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답청문 사건 이후로도 시간은 계속 흘러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12월 중순, 토요일.
추위가 제법 기승을 부리지만 오늘은 해가 나와 거실이 햇살로 가득찬 날이었다.
그 햇살 가득한 거실에 느긋하게 앉아 도진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영상과 함께 듣고 있었다.
-정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답청문의 책임이 온전히 나 문주에게 있음을…….
-일본 무림과 합동으로 스미하라가의 주동자들의 진술을 검증하여…….
일주일이 넘게 지났으나 여전히 세상은 답청문의 뉴스로 가득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도 심각한 사건이었으니 겨우 일주일가량으로 가라앉을 수 없는 게 당연하긴 했다.
사건은 신풍회의 가신 가문인 스미하라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 일본 무림 대신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부터 시작하여 한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과한 충성심의 발로로 인해 벌어진 일로 좁혀지고 있었다.
무림 르네상스 시절의 혼란기에 스미하라는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 일환으로 답청문에 손을 뻗었으며 어려운 상황에 있던 답청문의 문주 나문기가 걸려들어 지금까지 왔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참작의 여지는 있으나 그것으로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나문기는 '매국노'가 되어 징역이 확정되었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의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에 핵심 조력자였던 우호문까지.
나지윤에게 있어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답청문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가담자들은 너무나 잘 정리된 장부에 의해 일망타진 되었고 빠져 나갈 여지는 일절 없었다.
그렇게 가담자들이 모조리 빠진 답청문에 이번 사태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정통 후계자가 새로운 문주에 취임했으니 무림에서 특히 중요한 명예나 명분, 정당성 등의 측면에서 나지윤의 시대를 맞이한 답청문의 미래는 오히려 밝다 할 수 있었다.
기껏 그동안 숨겨 온 실체가 드러나긴 했으나 나지윤은 그런 것까지 감안하여 답청문이 변화하면 된다고 말했었다.
띵동-
생각에 빠져 있던 도진을 두들기는 벨소리가 울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하니 다름 아닌 이웃사촌인 우 명장, 우벽진이었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도진은 웃으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어서 오세요, 우 명장님."
도진의 인사를 반갑게 받는 우벽진은 언제나처럼 편안한 차림이었는데, 그 손에 생소한 박스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가요?"
"맞아. 자네의 부탁이니 내 특별히 단단히 일러 만들게 한 보약이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박스는 영약을 정제하여 만든 '보약'이었다.
그리고 그 영약은 다름 아닌 도진이 랭킹전 우승의 부상 중 하나로 받은 것이었다.
이번 랭킹전의 부상에 포함되어 있던 영약은 숭무고 우승자에게 주는 상품에 걸맞을 만큼 효과가 뛰어난 물건이었다.
다만 도진은 그 영약을 직접 쓸 일이 없었으니 먹어봐야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성장 중인 4성의 천마기는 연신극기공으로 극한의 단련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경지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게도 아직 입문 1년조차 되지 않은 육체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을 먹다니, 불나는 데 기름을 붓는 꼴인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그 영약을 한창 무공을 수련 중인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움을 준 것이 우벽진이었다.
"영약? 내가 잘 아는 용한 사람이 있는데 맡겨 볼 텐가?"
우벽진은 삼음지체의 저주에 시달리던 우서진을 치료하기 위해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용한 사람들을 찾아 전국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닌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약재를 다루는 명인들 또한 두루 만났으니 개중에 영약을 맡길 만한 사이의 사람들 또한 있었던 것이었다.
"아,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네와 나 사이 아닌가. 안 될 게 뭐 있겠나."
그리하여 도진은 우벽진 덕분에 효과가 뛰어난 보약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한 번만, 어느 때든 물에 타서 한 포씩 먹으면 된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가루가 밀봉된 스틱이 총 400개.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이 하루에 한 포씩 100일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효과야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상당하겠지만 내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눈부신 효과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내공은 어차피 익히고 있는 무공이 무공이니 꾸준한 수련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육체를 보(補)하는 효과가 강한 게 더 좋다.
-한편 답청문의 우 부대표는…….
우벽진에게 받은 보약을 확인하는 가운데 뉴스에서는 여전히 답청문의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음, 여전히 시끄럽구먼."
우벽진은 뉴스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선 도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자네는 저 일을 직접 도왔었지. 어떻게 생각하나?"
우벽진의 물음에 도진은 조심스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려진 것과는 다른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하던 대답이었다는 듯 우벽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아는 우호문이란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세간에 나문기와 우호문은 매국노라 불리고 있다.
세력을 확장하려는 신풍회에게 한국의 정보를 넘겨준 매국노.
실제로 그런 혐의로 징역을 살게 될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도진은 그렇게 강렬한 '사실'에 의해 생긴 그늘을 생각했다.
-세상에 퍼져야 할 오물을 온전히 끌어안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고 있었다.
사신(死神)으로 세상의 짙은 그늘에 살았던 장호는 그런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기에 확신했고 도진은 스승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친구가 이번 답청문의 새로운 문주가 된 아이였지. 그 아이는 괜찮아 보이던가?"
우벽진의 물음에 도진은 이번엔 확신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 나지윤은 며칠 학교를 쉬었다.
