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12월도 막바지를 향해 가는 시기.
숭무고를 포함한 무림학교 학생들이 기말고사를 대비할 시기였다.
일반학교와 달리 4월이 새학기의 시작인 무림학교는 1월이 학기의 끝이었기에 기말고사 또한 1월에 치러졌다.
일반학교보다 한 달 짧은 1학기와 달리 2학기는 오히려 한 달이 긴 것이다.
숭무고는 이 기간을 이용해 축제와 결합한 랭킹전을 운영했다.
그 기간동안 무림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학생들은 이제 이론에도 집중해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학기의 끝이자 방학 이전 가장 큰 관문인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막판 스퍼트를 올려야 할 시기.
평소에도 열심이었던 숭무고 학생들은 더욱 노력에 박차를 가했으나 도진만큼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도진에게 있어선 매일이 최선이었으며 매일이 한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었기에 특별히 더 스스로를 채찍질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여유있는 모습으로 집행부에서의 일을 처리하던 도진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공문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한일(韓日) 무림학교 교류 행사.
'이건?'
한일 무림학교 교류 행사.
말 그대로 한국과 일본의 무림학교가 교류하는 행사였다.
그야말로 '무림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시기였기에 빗장을 걸어 잠그는 순간 도태되는 세상이었으니 국제적인 교류를 가지는 건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이었다.
다만 그 시기와 교류 대상이 이 당연한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답청문 사건으로 인해 요즘 한일 간의 분위기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숭무고에 방문하는 학교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사관학교였다.
후쿠오카 사관학교.
그 이름대로 후쿠오카에 위치한 명문 무림학교였으며…… 신풍회의 영향 하에 있는 학교였다.
'이걸 그냥 진행한다고?'
교류 행사란 게 강제는 아니니 계획된 일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선 얼마든지 취소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번 교류 행사는 진행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다 이건가?'
켕기는 게 없으니 행사도 그대로 진행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인가, 하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근처에 앉아 있던 나지윤과 눈이 맞았고 며칠 전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둘이서 만난 자리에서 나지윤은 선언했다.
"이대로 끝내지 않을 생각이야."
훌쩍 성장한 얼굴의 나지윤은 신풍회에게 이자까지 쳐서 빚을 갚아 주려 했다.
신풍회의 규모와 힘을 생각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했다.
"거들어 줄게."
여상스레 나온 그 말에 나지윤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렇게 쉽게 약속해도 되는 거야?"
나지윤의 물음에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일인데 모른 척 할 리가 없잖아?"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다.
그리고 도리가 아니라 계산적으로 따져보더라도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스미하라 스에코와 함께 왔던 무사와 겨루는 순간 도진은 그들의 무공이 개미굴에서 상대했던 흑도 간부의 무공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걸 대번에 꿰뚫어 보았다.
천마 위지혁과 사신 장호에게 무공의 이치와 이론을 배우고 있는 도진이었기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신풍회가 단순히 마약 유통의 근원인 게 아니라 더더욱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한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이라는 증거였다.
여기에 정의검가가, 도진의 사람이 된 유지은이 관여되어 있으며 앞으로 도진이 해야 할 일과 하려는 일을 생각해 보면 신풍회와는 어떻게든 부딪칠 것이었다.
같은 적이 생겼으니 친구와 힘을 합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혹여 도진에게 힘이 없다면 민폐였을 것이다.
의도가 좋다 해도 실현할 힘이 없다면 결국 가족을 포함한 주위 사람에게 그것은 악행(惡行)이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도진에겐 힘이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천마와 사신의 후계자로서의 힘이.
그러니까 약속을 말하는 데 거창함은 필요 없었다.
-고마워.
나지윤은 그때와 같은 미소를 순간 보여 주고선 도진이 보았던 것과 같은 문서를 들고 한유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선배. 이거 보니까 오늘부터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 맞나요?"
한유아는 나지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년도는 이제 별다른 행사 없이 끝나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일이 생기네."
한유아는 굳이 나지윤의 일을 거론하지 않고 가볍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렇게 집행부는 후쿠오카 사관학교와의 교류 행사를 위한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환영회부터 시작해서 대련까지. 뭐 정석적이라면 정석적인 코스네요."
이번에 방문하는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인원은 32명이다.
인솔 교사 다섯에 나머지는 1학년과 2학년으로 구성된 학생들.
그리고 이 학생들 전부가 신풍회, 혹은 신풍회와 연관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잘 됐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부딪쳐야 할 상대에 관해선 알면 알수록 좋으니 도진은 이 기회에 그들의 면면을 봐둘 생각이다.
"야. 들었냐? 신풍회 새끼들 온다던데?"
"들었지. 진짜 낯짝에 철판 제대로 깐 모양이던데."
척척 준비가 되어 가는 중에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딱히 숨기지 않았던 데다 나름의 힘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 이상 굵직한 일에 대한 정보에 둔할 수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학교 전체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윽고 1월 초, 교류 행사를 위한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방문단이 숭무고에 도착했다.
"……."
숭무고 학생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방문단이 정문을 통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저벅. 저벅.
