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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43화 (243/741)

242화

나문기는 1심에서 20년을 선고받았다.

예상하기로 20년에서 25년 사이로 선고가 될 듯했다.

'모범수 서약'을 한다면 문제없이 복역할 경우 10년을 살다 나올 거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모범수 서약이란 '자격이 되는' 무림인이 원할 경우 하게 되는 서약으로, 형을 단축시킬 수 있으며 무공 또한 폐하지 않을 수 있는 서약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대가가 있었다.

무림인으로서의 힘을 발휘해 무림인이 필요한 온갖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는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 어떤 문제도 일으켜서는 안 되며 내공을 다 억누르지 않았으니 그만큼의 온갖 제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제약 안에는 인권을 제한하는 것들마저 있어 소위 말하는 전자 팔찌나 발찌를 넘어 '목줄'마저 해야 할 정도였다.

명예, 자존심이 목숨보다 소중한 무인들은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서약이었다.

출소 후에도 본래 선고되었던 기간동안은 사소한 범죄라도 저지르면 줄어들었던 형을 고스란히 살아야 하기도 했다.

나문기에게 협조했던 핵심 인물이었던 우호문은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쪽은 모범수 서약을 한다면 6년 정도로 줄어들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리고 나문기와 우호문은 둘 다 모범수 서약을 받아들였다.

…결코 기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문기는 아버지였으며 우호문은 사진으로 밖에 본 적이 없던 친할아버지 대신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나지윤을 대해 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모범수 서약 같은 단어와 엮인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나지윤은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머리에 쑤셔박아야만 했다.

쑤셔박고, 잊지 않도록 새기며 쓸 수 있도록 가공하고 분류하여야만 했다.

이제는 그가 답청문의 문주였으니까.

하기 싫다고 회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이제 그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면 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체감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문주의 집무실에 앉아 하기 싫은 일을 기계처럼 해 나가고 있던 나지윤에게 커피를 내놓으며 묻는 건 다름 아닌 정 과장이었다.

아버지 또래의 사람으로 아버지와 함께 자랐던 사람.

그래서 아버지의 둘도 없는 지우(知友)였으나 그랬기에 친구의 변해 버린 모습에 분노하고 실망하여 가장 먼저 나지윤의 힘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람.

그의 물음에 나지윤은 커피를 들며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특유의 멋진 미소였으나 그늘을 결코 지워내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 보면 이쪽 업계의 사람답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잘 만들어진 표정'이었으나 나지윤이 걸음마를 하기도 전부터 지켜봐 온 정 과장의 눈을 속일 정도는 되지 못했다.

나지윤은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말했다.

"어렵네요. 이래서 인수인계가 철저하게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장난스러운 어조로 반 진담의 한탄을 했다.

그런 식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으니 문파 내부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문기와 우호문을 포함하여 가담했던 문도들, 그리고 침투해 있던 신풍회와 스미하라가의 끄나풀들을 쳐낸 뒤의 공백마저 메꿔야 했으니 더더욱 부담이 가중되었고 그것을 나지윤은 문주로서 가장 크게 짊어져야만 했다.

나지윤은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기에 그 크나큰 짐을 짊어지고서도 외부에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어느새 이렇게 자랐구나.'

정 과장은 어느새 자신보다 커 버린 친구의 아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고선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건?"

나지윤의 시선이 봉투로 향하자 정 과장은 최대한 담담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전대 문주의……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입니다."

* * * *

-본래는 전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편지다. 그러나 너는 답청문의 문주로서, 정보를 취급하는 단체의 수장으로서 비사(秘事)마저 알아야 할 의무이자 권리가 있기에 이 편지를 남긴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나문기의 성격을 반영하듯 반듯하면서도 딱딱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석연치 않았던 이번 일의 진실이, 담담히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 답청문은 호국 가문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으나 여타 세상을 등진 가문들이 그러했듯 이후 세상과 담을 쌓으면서 시간 속에서 도태되어 갔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세상과 교류를 끊은 존재는 도태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신비 가문이자 호국 가문이었던 답청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가문이었기에 더더욱 그것이 심했는데,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이 경제적인 문제였다.

-아버지는 기원을 알 수 없는 무공에 당한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아내마저 불치병을 앓게 되었다고 나문기는 담담히 문장을 이어 나갔다.

-그때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번듯한 양복을 차려입은 일본인이었다.

무인이었으나 차라리 신문물을 받아들인 신사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은 나문기에게 금전적인 원조를 제안했다.

-굳이 논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거절했어야 했으나 당시의 나는 그런 당연하고도 순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제안을 수락했다.

세상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면, 사람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면 이 세상에 비극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있다 해도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가 되었을 터.

…그리고 나문기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해야만 했다.

-아내는 막대한 금액을 들인 치료에도 결국 숨을 거두었다. 답청문은 감당할 수 없는 빚에 그들의 요구를 가능한 수용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문기는 단어마저 골라가며 최대한 담담하게 서술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글자를 이루는 선의 굵기가 달라져 억누르지 못한 감정을 은연중 드러내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고도 나를 위해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와 함께 문파를 짊어져 주셨던 우 삼촌이 지켜냈던 문파가 그들에게 넘어갈 단초를, 내가 만들고 말았다.

