이게. 소담아?"

    "……."

    곁에 선 주정아의 말에도 소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라면 당장 부정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고 침묵하는 소담의 모습에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해갔다.

    서소담. 비봉.

    그 신상에 관한 정보가 베일에 싸여 있었기에 '비봉(秘鳳)'이라 불리는, 숭무고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한데 그 후기지수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신풍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학생의 약혼녀라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소담'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미래가 확정된 것처럼 소담은, 결정된 사건의 진행을 위한 부품이 된 것처럼 서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소담아?"

    그리고 갑자기, 그런 소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손길이 있었다.

    소담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한 학생.

    숭무고 42기 최강이자 최고의 후기지수로 인정받은 학생.

    도진이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이 장소에서 잊혀졌던,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존재감이 없었던 도진은 그러나 스스로를 드러낸 순간 젊은 남자가 차지하고 있던 환영회장을 온전히 자신의 존재감으로 바꿔 채워 버렸다.

    젊은 남자가 그랬듯 도진 또한 특별히 기세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이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게 당연하다는 듯 스스로의 존재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고, 그 존재감은 얼어붙어 있던 소담을 녹이고 온기로 채워 주었다.

    덕분에 소담은 두 눈에 힘을 주고 젊은 남자를 노려 보며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분명하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의 말을 부정해 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소란이 일었다.

    "뭐야. 아니라고?"

    "뭐지?"

    그 소란엔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들이 노골적으로 녹아 있었다.

    -뭔데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지?

    -허언증인가?

    그런 존재감을 보여준 명문 무림고의 학생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비봉의 약혼자라는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말을 고스란히 사실이라고 학생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그걸 소담이 정면에서 부정해 버렸으니 이제 그 뒷감당을 젊은 남자가 어떻게 할지 학생들은 주시했다.

    어쩌면 위가 아릴 정도의 상황과 관심.

    싱긋-

    그러나 젊은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름 긴장을 풀어 보려고 했던 건데 제가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한 듯하군요."

    아무렇지 않게, 마치 농담이었다는 것마냥 말한다.

    소담은 그 말에 날카롭게 답했다.

    "네, 많이 상하네요. 다시는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남자는 끝까지 웃었다.

    * * * *

    "아, 그 사람이 카자카미 히로토였구나. 어쩐지……."

    그렇게 작은 소란이 있었던 환영회가 끝나고 집행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정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란의 중심에 있었던 젊은 남자, 남학생이 다름 아닌 이번 방문단의 2학년 대표이자 학생들 중 핵심 인물이라는 걸 나지윤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림은 흔히 말하는 '자이바츠(財閥)', 그러니까 재벌이라는 개념을 넘어 아예 '막부'라 불릴 정도로 무림 세력이 사회에 강하게 녹아들어 있으며 지배 계층에 있다.

    금력과 무력만이 아니라 권력까지도 무림 문파가 차지한 사회인 것이다.

    그야말로 중앙 정부보다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지방 호족이라 해도 될 만큼 일본에서 거대 무림 문파는 근거지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개중 후쿠오카 일대에서 손꼽히는 세력을 자랑하는 문파가 신풍회였다.

    그리고 그 신풍회의 직계 혈족 성씨가 바로 '카자카미'다.

    그러니까 젊은 남자, 후쿠오카 사관학교 2학년의 카자카미 히로토는 다름 아닌 신풍회의 직계로 일본을 대표하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일부러 정체를 숨기다니, 음흉하네."

    "좀 그런 느낌이었지."

    주정아의 말에 오대용은 물론이고 폭룡 류대현 또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가신 가문인 오오후미가의 1학년에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었다.

    물론 정보에 밝은 한유아나 나지윤 등의 학생들은 알고 있었지만 사전에 정보를 모으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경우 무림 세력이 강성한 만큼 암살이나 습격 등의 위험성도 크다 보니 사진 등의 신상 정보를 철저하게 단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기 짝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에서조차 무림의 유력 인사는 물론이요 심지어 국회의원마저 습격받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니 일본은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하는 살벌한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행사에서도 평소의 행실 대로 뒤로 빠져 있었던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뒤의 행동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갑자기 소담이한테 그런 소리나 하고 말이지."

    모두의 시선이 흘끔 소담에게로 향한다.

    "집안끼리 멋대로 오간 이야기였어요. 물론 저는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구요. 약속이 된 것도 아니었죠."

    집행부실에 오자마자 소담은 그렇게 강한 어조로 해명했고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담이 집안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불화가 있을 거라는 예상들을 이미 하고 있었기에 특별하게 반응하지 않아 주었고 더 캐묻지도 않았다.