일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중심이었으니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학교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지윤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포장지가 검게 물들 만큼 좋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갑작스레 술이나 한 잔하자는 연락으로 만났을 때의 나지윤은 조금 달랐다.
갑자기 찾아온 너무나 큰 성장통에 아파하던 소년은 그 성장통을 이겨내면서 훌쩍 크고 있었다.
그 배경에 도진은 모르는, 짐작밖에 할 수 없었던 그늘에서의 일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우호문의 면회를 갔던 것도 들었다.
-뭐야? 내가 왜 너희집에서 자고 있어?
-생각해 보니까 나 너희집 어딘지 모르잖아. 회사는 알아도. 그래서 우리집에서 재웠지. 우리집에 빈 방 좀 많잖아.
농담이 아니라 회사에 던져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나지윤의 휴대폰은 그쪽 업계 사람이다보니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진은 그날 나지윤을 자신의 집 빈 방에 재웠는데 일어났을 때의 반응이 꽤 재밌었다.
-콩나물국 끓여 놨으니 이거나 먹고 가.
-……너 왜 요리 잘 하냐?
나지윤은 도진의 콩나물국이 맛있자 그런 말을 했고 도진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전생에서는 도진이 요리해야 할 일이 제법 있었기에 그때의 경험과 기억을 살린 것이었다.
-잘 먹었어. 그럼 내일부터는 학교에서 보자.
-그래. 내일 보자. 아, 그리고 혹시 또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조만간 너희집에 초대 한 번 하고.
-그래. 그럴게.
집을 나서던 때 나지윤의 얼굴을 기억한다.
성장통에 아파하지만 분명하게 이겨내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러니까 도진은 괜찮다고, 우벽진의 물음에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행이구먼. 그래, 그래야지."
도진의 확신에 찬 모습에 우벽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우벽진은 돌아갔다.
그리고 도진은 보약을 나누어 담고서 아버지의 회사로 향했다.
"아버지, 보약 왔어요."
"…네가 먹는 게 좋을 텐데."
잠시 나온 김서우는 '또' 아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
도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농담이 아니라 저 이거 먹으면 큰일난다니까요? 입문한지 얼마 안 돼서 너무 세져서 이거 먹으면 독이라구요."
약간은 과장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며 도진은 아버지에게 보약을 안겨 드렸다.
"그러니까 상하기 전에 드세요. 안에 설명서 있으니까 꼭 보시구요. 하루에 한 포씩만 물에 타 드세요."
"그래, 알았다."
"무공은 열심히 하고 계시죠? 언제 불심검문 할지 모릅니다."
"끙. 잔소리가 많이 늘었구나."
"이게 철이 드니까 늘게 되더라구요."
"녀석, 흰소리는."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네, 아버지."
그 다음은 어머니의 회사였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완전히 같은 반응이었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아버지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전에 말씀드렸죠?"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도진은 같은 소릴 해야 했다.
"알았어. 우리 아들이 주는 거니까 꼭 하루에 하나씩 챙겨 먹을게."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온 결론에 도진은 미소지었다.
"그럼 이제 전 유진이랑 호진이 약 먹이러 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야 해?"
"네,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에게도 약을 전달한 도진은 집에서 동생들을 기다렸다.
릴리와 윌리엄을 만나러 갔던 유진이와 호진이는 오후가 되어서 돌아왔다.
"형!"
"오빠!"
"잘 놀다 왔어?"
"응."
도진은 두 동생이 씻고 나오자 앞에 앉히고선 보약을 내밀었다.
"자, 앞으로는 이거 하루에 하나씩 먹는 거야."
"이게 뭐야?"
"먹으면 좋은 거. 영약으로 만든 보약이야."
"보약!"
"진짜 보약이야?"
"그럼 가짜 보약도 있어?"
"와아아아아!!"
호진이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도진은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보약 먹고 싶어! 나도 먹을래!
떠오르는 건 울며 떼를 쓰던 호진이다.
부모님과 도진의 가슴 속에 멍처럼 남아 있던 기억이다.
무언가를 알고 떼를 쓰는 건 아니었다.
무림학교 고등반에 합격한 장남을 위해 부모님이 어렵사리 마련한 보약을 먹지 못하게 하니 어린 마음에 떼를 썼던 것이다.
"자, 오늘부터 하나씩 먹는 거야. 빼먹으면 안 돼. 알았지?"
"응!"
"써!"
"하하하. 약이 쓴 건 당연하지."
한껏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꼴깍 삼키는 동생들의 모습에 도진이 웃었다.
이제는 도진만이 가지고 있는 멍이다.
부모님은 그런 지워지지 않을 멍이 없는 삶이다.
그리고 이제, 도진이 가지고 있던 멍도 희미해지며 곧 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
기타큐슈시.
신풍회의 사옥 내 화려하게 꾸며진 커다란 방 안에서 젊은 남자가 말했다.
"한국에 한 번 가 봐야겠어."
검은 야행복을 입고 눈만 내어 놓은 중년인이 젊은 남자의 말에 눈이 살짝 커졌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젊은 남자는 씨익, 그러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웃음을 짓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까지 되니까 한 번, 얼굴을 직접 봐야겠단 말이야?"
그리고 며칠 뒤. 숭무고 집행부에 공문 하나가 왔다.
-한일 무림학교 교류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