-그런 고개를 들 수 없는 대죄를 짓고도 아내를 결국 살리지 못했다.

-나는, 짐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담담하지만 그래서 확연히 감정이 느껴진다.

놓아서는 안 될 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이 너무나 무거워 들 수 없을 상황이 되면 버려서는 안 될 짐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만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문기는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으니.

-네가 있었다.

"……아."

-처음 나와 눈이 마주치던 때의 너를 기억한다.

-처음 나를 아빠라 불러주던 때의 너를 기억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안아 달라 두 팔을 벌리던 너를, 나의 목을 그 여린 손으로 끌어 안던 너를 기억한다.

나문기는 도망쳐서도 안 되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들의 손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돌려 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저지른 잘못만큼은 모두 안고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인생을 걸고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도와주마. 우 삼촌의 그 말을 못난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하여튼 어릴 때부터 날 속이는 덴 선수였지. 정원우 그 친구에게도 빚을 지고 말았다.

우 부대표와 정 과장은 그렇게 나문기와 함께 해 주었다.

-결국 나는 평생을 갚아야만 할 빚을 지게 되었다. 나는 그 빚을 평생 갚으며 살기로 했다.

그 대가로, 나지윤에게는 그 어떤 빚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나지윤은 그 어떤 빚도 남지 않은 답청문의 문주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편지의 글자들은 점점 더 반듯함을 잃어 갔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받고 자랄 수 있었다.

-너에게는 내가 있으니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여 주고 어머니에게 배운 것들도 아내 대신 내가 다 해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콰드득.

나지윤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쥔 주먹 안에서 편지가 구겨졌다.

투둑. 투두둑.

하늘은 맑은데 이상하게 비가 왔다.

나지윤은 쥔 주먹으로 비를 막아 편지가 젖지 않도록 했다.

정보는, 정보가 담긴 문서는 젖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후두둑.

* * * *

-야. 술이나 한 잔 하자.

나지윤의 연락에 도진은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메시지에 찍힌 주소에 따라 도착한 곳은 프라이빗룸이 잘 갖춰져 있는 술집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룸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나지윤은 독한 양주로 나발을 분 뒤의 모습이었다.

"오, 왔냐."

"아니 같이 먹자고 해 놓고 먼저 집어먹다니 매너 어디?"

나지윤은 킬킬 웃었다.

"한 병 정도야 가볍게 입가심으로 먼저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자."

그러면서 따라주는 양주를 도진은 거침없이 한 잔 마셨다.

목이 아릴 정도로 독한 술을 그렇게 말없이 몇 잔이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지윤은 혼잣말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설마설마하긴 했지. 이게 다 쑈겠어, 하고. 근데 정말로 쑈였네?"

"우리 아버지가, 빚 안 갚으려고 대형 프로젝트를 발동하고 멋지게 성공시켜 버린 거야. 낄낄."

"덕분에 나는 빚없는 답청문을 물려 받은 거지. 그것도 반동분자까지 싹 쓸린 클린한 답청문을 말야."

자랑하듯 말하는데 울고 있는 것만 같다.

도진은 그것을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들어 주었다.

아쉽게도 도진은 능숙하게 사람을 달래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때에 그저 함께 하고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진은 그저 최선을 다해서 나지윤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뭐, 아들에게 아무 것도 말을 안 해 준 건 좀 섭섭할 수 있는데 사실 그게 현명한 거지. 내가 알면 그 원대한 계획을 다 망쳐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주 잘하신 거야. 내가 아예 엄두도 못낼 만큼 대단한 일을 하신 거지."

희생없이는, 아니 희생을 한다 해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던 답청문을 나문기는 자신의 힘과 우호문의 도움으로 회생시켰다.

"……어머니는 지키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답청문은 지켜내신 거야."

그리고 나지윤까지도.

"존경스럽지. 정말로 존경스러운 일이야. 근데, 근데 씨발……."

나지윤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겠다는 어리광만큼은 술기운으로도 내뱉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독한 술을 털어 넣었다.

"…근데 넌 왜 안 취하냐? 너 술 약하잖아."

"아니, 누가 그래? 나 술 센데?"

"안 먹는 술이 어떻게 세?"

"고수니까 그렇지."

"아, 재수 없네."

나지윤은 중얼거리고선 양주병을 들었다.

"나 한 잔 마실 때 넌 두 잔 마셔."

"와, 몰랐는데 이놈 술꼬장이 있네?"

"꼬장이라니. 이래야 공평하지."

"야, 나처럼 술 센 친구가 있어야 필름 끊길 때 뒤처리를 해 줄 거 아냐. 그러니까 오히려 감사해야지."

"오케이. 그럼 나 오늘 끝장을 볼 테니까 네가 책임지고 나 집에 데려다 놔."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을 그 요구에 도진은 피식 웃었다.

"오냐. 이중포장을 해서라도 안전하게 배송해 줄 테니 맘 놓고 마셔라."

"아, 노잼."

그렇게, 밤이 늦도록 도진은 나지윤과 술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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