    "같이 다니면서 하는 소리들도 봐요. 살살 긁잖아요."

    목소리를 높이는 주정아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군요. 천천히 적응 단계를 거치는 방식. 모두가 따라올 수 있는 안전하고도 부드러운 방식이네요.

    겉으로는 순도 100%의 칭찬이지만 미묘한 뉘앙스와 몸짓이 그것을 조롱으로 만든다.

    더욱 악질적인 건 그것을 조롱이라 지적하면 오히려 지적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도록 만드는 화술과 대처였다.

    "나, 그런 사람이랑은 절대로 친해질 수 없어."

    단호한 주정아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고선 오대용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들었지? 앞으로 정아랑 이야기할 땐 직구로 감정을 표현하란 말야."

    그러면서 '사랑한다고~'라면서 대히트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도진이다.

    "가, 갑자기 뭔 소리야!"

    생각지 못했던 도진의 공격에 오대용은 펄쩍 뛰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주정아가 깔깔 웃고선 말했다.

    "대용이처럼 이렇게 사람이 순수하면 좋을 텐데. 그 사람은 진짜 너무 뻔뻔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친'의 칭찬을 하고서 주정아가 비난하는 건 소담이 약혼자란 '농담'을 강력하게 부정한 뒤 카자카미 히로토의 대응이다.

    혹여 강력하게 그 자리에서 부정하지 않았다면 무슨 소문이 돌았을지, 그리고 그 소문을 어떻게든 정정한 뒤로도 따라붙을 더러운 이야기들 때문에 앞이 깜깜했을 악질적인 내용이었다.

    한데 그것을 단순히 농담이라 말하고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오히려 날카롭게 대응하는 소담의 대처가 과한 건 아닌가 싶은 느낌을 받도록 하려는 의도가 보였기에 더더욱 그렇다.

    도진은 소담 대신 화를 내 주는 주정아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뭐 뻔뻔한 거랑 별개로 아마 지금쯤 이불 뻥뻥 차고 있을걸?"

    "어? 어떻게 알아?"

    모이는 집행부원들의 시선에 도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타입은 자존심이 강해서 겉으로 티를 못 내는데, 그래서 쌓이는 열을 배출하지 못해서 화가 더 커지거든."

    * * * *

    "……."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방문단을 위해 마련된 숙소.

    겉으로는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카자카미 히로토는 그러나, 도진의 예상대로 화를 삭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몰락한 귀족년이…….'

    -나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감히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며 그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주의하겠다 말하는 자신의 모습도 이어서 떠올라 화풀이로 몇 명은 도륙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환경이기에 더더욱 화가 끓어오르고 억누르기가 힘들어진다.

    '잠룡…….'

    이 모든 화의 원인은 잠룡이었다.

    몇 번이고 그의 계획에 초를 친, 육시를 해 버릴 놈.

    일부러 방문단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에서 흔히 하는 '그림자 숨기', 그러니까 습격 등에 대비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소담을 목표로 한 계획이었다.

    본래 소담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얼굴만을 알 뿐 그의 '이름'을 몰랐기에.

    방문단의 명단만으론 그가 온다는 걸 알 수 없었고 심지어 그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춤으로써 방문단에 그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소담이 알지 못하게 했다.

    그것을 활용하여 그는 치밀하게 세운 계획대로 상황을 만들어 소담의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약혼자라 선언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만남에서 소담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고 낙인 하나를 찍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잠룡 김도진에 의해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모욕을 당해야 했다.

    까드득-

    결국 참지 못하고 이를 갈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를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연하게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 여자에게 얼마 간의 자유를 주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게 조치해 주었다.

    한데 아무래도 그 관대함은 그녀에게 과분했던 것 같다.

    카자카미 히로토는 결론을 내리고 함께 온 교수 중 한 명을 '불렀다'.

    "……."

    소리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그에게 카자카미 히로토가 명령을 내렸다.

    "그들에게 전해. 조만간 있을 행사에서 약속을 이행하라고."

    히로토의 명령을 들은 교수, 사실은 수하의 눈이 슬쩍 커졌으나 이내 고개를 숙였다.

    "하! 명을 전하겠습니다."

    그가 방을 나가자 히로토는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자비를 깨닫지 못한다면 채찍으로 알게 해 줄 수밖에 없지."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내려진 그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슬슬 때가 되었으니 그것을 알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마도, 눈엣가시였던 김도진까지도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히로토의 머릿속에 내일 일정이 떠올랐다.

    내일은 한일 양국의 무공을 교환해 보는 시간, '비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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