일부러 만들어내는 발소리는 규칙적이면서 가볍지만 모순되게도 무겁다.
그것은 은연중 드러내는, 사람을 압박하는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기세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일본의 무림학교는 군대와 야쿠자를 합친 듯한 느낌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제식'이 그들에겐 있었다.
그리고 그 제식에 적대하는 순간 자비없이 이를 드러낼 듯 날카롭고도 거친 기세가 어려 있으니 도저히 같은 나이대의 학생으로 보이지 않는다.
학생이라기보단 서슴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특수부대의, 혹은 어두운 흑도의 방식을 몸에 익힌 무림인 같다.
그런 느낌을 받은 숭무고와 숭무영재고 학생들의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무뎌졌다.
무슨 낯짝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오느냐.
그런 생각으로 초면부터 압박을 주려 했는데 역으로 기선제압을 당한 꼴이다.
그 반응에 학생 대표로 가장 앞에서 걷고 있던, 압도적인 덩치와 거친 기세가 인상적인 남학생이 속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와 우리는 단련 방식이 다르단 말이다.'
인큐베이터에서 편하게 살아온 너희들과 달리 우리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해왔다.
토끼가 털을 세우는 듯한 기세로 우리를 압박하려 하다니. 그야말로 가소롭지 않은가.
남학생, 오오후미 카이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기세를 올렸으나.
"어서오세요, 후쿠오카 사관학교 방문단 여러분."
은은히, 그러나 강렬하게 퍼져 나가는 목소리에 기세가 대번에 무뎌짐을 느껴야만 했다.
"……."
당당히 그들의 앞에 서는 금발의 미녀가 있었다.
그야말로 마력(魔力)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의 영혼을 빼앗을 듯한 미모와 분위기를 두른 미녀다.
그 농밀하고도 달콤한 마력은 단단히 정신무장을 하고 온 그들의 미세한 빈틈을 파고들어 그대로 중독시켜 버릴 것만 같다.
금봉 한유아.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금화의 영애로 손꼽히는 후기지수라 들었다.
'과연. 한국에도 인재는 있다는 건가.'
마음먹고 기선 제압을 할 의도였는데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그 계획이 실패했다.
숭무고의 최고 조직인 집행부의 대표. 과연 녹록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도련님'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오오후미 카이토의 입술이 미미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올라갔다.
* * * *
후쿠오카 사관학교의 방문단은 한유아의 안내에 따라 환영회 장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파티장을 연상케 하는 뷔페식이 준비되었으며 자유롭게 어울려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의도한 자리였다.
숭무고에서는 삼재인 정도수, 철탑거권 석호필 등의 교수와 집행부를 포함한 숭무고와 숭무영재교의 대표 학생들이 자리했다.
사회의 축소판이지만 그 본질은 '상류층의 사교 모임'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자리였기에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오고갔다.
한데 어느 순간, 그 분위기에 금이 가게 만드는 만남이 있었다.
"당…… 신은."
물에 한 방울 기름이 섞인 듯 환영회에 어울리지 못하던 소담에게 문득 어떤 남학생이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피하려던 소담은, 그러나 그 남학생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영혼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얼어붙은 소담을 보며 남학생이, '젊은 남자'가 씨익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담. 그래요, 거의 1년 만인가요?"
"……."
소담은 대답이 없었다.
낯을 가린다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충격을 받아서 얼어붙은 것처럼, 대답할 여유조차 없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아는 친구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래, 소담아?"
가장 먼저 주정아가 오대용과 함께 다가왔다.
나지윤 또한 칼날을 숨기고 웃는 얼굴로 소담의 옆에 섰다.
"무슨 일 있어?"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소담은 비봉이라 불리는 후기지수로서 또래를 압도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낯을 가리는 것이지 심지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그저 웃고 있는, 숨기고 있는 실력이 범상치 않을 것 같기는 해도 또래의 남학생을 상대로 굳어 버리다니?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이 긴장을 만들어냈고 이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남학생은 그런 분위기를 오히려 반기는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인사드려서 소담이 놀란 것 같군요. 하긴, 약혼자가 불쑥 나타나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뭐, 라고?"
아무렇지 않게 나온 말에 집행부의 멤버들이 경악했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약혼자'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은 컸다.
"무슨 소리야, 이게. 소담아?"
"……."
주정아가 소담을 불렀다.
하지만 소담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부정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야. 비봉이 약혼을 했었어?"
"상대가 신풍회 사람이었다고?"
웅성거림이 퍼져 나간다.
사실이 아니라면 부정해 줘.
그 웅성거림에 주정아는 시선으로 소담에게 말했지만 소담은 남학생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굳어 버려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사실이어서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게 충격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이 자리에서 잊혀졌던, 그러나 본래는 잊혀질 리가 없었던 누군가의 손이 소담의 어깨를 짚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소담아?"
웃으며 소담에게 말을 거는 건, 숭무고의 학생들에게 소담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는 학생이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환영회의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 또한 당연하게 인식되는, 랭킹전의 우승을 거머쥔 학생이다.
그 학생의 손길에,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있던 소담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소담이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